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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게생성기념] 모든 공모는 여기서 비롯됐나니
게시물ID : military2_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산트카치야
추천 : 12
조회수 : 153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6/08/31 23:31:37
0. 들어가기에 앞서

본 글은 세계 항공모함 개발사의 초창기를 개괄하고 일본 항공모함 개발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참조한 서적은 일본 코사이도 북스 <연합함대 공모>이며, 보다 구체적인 서술을 위해 영키피디아 및 일키피디아도 참조하였습니다. 따라서 본 글은 어디까지나 대강 이런 흐름으로 항모 개발이 진행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지 100% 사실에 의거하여 작성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참조한 서적의 특성상 일본측 용어가 사용될 수 있으며, 몇몇 용어 (대표적으로 제목에 쓰인 공모 같은) 는 일본측과 타국을 구분하기 위해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많은 양해 바랍니다.




1. 프롤로그 - Father of All CVs

항공모함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항공모함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워낙 뚜렷한 탓이다. 군청빛 바다를 위풍당당하게 항해하는, 위압적이며 거대한 잿빛 거성巨城. 초대형 갑판 위로 전투기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명령 한 번에 출격한 전투기들이 순식간에 목표를 타격하고 되돌아오는, 세계 해군사의 위대한 전환점이자 우주모함 요즘 모함 과거 전함이 차지한 왕좌를 찬탈한 해군력의 정점… 이렇듯 우리는 항공모함을 쉽게 떠올릴 수 있고, 그로 인해 "이것이 항공모함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과연 항공모함이란 무엇일까? 어떤 배를 항공모함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항공모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항공모함은, 아니, 정확히 말해 비행체를 배에 싣고 다닌다는 아이디어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었다. 육해군을 막론하고 먼저 적을 발견하는 세력이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였고, 레이더와 같은 전자장비가 개발되기 전까지 '더 멀리' 보려면 '더 높이' 올라가야 하는 점은 물리학이 보증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의 육해군은 앞다투어 당시 최첨단이자 거의 유일한 비행체인 기구를 정찰 및 관측용으로 채용했고, 기구를 군사용으로 이용하는 추세는 제 1차 세계대전 때까지 계속되었다.

Balloon_barge.jpg
남북전쟁 당시 사용된 북군의 바지선, USS George Washington Parke Curtis. 바지선 위에서 기구를 띄울 수 있었다.


'군사용 기구'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비행기는 등장하자마자 군사용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여겨졌고, 그중 미국 해군은 비행기의 발명 이후 군함에서 비행기를 운용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군사용 비행기'는 매우 엉뚱한 발상이었지만 시도할 가치가 있었다. 미국 해군은 군함에서 비상해 다시 군함으로 되돌아오는 비행기의 가능성을 시험하고자 했고, 이에 호응한 비행사 유진 엘리Eugene Ely가 등장하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이했다.



Eugeneely.jpg
미국의 비행사 유진 버튼 엘리. 항공모함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람.



1910년 11월 14일, 미국 동부의 체서피크 만에서 실험이 실시되었다. 해군의 경순양함 CL-2 USS 버밍엄Birmingham의 전부前部 갑판에 길이 25미터, 폭 17미터에 앞으로 경사진 목제 활주대가 가설되었다. 엘리는 활주대 위에서 복엽기인 커티스 모델 D에 올라 비행을 시도했고, 훌륭하게 성공했다. 2개월 뒤인 1911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실험이 개시되었다. 정박중인 장갑순양함 ACR-4 USS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의 후부 갑판에 설치된 활주대로 착함하는 것이 실험 목적이었다. 착함용 활주대에는 22개의 피아노선이 펼쳐져 있었다. 착함할 때 비행기에서 내려온 후크가 이 피아노선에 걸리면서 비행기가 정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피아노선 양쪽 끝에는 모래주머니를 달아서 만에 하나를 대비했다. 엘리는 이 착함실험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미국 해군은 플로트가 장착된 수상기를 USS 펜실베이니아 옆에 착수시키고, 크레인으로 끌어올린 뒤 다시 물에 내려 비행하는 실험도 진행했다. 역시 성공이었다.
이 일련의 실험이 각국에 알려지자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은 각기 함상에서 운용하는 비행기, 또는 수상기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중에서 가장 열정적이었던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912년 정박중인 전함 HMS 아프리카Africa에 활주대를 설치해 복엽기를 발진시켰다. 같은 해에는 15노트로 항해중인 전함 HMS 하이버니어Hibernia에서의 발진실험도 성공했다. 프랑스도 수상기 운반함 포드르Fourdre에 활주대를 설치해서 수상기를 발진시켰으며, 이후 포드르는 수상기모함으로 개조되었다.

자, 그럼 일본은 어떻게 이 '세계적 추세'를 따르고 있었을까?




2. 와카미야若宮

일본 역시 1912년 비행기를 공식적으로 군에 채용했고, 요코스카의 옷파마追浜에 수상기 기지를 설치하고 수상기 조종사의 훈련을 실시했다. 이 시기 일본 해군의 수상기 운반함으로 사용된 것은 와카미야마루若宮丸였는데, 이 배는 1907년 러일전쟁 때 일본의 전시 금지품목을 운송하던 영국의 화물선 레싱턴Lethington을 츠시마 해협 서쪽에서 포획한 것이었다. 이후 이 화물선은 이름을 와카미야마루로, 와카미야로 바꾸면서 수상기모함으로서 군함이 되었다.


Wakamiya.jpg
일본 최초의 수상기모함 와카미야. 일반적인 '항공모함'의 생김새와는 다르다. 아니, 일치하는 부분이 없었다. 이 시기 수상기모함은 다 그랬다.




수상기모함으로 개조된 와카미야는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퍼먼Farman MF.11 쇼트혼Shorthorn 수상기를 4기 탑재하고 당시 독일이 방어하는 칭따오 요새 공략전에 투입되었다. 이 전투에서 와카미야에 탑재된 수상기 2기가 정찰 및 폭격 임무를 받고 실전에 나섰는데, 전과는 미미했지만 해군기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첫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수상기모함으로서 와카미야는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로 와카미야에서 곧바로 수상기를 발진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바로 위에서 '함선에서의 발진실험이 성공' 운운했으면서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수상기를 배에서 발진시키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 시기의상기란 플로트가 장착된 것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물 위에서'만 발진하고 착수할 수 있었다. 수상기모함이란 결국 함선에 장착된 크레인으로 갑판에 놓인 수상기를 붙잡아 수면으로 내려주고, 다시 돌아온 수상기를 갑판으로 올려주는 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DeHavilland_Single_Otter_Harbour_Air.jpg
de Havilland Canada DHC-3 Otter 수상기. 모든 수상기에 이처럼 플로트가 달린 건 아니었지만, 수상기는 대체로 지상이나 함상에서 직접 운용하기 어려웠다.


물론 프랑스의 포드르처럼 수상기가 함상에서 직접 발진할 수 있도록 활주대를 설치해 운용하는 실험이 있었다. 와카미야 역시 총 18미터의 활주대를 설치해 비행기가 발진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때 사용된 비행기는 수상기가 아니라 지상에서 운용하는 전투기였다. 실험에 참가한 전투기는 영국의 솝위드Sopwith사에서 제작한 펍Pup 복엽전투기로, 익면하중이 매우 낮아서 풍속 10미터의 맞바람이 분다면 발진에 필요한 활주거리는 고작 6미터에 지나지 않는 기체였으므로 채택되었다.



Shuttleworth_Flying_Day_-_June_2013_(9124616838).jpg
솝위드 펍 전투기. 척 보기에도 가벼워 보이긴 한다.



이 발진실험은 와카미야에서 펍을 운용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여타 주력함, 즉 전함이나 순양함 등에서도 정찰기를 운용하기 위한 실험이라는 성격이 컸다. 또한 이때 이미 건조가 시작된 일본 해군의 첫 공모空母 호쇼鳳翔을 위한 데이터 수집을 겸하고 있었다. 실험은 성공으로 끝났고, 일본 해군은 여타 제반조건이 갖춰진다면 수상기만이 아니라 지상에서 운용하는 다른 비행기도 해상에서, 아니, 함상에서 직접 발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일본은 수상기모함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같은 시기 다른 국가는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었을까?



3. 개조 수상기모함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될 때, 이미 비행기는 군사용으로서 가치를 인증받고 있었다. 이미 비행기는 직접 전투를 펼치는 전투기로서, 또 어뢰를 투사하는 뇌격기雷擊機, 또는 폭탄을 떨어트리는 폭격기로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영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플로트를 장착한 실전적인 수상기가 발진할 수 있는 군함을 완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미 영국은 HMS 아프리카, 하이버니어의 실험을 통해 수상기를 군함에서 발진시켜 보였다. 이제 본격적인 '수상기모함'이 등장할 차례였다. 가장 먼저 수상기를 운용할 수 있도록 개조된 것은 경순양함 HMS 헤르메스Hermes였다. 헤르메스의 전부 갑판에 활주대가 설치되었고 이 위에 수륙양용기를 탑재해서 정찰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수상기를 정찰기로서 사용하게 되면 군함의 정찰범위가 획기적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군함에는 정찰기를 하나씩 탑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국에서도 본격적인 수상기모함, HMS 아크 로열Ark Royal이 등장했다. 기공起工은 와카미야보다 빨랐지만 어쩌다 보니 준공竣工 (=완공) 은 몇 개월 늦었던 아크 로열은 길이 40미터의 활주대를 장비하고 있었으므로 군함에 필요한 여러 구조물이 본래의 '적절한 위치'에서 함미로 밀려나게 되었다. 또한 갑판 바로 아래의 선창을 격납고로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수상기모함이 공모로 이어지는 원형을 보여준다.

Ark_Royal_(1914).jpg
HMS 아크 로열. 와카미야보다 훨씬 더 '공모스러움'이 증가한 모습이다. 이는 와카미야를 만든 후에야 항공기 발진실험을 한 일본과 아크 로열을 만들기 전에 발진실험을 한 영국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영국 해군은 수상기모함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아크 로열은 고작 10노트밖에 되지 않는 저속이었기 때문에 단독으로는 수상기를 발진시킬 수 없었다. 맞바람을 통해 충분한 양력을 얻어야 하는데  아크 로열의 10노트로는 도저히 발진에 필요한 양력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 해군은 아크 로열보다 더욱 크고, 더 빠른 수상기모함이 필요했다. 영국은 영불해협과 맨 섬을 왕래하던 고속 연락선을 수 척 징발해서 수상기모함으로 개조했다. 이들 연락선은 배수량이 1700톤에서 3000톤까지 다양했으나, 모두 아크 로열의 두 배에 이르는 20노트 이상을 낼 수 있었다. 개중에는 항해속력이 24.5노트에 이르는, 당대 최고속 선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연락선의 후부 갑판에는 격납고가 설치되었으며, 전부 갑판에는 활주대가 장착되었다. 간단한 개조 공사를 거쳐 투입된 이들 수상기모함은 총 4기의 수상기를 탑재하고 북해, 지중해, 에게해로 파견되어 정찰 및 폭격 임무에 종사했다. 이들이 최초로 거둔 전과는 1914년 크리스마스에 독일의 군항 쿡스하펜과 빌헬름스하펜을 폭격한 것이었다. 이후 지중해에서 터키의 수송선을 어뢰를 투사해 격침시키며 수상기, 나아가 항공기가 함선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비행기를 통한 함선 공격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속연락선을 개조한 수상기모함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본 영국은 이들보다 더욱 크고 수상기를 더 많이 탑재하는 수상기모함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대서양항로를 오가는 대형 여객선 캄파니아 (18000톤, 22노트) 가 징용되어 1916년 10기의 수상기를 탑재하는 수상기모함 HMS 캄파니아가 되었다.

HMS_Campania_1.jpg
HMS 캄파니아. 척 보기에도 아스트랄한, 용도가 불분명하고 기괴한 생김새가 특징적이다.



HMS 캄파니아는 대단히, 대단히대단히 특수한 모습을 했다. 먼저 군함 중앙부에 두 개의 연돌 (매연 배출용 굴뚝) 이 가로로 나란히 서 있었고, 이 뒤로 연돌 하나와 마스트 (돛대) 하나가 서 있었다. 왜 연돌이 가로로 나란히 있는 것이었냐면, 전부 갑판 위에 설치된 경사진 활주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활주대를 최대한 길게 늘리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캄파니아는 선진적인 요소가 많았다. 먼저 갑판 아래의 선창을 격납고로 사용했으며, 격납고와 비행갑판을 잇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최초의 군함이었다. 수상기를 발진시킬 때에는 운반용 차를 수상기에 달아서 발진시켰다.
물론 캄파니아도 이전의 수상기모함이 가진 결점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바로 발진은 할 수 있어도 군함으로 되돌아올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수상기는 한 번 발진하면 지상의 비행장으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수상기를 수용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수상기를 들어올릴 크레인이 있는 함선 근처에 가서 내려앉은 뒤 크레인으로 수거되는 수밖에 없었다.

수상기는, 당연하지만 지상에서 운용하는 다른 비행기와 비교했을 때 성능이 나쁜 편이었으며, 또한 "신발을 신고 있어서" 둔중했고, 그로 인해 상승고도에도 한계가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당시 제 2제국) 해군은 체펠린 비행선을 다수 운용했는데, 고고도를 유유히 비행하는 체펠린 비행선을 격추하기 위해서는 경쾌하고 빠르며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전투기가 필수적이었다. 영국 해군은 수상기와 마찬가지로 전투기를 운용하기 위해 시험적으로 경순양함 HMS 야머스Yamouth에 전투기를 탑재해 보았다. 탑재된 전투기는 와카미야의 발진실험에 참가했던 것과 같은 솝위드 펍 전투기였다. 서술했듯 펍 전투기는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고작 6미터의 활주로도 충분히 발진할 수 있었기에 함선에서 운용할 전투기로는 최적이었다. 그리고 펍 전투기는 의외로 금방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HMS 야머스가 북해의 독일령 헬고란트 섬 인근에서 기뢰를 부설하는 부대를 호위할 때 체펠린 비행선이 나타난 것이었다. 긴급히 발진한 펍 전투기는 체펠린 비행선의 후방 2000미터 지점까지 우회하여 접근했고, 거기서부터 체펠린 비행선을 소이탄으로 쏘아대며 공격했다. 체펠린 비행선은 금세 폭발했고, 화염으로 뒤덮인 채 바다로 추락했다. 펍 전투기는 느긋하게 아군 함대 인근에 불시착했고 금방 구조되었다. 이로써 함선에 전투기를 탑재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영국 해군은 이 전과를 통해 군함에 비행기를 탑재하는 것이 매우 이득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체펠린 비행선을 격추함으로써 군함과 비행기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영국 해군은 비행기를, 다시 말해 함에서 운용하는 함재기를 더욱 확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수상기모함이나 각 순양함에서 발진하는 소수의 함재기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특히 함재기를 수용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악천후 속에서 함재기가 파괴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재기를 확대한다는 계획은 더욱 많은 함재기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발진시킬 수 있는 함선의 필요성으로 연결되었다. 때마침 영국 해군은 적절한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발트해 작전용으로 건조된, 빠른 속도와 46센티미터 주포를 자랑하는 순양전함 HMS 퓨리어스Furious였다.

FuriousSP_89.jpg
그렇게 완성된 HMS 퓨리어스. 이 독특한 생김새는 다 이유가 있었다.


퓨리어스는 건조 도중 전황이 바뀌면서 공정이 지지부진해져 있었다. 영국 해군은 이 전함을 개조하여 항공병기에 전문화된 함선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마침 퓨리어스에는 군함에서 가장 무거운 장비인 포탑이 아직 장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손쉽게 개조할 수 있었다. 일단 전부 갑판은 비행갑판으로서 길이 70미터, 폭 15미터의 발진용 갑판이 되었다. 갑판 아래의 격납고에는 3기의 수상기와 5기의 펍 전투기가 수용되었으며 비행갑판과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이 부분까지는 마치 공모로서 첫 선을 보인 것 같아 보이지만, 문제는 함선 후부에 있었다. 함선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함교를 기준으로 후부에는 14센티미터 부포가 10문, 7.6센티미터 고각포가 5문 장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함교를 기준으로 앞부분은 공모, 뒷부분은 전함인 기이한 형태를 갖게 된 것이었다.
어쨌든 1917년 완공된 퓨리어스는 곧바로 함재기의 훈련을 실시했는데, 정작 퓨리어스 역시 수상기 발진은 가능해도 착함은 불가능하다는 결점을 그대로 계승했다. 퓨리어스의 함재기 파일럿들은 어떻게든 배로 돌아오기 위한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비행하던 함재기가, 함과 같은 방향으로 최대한 속력을 낮추다가 함교를 지날 즈음 비행갑판으로 기수를 틀어서 어떻게든 멈춰선다는, 말만 들어도 위험할 것 같은 방법이 고안되었다. 미친 짓 같지만 의외로 가능한 일이었다. 맞바람이 충분하면 함재기는 착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높은 난이도 탓에 극도로 숙달된 파일럿이 아니면 감히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다. 당연히 착함 훈련을 하던 도중 희생자가 발생했다. 착함하던 도중 함수가 선회하면서 아주 잠깐 사이에 함재기가 바다에 처박혔다. 파일럿은 사망했다. 이후 영국 해군은 착함 훈련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착함이 불가능한 퓨리어스는 캄파니아 같은 수상기모함과 큰 차이가 없었다. (좀 더 빠르다는 장점은 있었다.) 다른 해결책이 없나 궁리하던 차에, 연돌 뒤로 갑판을 하나 더 만들어 착함 전용으로 사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연돌에서 나오는 고온의 연기가 함미의 기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위험하지 않겠냐는 반론이 있었으나 착함이 가능한 함선을 원했던 영국 해군은 잠정적인 해결책으로 퓨리어스의 후부 갑판에 착함 전용 비행갑판을 하나 더 설치했다. 1918년, 후방에 갑판 하나가 더 설치된 퓨리어스는 보다 더 '공모'다운 배가 되어 있었다. 또한 후부 갑판 아래에도 격납고가 설치되어 탑재할 수 있는 함재기의 수도 늘어났다. 남은 문제는 후부 갑판에 착함한 함재기가 전부 갑판으로 이동해 다시 발진하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여전히 함선 한가운데에는 함교 및 연돌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은 여기에 다시 이동용 갑판을 설치해서 해결책을 만들어냈지만, 그럼에도 갑판은 좁아터져서(…) 함재기를 뒤에서 앞으로 옮기는 건 곤란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퓨리어스는 최종적으로 어디에도 써먹을 데가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기껏 착함용 갑판을 만들었더니 정작 그 갑판으로 착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렵게 착함한 함재기는 제동이 되질 않아서 함선 가운데의 마스트나 연돌, 함교를 향해 돌진하곤 했다. 유진 엘리의 착함실험 때와 비슷한 제동장치 및 튼튼한 로프로 만든 그물이 설치되었으나 때때로 착함은 실패했고, 우여곡절 끝에 착함한 함재기는 어디 한 군데는 고장이 나기 마련이었다. 퓨리어스의 경험은 영국 해군으로 하여금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했다. 함재기의 발진과 착함, 그 두 가지를 모두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갑판 위에 어떤 장애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 교훈은 이후 영국이 건조한 다른 함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비로소 공모다운 외형을 갖춘 함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Aircraft_carrier_HMS_Argus_in_the_later_1920s.jpg

HMS 아르거스Argus.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등장한, 공모답게 생긴 공모의 첫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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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글을 올린 뒤로 일주일 좀 넘게 지났네요. 늦은 만큼 충실한 내용과 충실한 분량으로 꽉꽉 채워봤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어디까지나 일본 해군 항공모함(=공모)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미국, 영국 얘기를 해놓고 이제 와서 뭔 소릴 하나 싶으시겠지만, 얼마 안 있어 영국의 등장은 끝납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각 함선 항목(사진 출처)
코사이도 북스 <연합함대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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