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분자는 환영받기 힘들다. 그래서 보통은 침묵을 즐기는 편이지만, 나는 회색이 색깔이라고 믿고 싶다. 메갈리아 사태를 지켜보면서 회색분자를 자처하며 글을 적어본다.
'한남충'들의 여혐에 묵직한 한방을 날리는 메갈리아의 미러링 전략은 유효했다. 그러나..
'한남충'들의 여혐에 대한 묵직한 한방을 날리는 메갈리아의 미러링 전략은 유효했다. 한국사회에서 침묵을 종용당하던 약자로서의 여성들이 감내해왔던 차별과 폭력을 수면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리벤지 포르노, 여성혐오 범죄, 성매매, 부당한 젠더 부여등 한국사회에서 성차별및 성폭력은 엄연히 실재하고있는 현실이다. 그 누구도 이 책임에 대해 회피할수 없다. '한남충'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책임이 '한남충'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의 폭력에 침묵하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 개인의 의식을 포함해 우리 사회 구성원이 공동으로 지고 있다는 이야기 이다. 알다시피 이러한 공동의 책임은 회피해버리고 침묵해버리기 너무나도 쉽기때문에 공론화가 어려웠고, 외면당하는 성폭력의 피해자들의 분노 표출과 본격적인 반격의 시작을 알리는 '한방'으로써 페미니스트들의 미러링 전략은 대단히 영리했다. 가해자들은 무기력한줄만 알았던 피해자들의 저항과 연대에 우왕좌왕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만을 대상으로 마음껏 휘둘러왔던 폭력의 기회가 박탈당할 것 같다. 이를 권리로 착각해 왔던 가해자들은 자신의 권리(사실 존재하지 않았던)를 뺏길것 같은 두려움에 더 강한 폭력성으로 대응하려 할것이고 매도하려 할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영리한 페미니스트라면,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알고 있을것이다. 한국사회에는 '한남충'만 가득한것이 아니다. 만약 방관했거나, 무감각했던 남성들을 포함해 이퀼리즘에 동참하고 있는 남성들까지 모두 '한남충'으로 매도 되는 순간 흑백논리에 빠지고 전선은 고착화 될것이다. 그만큼 단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한남충'이라는 단어에는 표식이 없다. '일베.충'이라는 단어와는 명백히 다르다. '미러링'은 비이성적인 집단사고를 고발하고 비판할 수 있을때 성립된다. 만약 '미러링'이 미러링 대상의 비이성적인 논리와 무차별적 폭력성까지을 끌어올때, 그 의미는 순식간에 소멸해버린다. 그야말로 '치마를 두른 일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성공적인 미러링 사례로 과거 '일베'에 대항에 결성되었던 '일워(일간워스트)'가 있다. 이름에도 알수 있듯이 일워를 자처한는 사람들은 미러링대상을 명쾌하게 제시했고, 재치있게 조롱했다. 예를 들어 고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하노盧 체'를 '~농(農) 체로 바꾸어 놓고, 혹자들은 조금더 노골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하여 '~하닭'체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유쾌한 일침에 당시 일베는 상당히 당혹스러워했 다. 자신들만이 독점하고 향유 있던, 은어를 이용한 그들만의 단결(혹은 폐쇄)방식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조롱받음으로써 가뜩이나 낮았던 그들의 자존감을 흔들어 놓았다. 일베의 비뚤어진 폐쇄적 사고방식에 의미 있는 일격을 가했다. 미러링은 이렇게 하는것이다.
'소라넷'을 폐쇄한것은 검경의 수사였지 메갈리아가 아니다. 하지만..
'소라넷'을 폐쇄한것은 검경의 수사였지 메갈리아가 아니다. 하지만 메갈리아의 정치적 구호는 옳았다. 시민 사회에서 시위가 사회의 혁신의 실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변화를 불러오는 것은 실질적인 조치이다. 법적 조치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논리중 하나가 '소라넷'의 폐쇄인데, 나는 이것이 오로지 메갈리아의 공로처럼 이야기되는 것에 대하여 전부 동의하지는 않는다. 소라넷의 폐쇄는 검경의 수사에 의해 실현되었지 메갈리아의 외침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나는 검경의 수사에는 젠더가 없(었)다고 믿는다. 소라넷은 분명 여성폭력의 배지(culture medium)였다. 하지만 검경의 수사가 메갈리아의 논조을 대변한것이 아니라, 그냥 그 존재 자체가 사회병리적인 존재였기때문에, 법적 교정의 대상이었기 실행된것이다. 메갈리아의 운동이 소라넷 폐지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라넷 폐쇄를 향한 메갈리아의 구호가 정치적으로 옳바랐다는것을 인정하겠다는 이야기 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당한 구호를 선별할수 있어야 한다. 부당한 구호에 비판을 정당한 구호에 지지를. 이것은 길고 지루하지만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흑백논리에 갇히는 순간 페미니즘은 실패한다. 사실 모든 프로파간다가 그렇다.
유난히도 흑백논리에 집착하는 한국사회에서, 모든것은 진영논리가 되어버린다. 메갈리아를 옹호했단 이유로 혹은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정당 하나를 진영에서 추방시켜버리자고 하고, 교수 하나를 메갈로 낙인찍어버리고, 이에 메갈리아는 분노하며 그들을 '한남충'으로 규정한다. 순식간에 분류작업이 시작되고, 이쯤되면 회색분자들이 피곤해진다. '메갈'도, '한남충'이기도 싫은 사람은 말문이 막힌다. 귀찮아서가 아니고, 답답해서가 맞을것이다. 한걸음만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그만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음에도 그저 감정에 치우쳐 문제의 본질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감히 말해보고 싶다.. 예를 들어 아직도 여성의 임신과 남성의 군복무를 1대1 대응시키는 한심한 작태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 시민 사회속 개개인이 프로파간다를 주창하는데 있어 얼마나 미숙한지가 처절하게 느껴진다. 여성이 시민으로써 주체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한국사회에서의 임신은 크나큰 핸디캡으로 작용하는게 사실이다. 임산부에 대한 직장에서의 차별, 육아, 개인의 건강에 대한 문제에서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다. 남성의 군복무는 어떠한가. 부당한 급여, 병영생활의 크고 작은 부조리, 자유의 박탈등 국방의 의무 이행을 위해 남성이 인권의 일부를 포기할때 남성또한 사회적 약자가 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라는 관점에서 둘의 문제는 일맥상통함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페미니즘(혹은 이퀼리즘)둘레 안에서 둘은 대결구도가 된다. 여성이 이만큼 손해보니 남성도 그만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것 아니냐는 식이다. 군가산점을 두고 옥신각신 하는동안 애꿎은 병사가 학대속에서 자살하고, 저출산 문제 운운하면서 미혼모는 죄인취급을 받고 숨죽여 살아간다. 군가산점을 부여하여 여성을 역차별 하는대신, 병사의 급여를 올리고 복무여건 개선에 힘쓰고, 저출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육아 여건을 개선해야하는데 이는 반드시 양측 상호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가. 재원의 마련이든, 제도적 합의든간에.
페미니즘을 존중하는 '남성', 나아가 '시민'의 연대 속의 페미니즘의 완성.
페미니즘의 최종목표가 남성간 여성의 대결의 승리가 아니라면, 다시말해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 교대를 원하고 있는것이 아니고 이퀼리즘과 동치로써 페미니즘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 페미니스트 단독으로 이루어질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이러한 주장에 페미니스트들은 억울할것이다. 지금 현대사회의 주도권은 분명 남성이 과점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남성의 허락을 맡으며 권리를 되찾아야 하는가. 그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불균형한 권리 만큼 책임이 남성에게 더욱 무겁게 주어져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남성이자 시민으로써 남성은 반드시 호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여성들이 묻고 있다. 말투는 과격했지만, 여성이 여성스스로 여혐이라는 부당한 병폐에 고통스럽다고, 당신들은 그걸 알고 있느냐고 남성에게 쏘아 붙였다. 메갈리아의 남성을 향한 혐오와 경멸의 응결핵이 된 것은 불평등이었다는 것을, 함께 연대속에 인정할수 있어야 한다. (물론 동시에 메갈리아는 선택해야 할것이다. 그들의 '미러링'을 계속할 것인지, 혹은 수정할것인지. 나는 메갈리아는 가면에 불과하고(어쩔수 없이 전략적으로 선택한) 그 아래 진정한 페미니즘의 얼굴을 준비되어 있다고 믿고 싶다.)
이제 페미니스트들이 '소녀는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할 때, 남성은 '진정한 남자는 여자를 사지 않는다'라고 박자를 맞춰 응답해야 할 때이다.
글을 마치며 회색분자가 약간은 피곤한 말투로 투덜대본다.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 그게 아니라요, 시민사회가 허락하는 페미니즘이랄까요. 근데요, 쟤네들도 오죽하면 저러겠어요?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