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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19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게시물ID : history_124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9
조회수 : 116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1/08 23:49:54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이제 학자의 이야기는 더는 안나온다.
이토록 다행스러울수가 없다.
노자.한비자의 도가를 이야기했고 중니제자를 다루었으며 아울러 공자의 이야기까지 했었다.
이제 도가와 유가의 사상과 함께 당시를 풍미했던 제자백가의 마지막 편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맹자는 공자에 버금간다는 아성(亞聖)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정도까지는 아니었던듯 하다.
그저 제자백가의 하나요 유가의 적통 정도로 여겨졌던사람인데 그가 지금에 아성 이라 불릴정도로
그 지위가 높아진것은 주자(주희)의 덕분이었다.
주자는 중국남송의 유학자로서 학문과 사상으로서 빈약했던 유학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만든 사람으로
그 사상의 대부분을 맹자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맹자를 논어.대학.중용 등과 함께 사서(四書)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 후에 과거제도에서의 시험과목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맹자는 입시제도에 편승하여 부각된 학자라 할수도 있을것이다.
 
맹자는 유가.묵가가 남긴 문헌을 두루 읽고 도덕의 대강을 분명히 했으며
양혜왕의 이익본위의 마음을 꺾어 놓고 지난날의 흥망성쇠를 개진하였으니
이에 맹자.순경열전을 이야기하여 보기로 하겠다.
 
ㅡㅡㅡㅡㅡ여민동락(與民同樂)ㅡㅡㅡㅡㅡ
 
사기열전에는 이야기가 끝날때 맨 후반부에 사마천이 열전에 쓴 인물을 평하는 태사공자서'라는것이 나온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 맹자.순경열전에는 시작부분에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는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때 양혜왕이 이익만을 이야기하는것을 보고 탄식하며 마음아파하는것이
매우 컸기 때문인듯 하다.
우선 태사공의 서평을 먼저 들어보도록 하겠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맹자의 저서를 읽다가 양혜왕이 "무엇으로 이나라를 이롭게 하시렵니까?" 라고 묻는대목에 이르러서는 책읽기를 그치고 탄식하지 않은적이 없다.
'아아,이익이란 진실로 난을 일으키는 근본이로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공자는 이익에 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은 항상 그 근본원인을 막기 위해서였다.
천자로부터 서민까지 이익을 좋아하는데서 오는 폐해란 조금도 다를바가 없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맹가(盟軻)는 추나라 사람이다.
그는 자사(공자의 손자)의 제자에게 학문을 배우고 그 도를 통달한후에 제나라 선왕을 섬겼다.
그러나 제선왕은 맹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기때문에 맹자는 양나라로 갔다.
양혜왕 역시 맹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무렵은 진나라에서는 상앙을 등용해서 부국강병책을 썼고,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를 등용해서 무력으로 승리를 거두어 적국을 약화 시켰으며,
제나라는 위왕.선왕 이 손빈.전기 같은 인물들을 등용해서 세력을 확장했으므로 제후들은 동쪽을 향해 제 를 종주국으로 받들고 있었다.
천하는 합종과 연횡으로 외교에 힘쓰고 침략과 정벌을 능사로 하던 때였다.
그러한때에 맹가는 이와는 반대로 요순시대나 하.은.주 의 성왕의 덕만을 이야기 했으니 어딜가나 용납될리가 없었다.
맹자는 별수없이 정계은퇴를 하고 제자인 만장등과함께 시경.서경 등을 정리하고 공자의 사상에 몰두해서 7편으로 구성된 <맹자>를 썼다.
 
그뒤에 추자 일파가 대두됐다.
제나라엔 추씨성을 가진 세명의 학자가 있었다.
추기 는 거문고를 잘타서 위왕에게 등용됐는데 그 인연으로 성후에 봉해졌고 재상이 되었다.
맹자보다 앞선 사람이다.
 
추연은 음양이 소장변화 하는 이치를 깊이 살펴<괴우의변><종시.대성>등 10만자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학설은 광대하여 상식을 초월했다.
작은것을 고찰하여 무한까지 도달하고, 현대로부터 태고까지 논급하며 세상의 흥망성쇠를 덧붙여 논하였다.
그리하여 천지가 아직 생기기 전의 시대까지 논급하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관찰하여 보이지 않는것을 유추해서 시간과 공간을 설명하였다.
그는 또 중국땅이 세상의 전체가 아니고 세계의 81분의 1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중국을 적현신주라 명했는데 적현신주 안에는 스스로 9주가 있어 그것이 우왕이 정리한 9주 이고
그러한,적현신주와 같은것이 9개나 있어 사람이나 새나 짐승도 서로 왕래할수 없는 독립구역을 이루고 있고, 그것이 천지의 한계다" 라고 설명했다.
그 말이 너무 크고 황당해서 허망한 느낌이 없지 않다.
추연은 특히 제나라에서 존중되었다.
그가 양나라로 가자 양혜왕은 직접 교외까지 나와서 그를 맞이 하였다.
그가 조나라로 갔을땐 평원군이 조용히 그의 곁에서서 그를 보좌했고 옷자락으로 그의 좌석을 청소해줄 정도였다.
연나라로 갔을땐 연소왕이 직접 빗자루로 길을 쓸어 그의 길잡이가 되었다.
공자가 진.채에서 배를 곯아 얼굴이 창백했던것과 맹가가 제.양에서 곤경을 겪은것과는 판이한 대접이다.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박문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안영의 사람됨을 사모하고 본받았으면서도 그 군주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얼굴빛을 살피기에 힘썼다.
양혜왕이 순우곤에게 재상의 벼슬을 주고자 했으나 순우곤은 한사코 사양하고 물러났다.
순우곤은 생애가 다하도록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순경(荀卿)은 조나라 사람이다.
나이 50이 넘어 처음으로 제나라에 유학했다.
초나라 춘신군의 도움으로 난릉의 현령이되었지만 춘신군이 죽자 그도 면직되었다.
훗날 진나라 재상이된 이사와 한비자도 그의 제자였다.
순경은 유가.묵가.도가 의 실정과 흥괴를 정리하는등 수만자의 저서를 남기고 죽어서 난릉에 매장됐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마천은 이 맹자.순경열전에 이 외에도 많은 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그러나 그저 이름만 나온 사람도 있고 필자가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많아서 그저 이렇게 줄이기로 하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위에서도 말했지만 공자의 이후에 맹자가 없었던들 공자가 지금처럼 유명해졌을리 없다.
또한 맹자도 주희가 없었다면 후세에 그를 아성이라 부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와 학문적 성과는 분명 대단한 면이 있으니 큰 학자들의 자취가
뒷날의 후학들 때문에 빛이나는것만은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마천의 열전에서 맹가는 별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저 200자 정도 소개된것이 다 인걸 보면 그때만해도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증거일것 같다.
그러나 요즘 많이 쓰고 있는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들이 많은부분 맹자의 저서에서 나온것은 물론
유교의 개념 대부분을 맹자가 만든것이니
만약 맹자가 없었다면 지금의 유교.유학이 있을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의심이 없다.
공자는 인간적이고 어눌하면서도 화도 잘내고 실수도 많이 하는,말하자면 사람냄새가 가득한 사람이었는데 반해
맹자는 말잘하고 논리정연하며 똑똑하고 완벽한 스타일이었던것 같다.
공자는 평생 돈이 없어 고생하고 다녔는데 비해 맹자는 여러 왕을 찾아다니며 정세를 분석해주고 상담을 하며 후한 상담료를 받아 챙기는,말하자면 정치컨설턴트였다고 할수 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어느나라의 높은 지위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부유하게 살았던것 같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는데 힘써 <공자대학> 을 운영했다면 맹자는 <맹자정치컨설팅주식회사>를 운영했다고도 말할수 있다.
맹자는 각나라의 군주들에게는 매우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위정자들 앞에서 아첨하거나 듣기좋은 말을 하기보다는 냉철하고 명확한 판단을 말해주는 스타일이었다.
일례로 제선왕을 만난 일화를 서술해보겠다.
제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은 걸을 추방하고 무왕은 주 를 쳤는데 그런사실이 있습니까?"
"경전에 기록이 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것이 옳습니까?"
"인을 해친자를 적 이라하고 의를 해친자를 잔 이라 합니다. 잔적을 일삼는자를 일부(一夫)라고 합니다.
일부인 주 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맹자.양혜왕장구하편)
 
제선왕은 성군으로 추앙받는 탕왕이나 무왕이 어째서 신하의 몸으로 당시의 임금을 죽였냐고 묻는데
맹자는 인의를 해친자는 임금이 아니고 일부.즉 일개잡놈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즉 왕이라 해도 잘못된 일을 하면 죽일수 있다는,곧 역성혁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말하는것이다.
이말을 들은 위정자인 제선왕의 마음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맹자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사직이 그 다음이며,임금은 가장 가볍다.(맹자.진심장구하편)
이것이 바로 맹자의 민본주의 사상이라고 하겠다.
 
이 맹자의 저서가 나중에 송나라시절에 주희에 의해 유교사상의 정수가 되었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조선건국(역성혁명)의 기반인 정도전에게 이어졌으며
사림파들이 왕의 무한권력보다는 백성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갖게 했고
또한 두차례의 반정(인조.중종)이 가능케 한것도 이 민본주의적 사상이 바탕일것 같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당시의 학자들은 대부분 학문을 이루어 유세의 길에 나서는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정치가라고 할수 있다.
이 유세가들은 자기가 닦은 학문을 바탕으로 하고 또 여러나라의 정보를 알아내어
각 군주를 찾아다니며 열국의 정세를 분석해주고
이에따라 한 나라가 취해야할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정치 상담가 라고 부를수 있을것이요 지금으로 친다면 정치평론가 라 할수 있을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컨설턴트나 평론가들은 분석과 해석을 위주로 하여 새정보를 생산해내고 미래를 예측하여 정치가들에게 그 예측과 분석을 팔아 돈을 받는다.
그런데 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옛 유세가들이나 지금의 정치평론가들이나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일정댓가를 받기보다는 특정군주의 맘에 들어서 그 밑에서 벼슬하기를
원하는것 같다.
옛시대에도 그러하였고 현세에도 그러하니 이것은 그러한 사람들의 특성인가?
요즈음 종편과 언론에 종종 출몰하는 평론가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해주는
편파적 평론을 일삼고 있다.
한쪽의 이익을 대변해주는데 머물지 않고 그 한쪽이 유리해질수 있는 프레임을 생산해서 제시해주는일도
허다하다.
이렇게 해서 결국 출세하게 된 사람중의 하나가 윤그랩 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필자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만다.
그러나 필자는 소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공부를 했다는 평론가라면 그 평론이 국민대중을 위한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도를 말하고 세상의 바른 이치를 알려줘야하는것이 평론가의 본분이 아닐지?
그저 자기를 등용해줄 사람을 찾아, 위정자가 좋아할 발언만을 하고 또 그들에게 도움이 될 프레임을 짜내는것이 평론가라면 그것은 평론이 아니고 권모술수일 뿐이라고 볼수밖에 없다.
 
저 맹자는 열국의 위정자,권력의 중심인 왕들 앞에가서도 그들에게 아부하거나
듣기좋은 말을 하는법이 없었고
오히려 왕들의 가슴이 섬찟할정도로 냉혹한 비판과 언설을 펼쳤으니
왕 의 면전에서 역성혁명을 얘기할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있는
진정한 평론가요 유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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