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Hur 히브리어로 '훌의 아들(Ben)' 이라는 뜻의 벤후울의 미국식 발음이라고 할 수 있는 벤허(2016)
대사 몇 줄은 오랜만에 감탄을 자아낼만한 대작에 걸맞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작가나 감독은 예수의 생애와 말씀의 의미에 대해 깊은 공감과 통찰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관의 상영 횟수를 더 늘려보고자 뭉터기로 가위질을 해놔서 의미 전달에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작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장면들을 여럿 포석했습니다.
후반 장면에서 에스더가 로마를 향해 분개하는 유다 벤허를 향해 '믿음을 가지세요' 라고 말을 하는데
어떤 관객은 실소를 하기도 했습니다.
언뜻 상황에 맞지 않는 어색한 대사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에스더의 대사는 예수님이 등장하는 앞선 장면에서
이미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했다는 점을 떠올리려는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라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의미를 강조한 것이죠.
영화 초반에는 비싼 제작비에 어울리는 '참 고급지다' 라고 할만한 유머스런 대사가 몇 담겨 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대사는 성경 말씀 수준의 감탄스러울 정도의 통찰력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이 로마군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을 보며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공감한다는
벤허의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의 경우입니다.
나무를 다듬던 예수님이 그런 벤허에게
증오하고 대적하는 마음은 적을 만들 뿐이므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한 것이죠.
벤허 : 그럼 그들의 노예처럼 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그를 보면서 그것에 대해서는 그의 아내에게 물어보라고 말하는 것으로 장면이 끝납니다.
성경에서의 예수님 말씀 특징 중 하나는 예수님 앞에 나타난 당자사의 특별한 깊은 사정을
꿰뚫어,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리를 그들의 사정과 깊이 연관짓는 성경 구절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극작가나 감독이 창작했음에도 바로 그런 예수님 말씀의 특징을 드러낸 것이죠.
사실 그 대사를 하기 위해서 원작과 전작에는 없던 장면들이 할애되었습니다.
벤허가 그의 집에서 노예와 같은 등급이라 할 수 있는 노비를 사랑해서 여종 에스더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윌리암 와일러 감독의 전작에는 없었던 플롯입니다.
밋밋한 러브스토리는 초반에 지루하다는 평이 나온 이유일지 모르지만 꼭 필요한 장면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비천한 노예 신분이었지만 그가 그의 주인을 증오하거나 적대하지 않고
연모했고 그러한 사랑스런 마음이 주인에게 전해져 그의 안방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물론 영화에서의 에스더는 예쁜 모습만 부각시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설정이라서 조금 아쉽기는 했습니다.
또한 중간과 후반에 드러나는 에스더의 역할은 센케비치의 소설 쿼바디스의 여주인공 리기아를 떠올리게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 대사는 300여년 후 로마의 입장을 대비시킨 것이기도 했습니다.
변방 식민지 중 하나였던 이스라엘을 통해 이 땅에 오신, 모든 사람의 메시아가 예수님이셨음을
로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향해 전도했던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었고 로마의 안방을 차지한 기독교는 로마를 통해
전 세계에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 즉 인류를 죄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메시아이심을
만백성에게 전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등장한 제국들의 흥망 성쇠에 걸쳐 종으로 잡혀가는 처지의 비참함과 곤궁함을 통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했습니다.
앗시리아 제국,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제국, 헬라제국,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존재감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중요성에 있어서 결코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해 댓가로 이미 약속된 징벌의 형식인 포로가 되거나 식민 통치를 받았지만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구했을 때 그들은 종의 신분이더라도 제국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의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로마 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러한 능력이 드러나는 키포인트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펼치는 사랑이라는 바탕이
있을 때 가능함을 성경은 일관되게 강조하며 영화 역시 예증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라고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자신의 처지가 비천하고 곤궁할지라도 그가 눈을 들어 이웃과 하늘(하나님)을 향해
사랑의 마음으로 돌이켜 세상을 돌아본다면 이미 자신에게 또 다른 능력이 덧붙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노예로 전락했던 유대인들의 수많은 역사가 우리들에게 웅변하는 진실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절망하여 주저 앉고 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해전 장면과 경주 장면은 강조할 필요도 없이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몰입할 수 있었고
천재적인 장면 구성과 설정, 그리고 상상을 구체화 시키는 화각 몇개가 덧붙어
등장 인물과 함께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은 흙먼지가 날려 만들어내는 형상으로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아주 멋진 아이디어를 잘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기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반만 보고 온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영화사는 돈 벌려고 많은 돈을 들여 대작을 만들어냈지만
영화관은 돈 벌기 위해 한번이라도 더 많이 상영하려고 많은 부분을 잘라내다보니
매장에 감독판으로 전시될 때까지는 주요 장면만 강조하는 영화로 만족하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요장면만을 영화관 시설의 잇점과 함께 즐긴 것 만으로도 지갑이 썰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