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게시판에 올린 글인데, 여기 게시판에도 맞춤맞는 부분이 있어 같이 올려 봅니다.
안대회의 <문장의 품격>이란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 공유하고 싶어 내용 올려봅니다.
북학자로 널리 알려진 박제가는 17세에 결혼을 했습니다. 이 때 장인 되는 어른이 이관상(李觀詳)이란 무인입니다. 박제가가 20세가 되던 해, 장인이 돌아가시자 박제가가 제문을 지어 올립니다. 보통은 형식적으로 고인의 업적을 찬양하거나 상투적인 애도의 말로 채워지기 마련인데, 박제가는 장인과 자신의 추억이나 대화로 제문을 채웁니다. 제가 결혼을 하지 않아 요즘의 옹서지간(장인과 사위의 관계)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읽어보니 꽤 특이하고 재미있습니다. 또, 장인에 대한 막내 사위의 애정이 잔뜩 묻어나오길래, 일부 문장을 발췌해 소개해 봅니다.
1. 장인의 말을 빌려타다
제가 장가를 든 지 이틀째 되던 날, 공께서는 달빛을 받고 나오셔서 우물 난간 동편에 지팡이를 세워두고 쇄마(鎖馬, 관용 말/ 요즘으로 치면 관용 에쿠스?)를 돌보셨습니다. 제가 "한번 타보고 싶습니다."라고 청했더니 공께서는 바로 허락하시고 종을 돌아보며 "어서 안장을 갖춰서 가는대로 맡겨두거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저는 황급히 그만두라 하고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안장을 뭐 하러 메우나요? 제가 말갈기를 잡고 등에 올라타서 채찍을 한 번 치면 말이 달릴 텐데요."
공께서는 놀라고 기뻐하며 직접 술을 따라 주시고는 제게
"야심할 때까지 타지는 말게나!"
라고 조심시켰습니다.그리하여 검은 옷을 입은 종에게 술값을 가지고 제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 (친구들 집집마다 방문해 자기 말 탄 모습 보여주고 술 마시고 밤늦게 귀가함)...
제가 돌아와 선잠을 자려니 공께서 술에 취했나 살펴보러 오셔서 제 뺨을 어루만지고 이불을 덮어주시면서 눈치 채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2. 장인에게 노래를 불러드리다
... 난간에 기대 먼 풍경을 둘러보시다가 동으로 서울 쪽을 바라보며 서글피 언짢은 표정을 한참 지으시더니 이렇게 말을 꺼내셨습니다.
"벼슬살이에 분주하다보니 성묘를 못한 지도 4년째로구나!"
그 때 제가 비아냥거렸습니다.
"장인어른! 저를 보세요. 허리 아래에 인(관리용 도장)끈이 달려 있나요? 저 같으면 훌쩍 돌아갈 텐데요.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자 공은 이렇게 해명했습니다.
"이 인끈을 어찌 내가 차고 싶어 하랴! 이미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했으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서지."
... 밤 깊어 등잔불이 가물거릴 때면 저만 따로 불러 앉으라 하시곤 때때로 젊은 시절 전원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이 끝없이 치달려 자식들과 더불어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가르치고 ... 농어를 낚시질하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 늙어가는 몸을 가슴 아파하시고는, 하신 말씀을 다시는 실행에 옮기지 못할까 봐 염려하셨습니다.
저는 그러면 술병을 당겨 술을 조금 따라드리고 조금 있다가 구슬픈 소리로 <이소>의 노래를 암송하여 술맛을 돋우어드렸습니다. 그러면 또 낯빛을 바꾸시며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줄줄 흘리셨습니다.
이 일은 집안사람이나 측근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3. 태백산 구경
지난해 공께서 관서 영변에 머무실 때 저는 9월에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단풍과 수석을 보고 여러 절간 사이를 오가며 열흘이나 구경하고 돌아왔습니다. 공께서 산에 들어가 무얼 했느냐고 물으시길래 저는
"불경을 읽었습니다."
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랬더니 공께서는 웃으시며
"늘그막에 고생하며 키운 딸을 시집보냈더니 사위란 것이 부처를 배우다니!"
라고 하셨습니다.
(참고: 조선 시대 관료들에게 불교는 터부였습니다. 율곡 이이는 젊은 시절 불교 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관리로서 자질이 의심스럽다며 비판받을 정도)
이 때 저는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자주 졸랐으나 공께서는 완강히 저를 잡아두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를 배우는 사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으니 차라리 보내버리는 게 나을 겝니다."
라고 했습니다. 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조금 더 머물러 지금까지 있으면서 공의 임종을 함께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4. 장인을 광인(狂人; 미친 사람)으로 부르는 글을 쓰도록 부탁받다
이 무렵은 세상이 모두 안일에 젖어... 무인일지라도 기개와 절도의 행동을 과감히 하지 못해 마치 서생처럼 굴었습니다. 공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여기저기 눈치나 잔뜩 보면서 국사에는 힘쓰지 않는 자들이다. 나는 무인이다. 문(文)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조정에 서신 지 30년 동안 공을 알아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께서는 익살을 즐기고 방종하게 처신하면서 세상을 조롱하는 것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길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모두 공을 광인이라 지목했고, 공 또한 광인임을 자처하셨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공으로부터 당신의 사연을 글로 쓰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사양했습니다. 공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양하는 까닭은 사위가 광인이란 말을 장인에게 쓰기 거북해서 그런가? 글만 생각하고 사위임을 잊으면 될 걸세."
제 글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공께서는 세상을 뜨셨습니다.
...
사방에 있는 자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깨어 있는 자더러 취했다고 합니다. 취하지 않았음을 따지려 들면 들수록 한층 더 취했다고 합니다. 취한 이는 많고 깨어 있는 이는 적으니 무슨 수로 밝히겠습니까?
5. 지기(知己, 지기지우의 준말; 서로의 속마음을 참되게 알아주는 친구)로서 감회
... 아, 제가 곡하는 것은 사위로서 장인을 슬퍼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공에게 지기로서 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슬프도다! 흠향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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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은 장인과 막내 사위가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친부자처럼 농담도 하고, 아껴주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장인인 이관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 박제가가 결혼할 때는 경상좌병사로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준장 내지 2급 공무원, 직역으로 따지면 사단장-군단장 급 정도 됩니다. 조상을 어지간히 닮으셨는지 꼬장꼬장하고 청렴한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평화 시기에 무신들이 문신들 당파에 따라 이리저리 어울려 시 짓고 술 마시며 인맥관리하는 것을 굉장히 못마땅해 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저 노인 또 저러네.'하며 세인들이 광인이라 불렀던 것 같고, 본인은 되레 그 별명을 당연스레 여겼던 듯 합니다. 이러한 세간의 평가와 장인의 올곧음을 사위인 박제가는 깊이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훈훈한 에피소드 위주로 발췌하긴 했으나 - 첫 번째,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짐작하셨겠지만- 박제가도 어지간히 철 없는 사위이긴 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장인어른 중형차 빌려다가 친구들한테 자랑하러 다니고, 여행 잘 다녀왔냐는 말에 농담이랍시고 "불온서적 잔뜩 보고 왔습니다."하는 식이니... 장인 앞에서 낄낄거리며 웃거나, 쿨쿨 잠들어버린 적도 있다고 써 있는데 그 때마다 장인은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게지, 장난 치는 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해서 그런 게지, 게으른 게 아니라.' 하고 말해주었던 모양입니다.
위에는 안 적은 에피소드인데, 장인인 이관상이 "갓은 좋은 것 쓸 필요 없이 검고 둥글면 되고, 신도 비싼 거 신을 필요 없이 발에만 잘 맞으면 되지."하고 가난한 사위를 위로할 겸, 사치할 필요 없다는 자기 생각을 말한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거기에 박제가가 벌떡 일어나 대꾸한다는 것이, "그러시면 이 사위는 너무 불우한 겁니다. 제가 이런 비단옷도 입고 싶고, 이런 것도 하고 싶고, 저런 것도...(예시를 한참 듬) 그런데, 사치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저를 알아주지 않아서 못하는 겁니다." 이러기도 합니다.(철딱서니도 이런 철딱서니가;;;ㅋㅋㅋ)
나중에 고관대작이 교류하자는 말도 다 거절하고, 연암 박지원이 쌀이 다 떨어졌단 말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보냈던 모습이랑 비교하면 참 재미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장인어른이 했던 말을 나이가 들어서 꾸준히 실천한 격입니다.
어쨌든 요즘의 옹서관계는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형식적으로 예의범절 차린답시고 되레 세대 간 얘기도 안 하고 이해도 못하는 세태가 올바른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네요. 요즘도 장인이랑 사위가 서로를 '마음 통하는 벗'으로 여길 수 있을지, 이런 생각도 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