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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일본을 바꿨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욕심때문에.
게시물ID : history_125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wHat
추천 : 11
조회수 : 2623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3/11/12 12:13:42
1. 공직추방령의 해제.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에서 밝히듯이 일본은 전후로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의 공직추방령으로 총 20만 8,778명에 대한 공직 추방령이 있었다. 그러나 레드 퍼지로 인하여 이런 공직추방조치는 1948년 5월에 종료가 되고 1만 900명이 공직에 들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공직자격기소심사위원회公職資格訴追審査委員会에서는 1950년 9월 상순경에 약 3만 2천 건에 달하는 소원을 전부 심사하는 일을 완료하고 이 중에서 약 1만명의 심사원의 심사에 패스하여 거의 전원이 GHQ의 요해를 얻어 추방이 해제되어 일본정부는 1950년 10월 13일에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정계 · 관계 · 재계에서는 平野力三、鶴見祐輔、山際正道、松前重義、古井義美、前田多門、藤山愛一郎와 같은 인물들이 언론계에서는 石井光次郎、美土路昌一、高田元三郎、松本重治 그외 安井郁、石橋湛山、河野一郎、河上丈太郎같은 이들이 공직 추방에서 해제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패전에 따라 일본을 새롭게 재견시키기 위해 옛 지도자들을 일단 각계에서 추방하여 새로운 지도자로 바꾸려는 취지였으나 한국전쟁 발발 이후 극동의 정세의 변화가 생기자 미국의 극동정책의 추진과 상응하여 이런 조치가 행하여졌던 것이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경찰 예비대의 편성 및 정비에 관하여 중견간부급이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던 것 또한 하나의 요소로 꼽힌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에 힘을 입어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는 1950년 10월 30일 태평양 전쟁 개시 후의 육군사관학교-해군병학교-해군경리학교에 입학한 직업군인 3250명의 추방을 해제하며 '태평양 전쟁 후에 입학한 그들은 전쟁유발의 직접적 책임이 없다'는 이유를 붙였다.  그 해 11월에는 태평양 전쟁 개시 전의 육해군 학교에 입학하였던 舊군인 3250명을 추가로 공직추방령에서 해제하였고 그 중 235명은 51년 경찰 예비대의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였고 11월 8일에는 A급 전범 전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를 가석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모든 분야를 망라한 대거의 추방해제는 동아시아에 몰아 닥쳤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이 기존에 구상하였던 계획을 일거에 바꿔버릴 수 있는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1번 요약:  한국전쟁으로 인해 돌아와서는 안 되는 2차 세계대전의 인물들이 공직에 오를 수 있는 숨구멍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2. 경찰 예비대 창설.

한국전쟁이 발발하게되자 맥아더는 일본에 진주해 있던 4개 사단의 대부분을 한반도에 투입시키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처하고 이에 따라 일본 내의 치안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재군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경찰예비대를 창설하게 된다.

1950년 7월 8일 맥아더는 요시다 시게루 앞으로 서한을 보내 7만 5천명의 병력을 갖추는 국가경찰예비대의 창설과 종래 1만명이었던 해상보안청 요원을 8천명 증원해야 할 것을 밝혔다. 한국전쟁으로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한국으로 이동하고 그 공백을 매꿀 일본인으로 되는 부대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에 요시다 시게루는 1950년 8월 10일 정령政令으로 경찰예비대령을 공포하여 増原惠吉을 예비대 본부장관으로 임명하여 군대가 해산된지 5년만에 한국전쟁을 통해 무장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요시다 시게루는 여기에서 舊 군인의 채용의 불가피성을 들었고 맥아더는 채용재량권을 일본정부에 맡겼고 그 이후의 모습은 앞서 말했던 공직추방해제가 실행되었다.

그리하여 경찰예비대의 설치예산으로 200억엔을 잡고 경찰예비대원을 모집하여 약 38만명의 응모자가 모였고 구 일본군의 장교 또한 중견간부로 800명 이상 모였으며, GHQ의 명으로 추방되었던 상급간부 6명이 추방에서 해제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한국전쟁 기간에 일본국토 침범을 막기 위한 대책이란 명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태평양 전쟁이 끝난지 불과 5년 만에 재무장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이들의 상당수가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2번 요약: 한국전쟁때문에 쫓겨났던 일본군 장교와 간부들이 돌아올 수 있었고, 한국전쟁은 일본이 무장해제된지 5년 만에 일본이 스스로다시 무장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3. 대일 배상 문제.

미국은 미국대표로 캘리포니아의 석유업자이자 정치가였던 E. W. 포레를 임명하여 포레는 대통령 특사 겸 대사의 자격으로 이후 대독 및 대일 배상문제를 담당하여 1945년 11월 13일 22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입국하여 '일본에서의 즉시 실시계획'(혹은 포레의 중간보고서)을 1945년 12월 7일에 발표하여 '일본경제의 비군사화를 철저히 하고 과잉의 중공업설비와 재외자산은 배상에 넘겨야만 하고 또한 그러한 것들은 일본에게 피해를 입은 아시아 제국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또한 일본국민에게 허용되는 생활수준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범위 정도로 정해져야 한다'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에 따라 패전 일본 정부는 예상보다 엄격하다고 하며 완화를 원했고 이에 따라 극동위원회는 '중간배상계획' 결정에 따라 어느 정도 완화를 하였다. 미국육군성은 배상계획전체의 재검토를 위해 뉴욕에서 해외조사 업무에 조사하고 있는 마그로의 사장 C. S. 스트라이크를 단장으로 하는 대일배상특별위원회'對日賠償特別委員會'를 조직하고 논쟁 끝에 1949년 5월 12일 극동위원회의 미국대표는 중간배상계획의 30% 선에서 대일배상문제를 끝내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나 중국, 필리핀은 항의하였지만, 미국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사실 대일 배상 문제는 대충 이런 식으로 서술한 것이지만, 매우 복잡한 면이 없잖아 있어 앞서 말했던 포레 보고서의 예시처럼 1946년 말까지 약 1년 4개월에 걸친 시기는 포츠담 선언이나 미국의 초기대일 방침에 따라 일본의 배상정책은 매우 가혹하게 처리되었다. 그리하여 군수산업의 완전한 파괴와 관련산업의 삭감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일본의 비군사화 정책에 비중이 두어졌으며 배상철거공장의 지정은 바로 그러한 비군사화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약 2년간에 걸친 시기는 우리나라나 다른 국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극동위원회의 '중간배상계획'에 따라 30% 선에서 그친 수준으로 일본의 자립경제 수립이 중시되었다. 하지만, 이로 끝난 것이 아니라 냉전의 격화와 더불어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미국의 주도로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평화협정이 치루게 되는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에서 미국의 입김을 통해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체결을 위한 복선을 그어 일본을 반공진영에 편입시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였으며 또한 동시에 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에 대응하기 위하여 강력한 반공의 동반자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미국의 의도가 그대로 일본의 부담경감의 정책으로 드러나 일본은 배상의 총액과 방법, 시기를 조절할 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현금이 아닌 생산물과 역무에 의한 배상방식공업화의 후진국들이었던 이들 국가를 다시 경제적으로 예속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인도네시아의 경우 1960년부터 매년 100명의 유학생이 5년간 대학에서, 또한 매년 250명의 연수생이 6개월부터 2년에 이르기까지 공장등에서 공부 도는 연수하였다. 유학생 500명과 연수생 1750명이 훈련을 마치기까지 약 10년동안에 배상의 방법으로 지출된 돈만해도 약 45억엔에 이르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이들의 기술연수로 배상도 이행하면서 일본기술종속의 산파를 양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흔히 말하는 가마우지 경제)이에 따라 배상의 제공이 수출의 증대와 맛물리고 있는 셈이어서 배상이 결코 통상수출의 위축을 가져오기는 커녕 오히려 일본경제의 활성화에 큰 공헌을 하게 되고 배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버마에서의 바르쟌 발전소건설, 베트남의 다님 수력발전건설, 필리핀의 마리키나 댐건설, 인도네시아의 프란다스 강 개발 등은 종래 해외에 진출하지 못하였던 일본의 많은 기업들이 처음으로 해외진출의 경험과 기술 축적을 하는 큰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한국전쟁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의 강화 속에서 소련과 중국등 공산권의 이 지역에서의 진출을 봉쇄할 거점으로 일본의 역할을 기대하면서 전면적인 정책의 전환을 가져와 다른 연합국과 피해국의 배상요구를 봉쇄하고 일본의 경제회복을 돕는 방향으로 급선회하였던 것이다.


3번 요약: 초기엔 미국의 의도는 일본을 강하게 압박하고 통제하는 체계였지만 일본의 요구에 따라 어느 정도 완화된 자립경제(비군사화는 유지)수준까지 일본을 조여왔던 목줄을 풀어줬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일본에게 날개를 달아주게 되어 일본이 손해를 보는 장사를 하지 않으면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배상+경제 구조를 만들어줘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의 비군사화에 초점을 맞췄던 미국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일본을 공산주의 진영에 대항할 극동아시아의 전략적 동반자로 보게되었고 이때문에 일본은 경제 성장을 할 토대를 얻게되었습니다.




제가 이 짧은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북한의 1대 지도자가 죽어가던 일본을 심폐소생술로 살린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구나 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갑과 을의 관계가 한국전쟁때문에 정반대로 뒤집힌 것 같은 상황을 보게되었으니 말이죠.

일본의 극우세력은 평양을 방문해서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해야할 정도가 아닐까요.



출처 - http://liel.egloos.com/3057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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