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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원문:
영조실록 110권, 영조 44년 6월 11일 정묘 1번째기사 (1768년 청 건륭(乾隆) 33년)
승정원에서 24자 휘호에 관한 일로 계사를 올리다
승정원에서 계사(啓辭)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24자의 휘호의 선양은 만백성들의 똑같은 심정일 뿐만이 아니라, 사실 주위에 오르내리는 영령(英靈)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 위에 고하고 아래에 반포한 뒤인데, 어떻게 이것을 논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윤허를 내리시어 사람들의 심정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재계(再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교리 서호수(徐浩修)가 소를 올리고, 교리 신광집(申光緝)·수찬 조재준(趙載俊)도 차자를 올렸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김약행(金若行)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숭정 갑신년의 뒤로는 천하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었고,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모두 우리 동방에 있으니, 청컨대 교체(郊禘)의 예를 행하고 태묘에는 구헌(九獻)과 팔일(八佾)의 의절을 행하소서. 그리고 인조(仁祖) 이하 오묘(五廟)에 휘호(徽號)를 소급해 올리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크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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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조선시대의 '사대'와 '소중화주의'라는 개념은 단순하게 단정내릴 수 있는 개념이 절대 아닙니다. 여기에 어설프게 근대의 내셔널리즘과 종주국-식민지 개념 등을 대입하면 이상한 괴물이 나와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