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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강가님에 대한 답글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5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6
조회수 : 43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1/13 09:57:27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2535&s_no=12535&page=1
 
이 글은 상기 링크 글의 붉은 강가님의 답글에 대한 반론입니다.
 
늘 그렇지만 고려에 대하여 싫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 불쾌하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일희일비 할 일은 아니지만 이른바 닥치고 반대, 닥반을 누르시는 분을 보면 저도 대답없는 메아리를 보는 기분이라 참 기분이 안좋고, 여러분도 그런 글을 보면 참 기분이 안좋으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닥반을 해봐야 그게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일단 저는 붉은 강가님의 의견에 이견이 있습니다, 그 아래의 다른 분들이 답글을 달아주셨지만 국제적인 정세를 놓고 볼때 몽골을 적대할 필요성은 전무하며, 수세기 전의 일은 그 것을 행할 어떠한 근거도 되지 못합니다, 이는 유럽에서 북유럽의 국가들을 배척하거나 터키를 배척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중동으로 보자면 이란을 왕따시키는 근거로 페르시아 제국 시절을 드는 것도 되겠지요.
 
자 그 문제는 이렇게 정리를 하고 넘어가고 역사적인 문제를 보자면 제가 거란의 전란이 가져온 후유증을 몽골의 전란의 그것과 같은 선상에 놓은 것은 비단 사회 인프라적 문제는 아닙니다, 여몽전쟁 이후 120여년 남짓 더없는 황금기를 누렸으니 그 만한 것은 어찌어찌 복구가 될수 있었겠지요,
 
문제는 그 외의 부분입니다, 사실 이 부분을 덧붙이지 않아 특히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만, 외교적인 정세, 국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고정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정학적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요나라와 송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상황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할지 모르나 여진이나 몽골등 당대의 유목민들이 거세게 일어나는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근 시안적 시각이 고착화 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통신 시설의 미비한 수준이나 무신 정권 등 사회상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필요성 등이 대두될수 있습니다만 국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고려에 있어 유일하다 싶은 전력인 외교력의 문제는 심각한 문제일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물론 If는 없습니다만 고려가 가진 지정학적 가치를 중요시 여겼던 몽골을 생각한다면 전란을 피하는등 얼마든지 상황을 더 개선시킬수 있었습니다만 전혀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두번째로 왜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 들을 해적이라 합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소규모로 비교적 경무장을 갖추고 약탈 사업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기 소말리아나 말라카 등지에서 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실상 따지고 본다면 정규군이 몰려온 경우가 사실상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국부만을 가리는 천떼기 하나만 입고 일본도를 높이 치켜든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게 남북조 시절에는 북조에 대한 공세가 뜸한 시기에 한반도의 왜구 출몰 횟수가 급증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미 그 성격을 짐작해볼수 있습니다.
 
다년간의 전쟁 경험을 갖춘 정예병들이 심지어는 기마병이 오는 경우까지 있을정도로 높은 수준의 무장을 하고 조직적으로 바다를 넘어 약탈을 행한 것이 대부분으로 그 목적은 상대적으로 무장이나 규모가 미흡한 사조직들의 경제적인 활동부터 남조의 난신들이나 영주간 전쟁에서 있어 규슈 지역의 영주들이 군수물자의 확보를 위해 오는 것까지 다양했는데, 상대적으로 왜구에 비하여 항해 능력이 미흡하였고 기동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연안 해군에 머무른 중국이나 한반도의 국가들로서는 바다 위에서 대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육지에서 상대한다가 해결책인데 문제는 이원화 체계에 따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분리된 이 들이 보는 즉시 상대하여 격퇴하기에는 여러모로 전력이 열세입니다, 왜구가 고려의 쇠락의 주요한 원인인게 과언이 아닌것이 이 들을 막고자 가장 빠르게 들고 일어설 병사들은 원 간섭기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그 복장 그대로 창하나 쥐고 달려 나오는 것입니다, 차이를 들자면야 무신 정권이 종결되고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을 보자면 가혹한 수탈에 따른 경제적 조건 악화와 여몽 연합군을 비릇한 종군의 의무 등의 문제는 둘째치고 급감한 병력의 문제로 지방군의 군제 자체가 붕괴하지 않은게 이상한 상황이라는게 차이라면 차이이겠지요.
 
고려의 지방군이 가장 많은 지방이래야 잘 나가던 시기를 놓고 볼때 도 단위로 고작 1만명 남짓입니다, 그 나마도 전투 병력 비 전투 병력 전부 합산한 결과로 그 1만명 마저도 각 고을 각 지역 등에 분포되어 사실상 숫자와 질적인 문제에서 총체적 난국에 봉착하는게 사실입니다.
 
이건 어떻게 막을래야 막을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왜 고려 후기에 이성계나 최영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왜구를 토벌할때 지방군의 전과가 딱히 없었겠습니까? 중앙군이 왜 내려왔을까요? 왜 고려말에 해안가의 요충지를 포기하고 강안에 병력을 집중시켰을까요?
 
간단합니다, 작금의 군사정책과 군사력만으로는 왜구를 상대하는 것이 고려의 모든 해안을 커버하는 것이 무리이기때문입니다, 이건 몽골의 수탈과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 비슷한 상황의 중국의 사례를 보면 해안 봉쇄 정책과 같은 것을 시행하였지요,즉 기동성과 국지전에서의 전력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왜구의 침탈은 훈련이 극히 저조하고 장비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방군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무신정권 직후 여진을 상대한다 하셨는데 여진 정벌이 왜 실패하였는가를 생각해보신다면 그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는 아실것 같습니다, 여진 정벌은 참 이게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된 미군의 상황과 흡사합니다, 투자금과 인력은 끊임없이 밀어넣어야 하는데 유지가 않됩니다, 아니 고려의 재정과 사회가 버텨낼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요.
 
중앙군의 1/3을 밀어넣었지만 도저히 감당할수가 없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무신 정권 이후라 해서 특별하게 호전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군대의 사병화, 사병의 육성 등으로 약화된 무신정권 시기 고려의 군사력으로 볼때 천리장성에 의지하여 적을 격퇴하는 상황 유지 이상은 무리입니다.
 
덧붙이자면 홍건적은 도적떼가 아닙니다, 농민들이 대다수 라고는 하나 원나라 정규군과 숱한 교전을 거친 나름 잘 훈련된 정예병들이고 그 숫자도 물경 1차때는 4만 2차때는 20만명에 달하는 대군이었습니다, 그런 그 들을 상대로 재활 치료를 하고 있던 상대적으로 미흡했던 고려군이 좋은 전과를 거둔것이 대단하지요.
 
그리고 고려왕의 정체성은 그 아래에서 다른 분들이 좋은 답글을 달아주셨기에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들의 정체성은 고려왕조입니다, 최소한 그 들이 속한 국가가 어디였고 나라가 어찌 돌아가는지 분명하게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동한것은 참 철없다..라고 감히 말할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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