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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스케치 -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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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지옥의우유
추천 : 0
조회수 : 38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8/20 23: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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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정확히는 책은 아니지만 영화를 '읽어'봤다고 우겨봅니다.

딴지 정체불명 투고에 연재아닌 연재하고 있는데 좋은영화를 보게되서 얼른 스케치 해봤습니다

 
 
 
 영화의 명성은 익히들어 잘알고있었다. 유수의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언급했고, 영화 소개하는 프로그램등지에서도 회자되었다. 사실 흥행에는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잘 모른다. 감독은 영화를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 조금은 달라진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참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작고 소박하지만 각 분야에서 수만번 수십만번 단련되어 빠르고 정확해진 그들의 솜씨가 경이로웠다. 우리 사회에서 인정투쟁으로 일반이 쉽게 얻어낼 수 없는 유의미한 격려를 해주는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감독은 그들의 공통적인 꿈이 그 모래알 처럼 작은 일들과 소득을 쌓아서 집으로 대표되는 삶의 안정을 얻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배반적인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어느 영화나 마찬가지겠지만 아이러니는 흥미로운 이야기의 출발이다. 
 어쩐지 내가 시청한 dvd에선 몇몇 비평가 사이에서 아쉬운점으로 꼽힌 고문장면이 스킵되어 나왔다. 의도적인 편집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장면선택으로만 감상 할 수 있었다. 사실 비평가들이 꽤 적절한 지적을 했듯 개연성에 조금 튀는 경향이 있고, 의도적으로 자극적인 연출이 있긴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사족을 빼고 담백해진 느낌이긴 하나, 카타르시스의 총량과 전후 지엽적 장면간 개연성이 줄어드는 부분이 보인다. 
 
 영화내용은 간단하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로맨티스트 수남이 인생에서 한 몇가지 개인적 선택때문에 점차 비관적인 상황에 몰린다. 특히 경제적인 악상황에서 수남은 우리 사회 노동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일자리를 전전한다. 행복해지는 길은 집을 사는 일 뿐이라고 생각한 수남은 9년동안 세네가지 일을 하루에 해가며 성실히 일하지만 마치 신기루 처럼 9년동안 집값도 멀어져있다. 대출을 끼고 집을 사게되는데 모든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재개발이 마법처럼 온다. 그러나 이도 순조롭지 않고 재개발을 수호해보려는 노력을 하면 할 수록 수남은 더 떨어질 데도 없는 절망적 상황으로 나아간다. 
 
 왜 수남은 세상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는데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왜 아무 행복도 누릴 수 없는 것일까. 영화는 수남의 선택들을 보여준다. 상고에 가느냐 공장에 가느냐, 집을 먼저사느냐 아이를 먼저 낳느냐, 남편을 존엄사 시키느냐 마느냐. 문제는 영화를 보고있는 모두가 알 수 있다시피 어떠한 선택을 해도 수남이 행복해지는 길이 열리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로를 포기하든 말든 산업노동자 혹은 그 이하의 질나쁜 일자리를 전전할 것이고, 집은 개인의 삶과 행복을 완전히 포기하고 초인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허름한 한채를 얻는다. 돈때문에 남편과의 행복을 여러번 좌절당해야 했던 수남은 이제 돈때문에 남편의 생명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지만 무엇을 선택해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요컨대,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노력을 죽어라 하든 행복해질 권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산업노동자로서 지위를 시작한 주인공은 이 이상을 성취할 수 없다. 수남의 삶이 특별히 극적 각색으로 불운한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개연성이 없을 만큼 뜬금없는 삶의 모습도 아니다. 인간극장이나 휴먼다큐등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든 건강상으로든 어려움에 처해있고 긍정적으로 헤쳐나가는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헤치고 성취하는데는 보이지 않는 천장이 존재하는듯 하다. 학자들은 그것을 '계급'이라고 부른다. 
 
 봉건사회를 벗어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싸웠고 쟁취했다. 이제 계급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린 누구나 계급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것을 안다. 교육부 고위 공무원이 알고, 야구 배트로 폭행을 휘두르는  대기업 오너가 알고, 심지어 경비원을 폭행해 숨지게 한 아파트 주민이 안다. 물론 우리도 그것이 매우 잘못되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누구도 계급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혁파하거나 개선하기 보다는, 순응하고 그 천장 아래서 이권을 다툰다는 것이다. 같은 계급들끼리 말이다. 영화에서는 이를 집중적으로 비춘다. 권력이 직접 행하는 폭력이 아닌, 특별할것 없는 서민들 끼리 이권을 향한 극한 경쟁을 하다가 점철되는 폭력을 조명한다. 영화의 계급의식은 프레임안에서 다채롭게 등장한다. 영화에서 공무원이 등장할 땐 어김없이 아래에서 위를 보는 카메라 워크로 풍채좋고 위력있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외 서민들씬은 볼품없는 그들의 집에 빼곡하고 무의미한 잡동사니들로 채워진다. 
 
 후반으로 갈수록 서민들끼리 서로 행하는 폭력은 점점 심화되고 수남은 맞고, 고문당하고, 모욕당한다. 카타르시스를 위해 이는 수남의 복수, 즉 살인으로 점점 격화되는데 이와중에도 수남의 심리는 가슴한편이 통쾌하다거나 확신에 차보이지 않는다. 억울하고 불편하고 슬프다. 그것이 이 영화가 그 홍보 문구와 달리 세상에 대한 통쾌한 복수극으로 전혀 보여지지 않는 이유다. 물론 의도적인 문구라고 본다. 고문장면에서 수남은 살인여부를 묻는 말에 '저 일부러 그런거 아니에요' 라고 울먹이며 답한다. 그리고 듣는 대답은 '그게 중요한가' 이다. 이 사회는 개인의 노력 뿐만 아니라 의사와 의도도 반영되지 않음을 암시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는 실패한 개인에게 어쩌다 그랬는지, 막을 방법은 없는지 묻지 않는다. 메리토크라시는 '그게 중요한가' 라고 묻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네가 실패한것이 다 증명하는데' 
 
 왜 노동자를 포함한 서민은 노력과 의도에 관계없이 몇번의 선택과 실수로 안전망 없는 사회의 낮은 계급을 전전해야 하는가. 과연 일초에 종이컵이나 수건을 몇십장 생산하는 아주머니는 그 일에서 해방되거나 더 나은 대우와 지위를 누리는 계급으로 갈 수 있을까. 그 능력을 권위있는 방송에서 멋진 일이라고 격려해주고 유의미한 삶이었다고 해주면 더나은 사회가 만들어 지는가. 영화는 특히 산업노동자로서 수남의 남편이 어떻게 자신의 생산물과 생산수단에서 소외되는지 보여준다. 장애를 갖고싶어서 갖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출발해 상태악화와 몇몇 실수들은 그를 생산수단에서 소외를 넘어 배제되게 하고 자살시도까지 완벽한 인간성의 종말에 이르게 한다. 이런 일들이 개연성 없게 느껴지지 않는 계급사회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더 나은 사회가 만들어 질 기반이 점점 척박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불편한 영화는 오랜만이다.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문구에 완벽히 속아넘어갔다. 영화 주인공인 수남이 혹은 이정현이 불쌍해서 눈물이 나는게 아니라, 저곳이 내가 사는 사회고 내 이웃이 사는 곳이라는 것에 눈물이 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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