제목과 같이 예전 역사게시판에 쓴 글인데 반응이 좋아서 밀리터리 게시판에 다시한번 적어 올립니다.
기존의 오자, 탈자는 최대한 교정했고 문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좀 다듬었습니다.
최종병기 활
'최종병기 활' 이라는 영화, 재밌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우리나라의 신궁 한사람이 활 한 자루만으로 무시무시한 오랑캐들을 쏘아 잡고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던 여동생을 구출하며 펼치는 액션영화죠.
그런데 그 영화를 본 지인 중 총 한 자루로 악당 여럿 잡던 서부 영화 처럼 "이것은 구라야. 아무리 신궁이라지만 개 뻥이다. 어떻게 활 한자루로... 현실감 있게 못 만드나?"라고, 하시던 분도 있던데요^^;
최종병기 활 이라는 영화가 과연 완전한 구라였을까요?
당시 조선사람들의 활 쏨씨에 대하여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통해 알아봅니다.
병자호란이 벌어지기 30년 전 정유재란 때의 이야기입니다.
1597년
1592년 임진년의 침략 후 다시 재침략하여 남해안의 조선 수군을 쓸어버렸던 왜적은 육군을 동원해 전라도 지방을 총공격합니다.
이 때 전라도의 임실, 구례, 남원. 경상도의 함양, 운봉 등의 백성들은 왜적에게 쫓겨 산 속으로 피신을 하고 일부는 왜적이 회유책으로 통행증과 쌀 배급을 하는 것을 보고 왜적에게 협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글공부를 하고 학문을 배웠던 양반들은 대부분 산으로 피신합니다.
양반들이 왜적에게 잡히면 "어? 이거 지식in이다. 본토로 데려가자...!!!"하고 바로 배를 태워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왜적들 입장에서 보면 조선사람 중 글을 알고 혹은 조선에서 지방의 작은 벼슬이라도 했던 양반이라면 도자기 굽는 도공 같은 기술자와 동등하게 귀하게 여겼답니다. 당시 빤스만 입고 설치던 왜적들이 보기에는 툭~! 치면 한문을 줄줄 쓰고 술 한 잔 먹여주면 한문으로 시를 줄줄 읊는 천조국(당시는 천조국이 미국이 아니라 명나라입니다.^^) 명나라의 은혜를 받은 조선의 양반들이라고 생각 했겠지요. 지금이라면 괜찮은 정품 프로그램이 빠방하게 깔린 고사양 컴퓨터를 훔쳐가는 기분이라 할까요?
아무튼,
이렇게 산 속에 피신을 했던 양반들 중에 전라도 남원 출신의 조경남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기록에는 1570년 출생으로 정유년 당시 28세. 그때까지 과거시험은 치루지 않았던 지방의 그냥 글 읽는 선비의 신분이었습니다.
조경남 할배의 후대의 기록을 보면 어릴 적에 장난삼아 활을 좀 쏘아보았다는 기록이 짧게 있을 뿐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글이나 읽는 서생일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1579년 9월 22일입니다.
왜적들은 낮에는 큰 고을과 그 고을 주변을 수색하고 밤에는 한 곳에 무리를 지어 밤을 지새우고 있던 상황입니다.
조경남 할배는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식량도 다 떨어져 가고 또 고향 사람들이 왜적에게 많이 살해당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는데 어차피 자기도 죽을꺼 왜적이나 몇 몇 물리치던지 해서 선비로써 할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같이 피신하던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나라의 은혜도 갚고 선비로써 치졸하게 숨지 말고 의병이라도 조직하여 왜놈들을 때려잡자고 역설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어이없게도 일제히 "니가 가라. 하와이?"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당시 조경남이 그 고을의 무인 출신도 아니고 나라에서 내려 준 벼슬을 하던 명망 있는 집안도 아니니...
이 때 조경남할배의 일기에는 동네사람들이 "바로 나에게 한 번 죽을 것을 부탁하였다."라고 적어 놓습니다.
동네 사람들 입장에서는 여기까지 어렵게 살아 피난 왔는데 님이 뭐라고 남정네들 데려가서 죽일라 그러냐구? 니가 언제 칼 좀 써봤냐구? 하고 한 사람도 지원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빡친 조경남 할배는 다음날 새벽에 자기 집 노비 두 명만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노비는 무슨 죄냐구...ㅠㅠ)
이 때 원래 이런 일에는 또 나만 빠질 수 없지! 라는 생활신조를 가진 당대 오지라퍼 중 한 분이신 박언량이라는 분이 동참하게 됩니다. 물론 이분도 글 읽던 선비입니다. 흠...
급조된 파티. 특공용사 4명이서 한참 산 속을 헤매며 왜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찰라 남원성에서 인적이 드문 산길로 왜적 5명이 수색 나온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왜놈들은 산 속을 수색하며 숨어있던 조선 백성들을 찾아 약탈하고 강간하고 뭐 그러라고 다니는 개쉥키 같은, 아니 그냥 개쉥키입니다.
여튼 숫자상으로는 4 대 5, 일반적으로 훈련 받은 군인이라면 지형지물도 잘아는 본토박이 사람들이고 기습에 게릴라전이면 쉽게 극복 할 수 있는 대결이겠지만 상대는 미친개 같은 왜적 5명, 이쪽은 글이나 읽던 선비 2명에 마당 쓸고 나무하던 노비 2명.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 미친개 같은 것들을 잡는단 말입니까?
조경남의 일기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는 박언량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4명이고 적들은 5명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지만 우리는 의리에 분발한 신예병(新銳兵), 저들은 바로 멀리 와 싸워 피곤한 군사다. 더욱 그대는 일당백할 용사요, 내 또한 한 번 죽음을 결심하였으니 이것으로서 헤아린다면 적은 바로 안중에 들어온 것이다. 힘써 싸우라.”
하고 바로 매복을 지시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비 두 사람의 무기는 활과 화살, 노비들은 지게작대기 같은 몽둥이였습니다. 왜적들의 무기는 전부 일본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히 이때 왜구놈들이 조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난 봅니다.
왜적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지 조경남과 박언량 할배는 일제히 화살을 발사합니다.
이 분들 양반님의 활 솜씨는 우리가 늘 역사 관련 드라마나 영화에 보듯 봄놀이 갈 때 술과 안주 싸들고 들에 나가 한잔 자시고 활 좀 쏘고 뭐 그런 정도 아니겠습니까? 이 분들은 무인 출신이 아닙니다. 글 읽던 양반입니다.
왜적들과 전투 결과는,
조경남 할배와 박언량 할배가 함께 일시에 화살을 발사하여 잇달아 5명의 왜적이 모두 화살에 명중 했는데, 두 놈은 데미지 100% 제대로 들어가 바로 거꾸러지고 세 놈은 화살을 몇 대 맞고는 빨피 상황에서 검을 던지고 살려주기를 구했다고 합니다. 이 무슨 소설 같은 이야기 입니까?
역시 신궁 이성계가 세운 나라 백성들답네요.
조경남 할배는 따라온 노비들에게 명령하여 왜구들에게 자비는 없다! 모두 쳐 죽이게 하였고 노비들은 신나게 몽둥이 찜질로 스트레스를 풀며 숨이 붙어 있던 왜구들을 다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이 때, 충직한 노비 한 명이 왜적의 귀를 베어 전적으로 삼으려고 하자 제지하며 말하기를,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은 수급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 된 직책을 다하는 것뿐이다.”
라고 전설아이템으로 인벤토리를 꽉 채운 악사처럼 시크하게 한마디 던지고는 돌아섰다고 합니다. 졸개 몹 몇 마리 죽이고 떨어지는 잡템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요즘 사람들과도 어딘가 통하는 부분이 있으신듯 합니다.^^
(이 때는 왜적의 목이나 귀를 베어 관청에 가져다 보여주면 귀 하나에 왜적 1명 사살로 인정합니다. 전쟁이 급박하던 난리 초기에는 왜적 1명 사살이면 노비는 면천, 선비는 과거 급제 등의 포상이 이루어졌고 전쟁 후반으로 가더라도 그나마 왜적 목 하나 정도면 쌀을 몇 말 정도 바꿔 갈 수 있는 이벤트 할인권 정도 되는 아이템이었습니다.)
이렇게 최초 출전에서 왜적 5명을 활과 몽둥이로 때려잡고 가족에게 돌아온 조경남 할배는 마을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의병장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평소 글만 읽고 활쏘기는 재미삼아 하는 선비들이 이 정도의 활 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네요.
물론 다음날 전투에 비하면 이 날은 장난 같은 싸움이었습니다만...
9월 23일
동료를 잃은 왜적들은 약이 바싹 오른 상태로 이제 수 십 명씩 짝을 지어 수색에 돌입하게 됩니다.
사기가 최고조에 달한 조경남 할배는 다음날인 23일 새벽에 또 가족을 숲속에 숨겨 두고 몇 사람의 하인을 거느리고 왜적을 토멸한다고 동네사람들에게 전하자 이제는 너도나도 의병장을 따라 공을 세우기 위해 모여드는데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20여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22일 첫 전투에서 돌아온 후 같이 갔던 노비들이 엄청나게 자랑을 했겠지요.
이날부터는 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을 받기 전이었던 김완이라는 전라도 영암 출신의 할배도 참여하였고 정사진이라는 글 읽던 선비도 같이 동참하게 됩니다. 출발 인원은 총 28명. 출발 하여 얼마지 나지 않아 전라도 임실 쪽에서 약탈을 한 말고 소를 몰고 지나가는 왜적 50명을 발견합니다.
이때 조경남 할배는 이 왜놈들을 앞질러 가서 매복하기 좋은 어느 골짜기쯤에서 기습을 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지만 대부분의 의병들은 숫자로 봐서 너무 열세인 자기들의 처지 때문에 전의를 상실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제처럼 다섯놈 정도만 다니는 일행을 족치면 딱 좋은 그림인데...
분위기를 눈치 챈 조경남이 말하기를
“군대란 정(精, 정예로움)한데 있지 수효 많은데 있지 않소. 적을 만나 후퇴하여, 적으로 하여금 형세를 이용하게 하면 많은 것이 더욱 해로움이 있소. 그대들 가운데 만일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이제 뒤로 처지시오.”
하고 돌아보니... 보통 영화 같은데서는 주인공이 이렇게 말하면 어느 한사람이 나는 당신을 따르겠소! 하고 주위를 격동 시키면 너도나도 다 따르겠다고 일어서고 씩씩한 배경음악이 쫘~악 깔리고 전사들의 결연한 눈빛 같은 것을 보여 주게 되는데...
현실은 지못미...
이 때 실제 왜적을 보고 고쟁이에 소변을 지리며 뒤로 물러난 사람이 7~8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28명 출전에 7~8명이나 빠지면 엄청난 전력 손실이지요. 여기다가 왜적과의 육박전은 당연히 조선 사람이 밀릴 것이고 믿을 것은 오로지 최종병기인 활 뿐인데 이 때 활을 가진 사람은 조경남 할배 본인과 김완ㆍ정사진ㆍ박언량 할배 네 사람뿐이었답니다. 나머지 사람은 모두 몽둥이나 집에서 쓰던 식칼 정도를 들었다고 하네요.
이리저리 눈치 싸움 끝에 시간은 흐르고 매복을 계획한 골짜기에 도달하니 왜적들은 벌써 골짜기를 빠져 나간 상태, 의병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돌아가자는 눈치들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 번 더 빡친 조경남 할배는 발업한 질럿 마냥 마침내 고함치며 혼자 돌격하게 되어 고의로 매복 위치를 발각 시키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는 돌격 아니면 후퇴뿐이니 따라올 의병들은 같이 나가 돌격 하고 나머지는 아예 도망이나 가게 만들,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심산이지요.
왜적들은 몇 되지도 않는 의병들을 보고는 칼을 뽑고 총을 들고 돌아와 잡아 먹을듯한 기세로 의병들을 몰아쳐 들어왔다고 합니다.
의병들은 기가 질려 대부분은 겁을 먹고 후퇴하였고 조경남 할배를 따라 같이 골짜기로 들어온 사람은 모두 6명뿐이었다고 합니다.
6 대 50여 명의 전투입니다.
싸움이 한창 붙게 되자 조경남 할배는 골짜기 언덕에서 저격하기 좋은 위치를 잡고 돌입하는 왜적에게 한발씩 화살을 쏘았는데 조총을 가진 왜놈들 3~4명만을 먼저 골라 쏘아 죽이게 되자 왜적들의 기세가 잠시 주춤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남은 왜적들의 숫자는 많고 의병의 숫자는 적은지라 이 점을 눈치 챈 왜적들이 죽기 살기로 의병들이 숨어 쏘는 곳으로 포위하며 육탄돌격을 감행 합니다. 조경남 할배는 왜적의 선발대 5명을 화살로 차례차례 명중 시켰지만 왜적들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 들어 결국 부근에서 활을 쏘던 정사진 할배는 왜적들과 근접거리에서 왜적의 칼을 맞았는데 왼발 복숭아 뼈 부근에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언량 할배도 왜적과 근접전이 벌어져서 왜적이 휘두르는 칼을 활로 막다가 활이 다 부서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일촉즉발의 정말 위험한 상황입니다.
박언량 할배는 맨손으로 왜적 몇 놈을 밀쳐내고 포위를 뚫고 나갔는데 이 분도 영웅입니다. 왜냐하면 박언량 할배는 먼저 도망갔던 동료들이 버리고 간 무기 중에서 제일 실하게 생긴 모난 몽둥이를 들고 다시 돌아와 근접하는 왜놈들을 차단하였고 이 틈에 발에 상처를 입었던 정사진 할배는 다시 일어나 한 놈씩 왜적들에게 화살을 먹였다고 합니다.
조경남 할배와 김완 할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속 활을 쏘는데 뜻밖에도 김완 할배의 활이 부러졌답니다.(중국산인가?)
그러자 왜적이 김완 할배를 쫓아와 상당히 다급한 상황이 그려지는데 조경남 할배가 김완 할배를 쫓던 왜구를 화살 한발로 제압해 버립니다. 이때까지 죽은 왜놈의 숫자가 15ㆍ6명이 넘었는데 왜놈들은 더욱 약이 올라 결사적으로 싸움을 걸며 돌진해 오곤 했다고 합니다.
조경남 할배는 거의 화살이 다 떨어지자 큰 소리로 화살을 구하였고 박필남이라는 할배가 도망갔던 의병들이 버리고 간 화살을 주워 던져주고 그걸 받아 조경남 할배는 연이어 살을 먹여 왜적들에게 쏘았다고 합니다. 정말 순간순간이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날 전투는 거의 아침 7시 부터 시작하여 오후 5시 까지 벌어졌는데 이때까지 죽은 왜놈들은 모두 무려 36명이라는 대단한 전과를 올립니다. 남은 왜놈들은 모두 도망갔고 잠시 쉬고 난 의병들이 다시 싸움터를 돌아보니, 넘어져 있는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웠는데 비린내 나는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노획한 왜놈의 짐꾸러미를 거두어 같이 싸운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고 뒷날의 거사에 미끼로 삼게 하였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에 김완과 박언량 할배 등 몇 사람이 다시 싸움터로 몰래 가서 왜적의 머리를 베어 왔답니다.
그런데 이 날 전투에서 조경남 할배는 왜적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도 상처 없이 침착하게 화살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난전이 벌어졌을때 조경남 할배의 충직한 집안 노비인 대손(大孫)이란 자가 조경남 할배 옆에 붙어서
"시방! 왜놈들 땜에 주인 따라 이 무슨 개고생이냐!!!"
하며 돌아서 접근하는 왜적들을 분노의 모난 몽둥이(기록에도 모난 몽둥이로 실제 쓰여 있습니다.)로 때려잡아 조경남 할배의 뒤를 지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597년 정유년 9월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출처 | 출처 - 난중잡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