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시기 그 유명한 로베스피에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젊은 혁명가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는 루이 16세 사형에 앞장서며
명대사를 몇개 남겼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1791년 10월 의회 연단에서 행한 연설 마지막 문장이다
“누구도 무죄로 군림할 수 없다(No one can reign innocently.).”
그 누구든 법을 씹고 위에 군림하는 순간 유죄란 소리다
계엄은 대통령의 권한이 맞다
그러나 입법부인 국회에 총부리 들이댈 권한은 없었고
하물며 전국민을 영장도 없이 체포+처단할 권한은 수천년전 고대에도 폭거라 비난들을 일이었다
역사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흔히 프랑스 혁명기의 냉혹한 혁명가로 로베스피에르만 알고 있지, 더 무섭고 더 차가운 인물이 그 뒤에 있었다는 것은 잘 모른다.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20대 초반에 루이 16세 처형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실각해 27세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혁명이론가 생쥐스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젊음과 천재성에 대한 인류 보편의 동경심과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잔인함이 합쳐져 그의 인생은 완전히 전설로 물들어 있다. 미소년이라느니, 처형장에 끌려갈 때도 냉정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압도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24세에 이미 ‘프랑스의 헌법 정신과 혁명 정신’(1791년)이라는 책을 썼고, 법정 연령이 되기를 1년 기다려 국민공회 의원이 되었으며, 그해 10월 의회 연단에서 행한 연설이 그 유명한 루이 16세 논고장이다. “누구도 무죄로 군림할 수 없다(No one can reign innocently.).”라는 마지막 문장이 역사에 길이 남아 있을 정도다. ‘군림한다’는 것이 벌써 유죄라는 것, 그러니까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유죄라는, 도저히 논박 불가능한 무서운 구절이었다. 그때까지 무명이던 이 젊은 의원의 발언이 자코뱅의 공식 입장이 되어 결국 석 달 뒤(1793년 1월 21일) 왕은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생쥐스트는 왕의 처형 근거를 ‘사회계약론’에서 찾았다. 사회계약론에 의하면 법이란 사회계약의 결과다. 따라서 법은 사회계약에 동의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왕은 사회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이, 법의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법의 밖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계약을 맺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효력이 발생하는 법 조항을 그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왕에게는 그 어떤 사회체제의 법도 적용할 수 없고, 다만 사회 전체가 적으로 간주해야 할 절대적 적일 뿐이다.
생쥐스트는 왕이 사회 전체와 같은 무게의 대칭 관계가 되는 것은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전제군주에 대항하는 인간의 권리는 개인적인 권리다”라는 말로 왕에 대한 개인적 적대 관계를 강조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왕에 대한 처리가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언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국민들 동의가 없더라도 아무나 루이 16세를 죽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