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참사의 원인은, 그리고 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할 책임은 맥베이 함장이 아니라 미해군에게 있다고 확신한다."
-라일 패스켓, 인디애나폴리스의 생존자-
인디애나폴리스 폭침사건. 미 해군 최악의 흑역사중 하나. 승리에 도취해, 기본적인 사항을 무시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리고 무책임한 군인들이 어떠한 사건을 유발할수 있는지, 힘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죄를 뒤집어 씌울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
1945년 7월 16일, 일본이 항복하기 한달전, 미국의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함은, 맥베이 대령의 지위하에 우라늄을 싣고
극비리에 단독으로 티니안 섬으로 향했다. 맥베이 대령은 군상층부에 줄기차게 호위함을 요청했으나, 보안상의 이유라는 납득할수 없는 답변으로
거절당했다. (사실, 고작 수송임무에 호위함 붙이기가 귀찮았겠지. 까놓고 당시 일본해군이 이거 안다고해도 얼마 안되는 잠수함으로 뭘 어찌한다고.)
물론 수송임무가 끝나고, 보안이 필요없었던 귀환중에도 호위함 한대 붙이질 않았다. 이는 곧바로 엄청난 대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7월 30일 새벽, 일본군 잠수함 I-58함은 인디애나폴리스함을 발견하고 어뢰 6발을 발사, 2발을 명중시켜 격침시켰다.
침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2분이었다. 어뢰 명중, 그리고 12분만에 침몰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평소 침착한 성격이었던 맥베이 대령의 신속한 조난신호 보고명령 및 퇴함명령으로 1,199명의 승조원 중
즉사한 300여명의 승조원을 제외한 9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사고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위 사진은, 인디애나폴리스 격침된 뒤 상황을 재현한 것이다. 시체의 피로 인해 많은 수의 상어가 몰려왔다고 한다.
살아남은 선원들은 안도하며, 구조대를 기다렸지만..... 현실은 시궁창. 5일동안 단 한척의 배도 구조하러 오질 않았다.
당연히 식수나 의약품은 부족했고, 거기다 더해 그곳은 상어가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시체들의 피냄새에 이끌린 상어들은 처음엔 시체를,
급기야 생존자들을 공격했고 생존자들은 상어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생존자들은 상어가 피냄새에 덤벼든다는 사실을 알기에
부상당해 피 흘리는 동료들을 멀리 떼어 놓았고, 부상자들이 상어의 공격을 받는것을 방치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부상당한 동료가
구명보트(당시의 구명보트는 나무 밑창이 거의 뚫려있는 엉성한 제품이었다)에 오르려는 것을 거부했고, 저항하면 마구 두들겨 팼다.
이러던 와중에도 함장 맥베이 대령은 구조신호를 계속 보냈고, 조명탄, 거울까지 동원해 구조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결국 4일이나 지난 8월 2일, 미해군의 정찰기가 이들을 발견하고 구조를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구조된 인원은 316명.
무려 600명에 달하는 목숨이 헛되이 죽어간 샘이었다.
맥베이 대령은, 구조되자마자 왜 해군본부는 5일동안 구조를 하지 않았는지 물었지만 대답은 구조신호 자체가 없었는데 뭔 개소리야?
이 사건은 미국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미해군은 책임 떠넘기기 식으로 맥베이 대령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미 해군은 태평양전쟁 기간동안
무려 700척에 달하는 군함을 잃었지만, 자신의 함에 대한 관리를 못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이는 맥베이 대령이 유일.
책임 떠넘기기에 걸맞게 죄목도 적의 공격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함을 침몰시킨 것이었다.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중순양함이 어뢰 회피를 위한 지그재그 기동을 하지 않았다는게 이유였다. 원칙상으로는 맞는 말 같지만,
지그재그 기동을 하게 되면 항속거리가 크게 줄어드는데다가 속도도 줄어들고, 항해시간도 크게 길어지기 때문에 적 잠수함이 매복한 확률이
높은 수역에서나 지그재그 기동을 하게 되며, 갑자기 적 잠수함이 쏜 어뢰를 발견했을 경우같은 긴급 사태시 배수량만 1만톤이 넘는 중순양함은
구축함같은 작고 잽싼 함선과는 달리 당장 지그재그 기동을 하기 어렵다.... 다른 하나의 죄목은, 격침당했는데도 구조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것.
맥베이 대령은 열심히 자신을 변호했으나.... 그의 말을 뒷받침해줘야 할 미해군 사람들이 이미 입을 맞춰놓았기 때문에, 그저 안습.
결국 맥베이 대령은 모든 명예를 박탈당하고 유족들과 여론의 비난을 뒤집어 쓰고 평생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가
1968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때 그의 나이가 70세였다.
이렇게, 이 사건은 잊혀지나 싶었는데...... 사건이 일어난지 반세기가 지난 1998년, 헌터 스콧이라는 12살 소년에 의해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평소 영화 '죠스'에 관심이 많았던 이 소년은, 실제 상어들과 사투가 일어난 인디애나폴리스 사건을 학교 과제를 위해 조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도서관에 의외로 자료가 별로 없자, 실제 생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된다. 그 결과, 함장 맥베이 대령이 억울한 오명을 쓰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만다. 이 용감한 소년은, 생존자들과 힘을 합쳐 맥베이 대령의 명예회복을 위한 탄원활동을 벌이게 된다.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어 스콧은, 당시 미국 상원의회 군사위원장이었던 존 워너와 만남을 갖게 되었고
이 문제는 미국의회의 공식결의안건으로 채택된다. 그러나 보수적인 미군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참 유죄나 무죄냐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던 도중, 한 편지가 존 워너에게 도착한다.
미합중국 상원 군사위원장 존 워너 위원 귀하
“저는 당시 인디아나 폴리스함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던 일본제국해군 잠수함 I-58의 함장이었던 전 제국해군 중좌 하시모토 모치츠라입니다.
저는 귀하의 결의안이 1945년 7월 30일 격침된 미해군 중순양함 인디아나 폴리스의 함장 故 찰스 버틀러 맥베이 3세 대령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뢰공격을 지시했던 장본인으로서 저는 맥베이 대령이 왜 군사법정에 세워졌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그리고 그가 경계태세를 소홀히 했다는 유죄 이유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전 인디아나 폴리스가 어떤 상태라도 격침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 (중략) ... 저와 인디아나 폴리스의 승무원들은 끔찍했던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 서로를 용서했으며,
이제 귀하와 귀하의 나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맥베이 대령에게 씌우진 부당한 혐의를 벗겨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전 I-58 함장, 제국해군 중좌 하시모토 모치츠라
놀랍게도 인디애나폴리스함을 격침시킨 장본인이었던 하시모토 모치츠라가 편지를 보낸 것.
지그재그 항로를 취하지 않은 것을 유죄라는 근거로 삼던 미해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더해, 시기적절하게 50년 기한이 지난 문서들이
공개가 시작되며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인디애나폴리스함의 구조요청을 적어도 3군데의 해군수신소에서 수신받았으나,
1곳은 당직사관이 술에 취해 쳐자느라 보고를 올리지 않았고, 또 1곳은 책임자가 카드놀이에 빠져서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보고가 올라와도 나에게 알리지 않을 것을 밑의 수병들에게 지시해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고,
다른 1곳은 자기 맘대로 일본의 속임수라고 단정짓고 보고하지 않았다! 천하의 개쌍놈들.
물론 이런 정보들은 보안문서에나 적어놓았던거지, 맥베이 대령의 재판때는 그냥 입다물고 있었다.
추가적으로, 미정보국은 인디애나폴리스의 항로에 일본 잠수함 2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미해군은 이를 알려주지도 않고
맥베이 함장의 호위함 파견요구를 거절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격침직후 일본해군이 본부에 보낸
인디애나폴리스를 침몰시켰다는 무선신호를 해독했지만 이를 무시했던 것까지 밝혀졌다.
거기다 당시 날씨가 좋지 않아 지그재그 항해를 할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덤...
결국 무죄가 입증된 맥베이 대령은 고인이 되고나서 30여년이 지난 2000년에야 당시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명예회복이
성사되었고,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게 되었다.
"다시 똑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전 대령님과 근무하는걸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해군이 그에게 내린 처벌은 용서받지 못할 부끄러운 처사입니다"
-플로리안 스탐, 인디애나폴리스의 생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