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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詐欺 列傳]18.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게시물ID : history_124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12
조회수 : 1115회
댓글수 : 18개
등록시간 : 2013/11/06 18:09:21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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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전국시대말 천하가 어지럽고 혼란하던시기에 서쪽의 진나라는 주변열국들을 차례로 잠식해가고 있었다.
그때에 쇠망해가던 천하육국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진나라 통일의 초석을 다듬은 두 장수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백기와 왕전 이다.
진나라는 이 두 장수의 힘으로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고 대 진제국을 세웠으니 이 두 장수의 공적은 참으로
위대하기 짝이 없을것이다.
그러나 두 장수는 전쟁과정중에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천하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했으니
필자는 무엇이 공이고 무엇이 죄인지 고민하지 않을수 없다.
백기장군은 몇십 몇백만인지 모를 적군을 죽이고 공을 이루었으나 결국 자기 자신도 비참한 말로를
피하지 못했고
왕전장군 또한 자기자신은 종신안석하다가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삼대에 걸친 장수가문으로서
결국 그 손자 왕리가 초왕 항우에게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한 장수가 공을 이루려면 일만군사의 뼈가 땅에 뒹굴어야 한다는 옛말도 있지만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에는 이토록 수많은 인명의 희생이 있었다.
그러하니 전쟁이란것이 그 수많은 백성들의 피보다도 값진것이란 말인가?
 
병자흉기 쟁자역덕(兵者凶器 爭者逆德)
병사는 흉기이니 함부로 쓸것이 아니요 전쟁은 덕을 역행하는것이다.(위료자.병령상 제23편)
 
자고이래 궁병극무(自古以來 窮兵極武)  미유불망자(未有不亡者)
자고로 무기와 군사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망하지 않은자가 없다.(정관정요.정벌편3)
 
옛부터 병사(兵事)는 흉하다 하여 전쟁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사상이 있었음에도
진나라와 그 장수들은 사람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날마다 전쟁을 벌였으니
그 진나라가 삼대만에 망하게 되는것도 다 하늘의 뜻이 있었다 하겠다.
 
진나라가 남으로 초의 언땅과 수도 영땅을 공략하고 북으로 조나라를 장평에서 괴멸시키고
수도 한단땅을 포위한것은 무안군 백기의 지휘에 의한것이다.
또한 초군을 대파하고 조나라를 멸망시킨것은 왕전의 작전에 의한것이다.
그래서 백기.왕전에 대해 서술해보기로 하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백기대(白起臺)
 
백기는 미(郿:협서성.기산현) 사람이다.
용병을 잘해 진소왕의 신임을 받았다.
13년에 좌서장이 되고 장군이 되어 한의 신성을 공격했다.
다음해에 백기는 좌경 이 되어 한과 위를 이궐에서 공격하여 적의 목을 자른것이 24만이고
적장 공손희 를 사로잡고 다섯개의 성시를 점령했다.
백기는 승진하여 국위 가 되어 한나라의 안읍에서 동쪽 간하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점령했다.
몇년후 백기는 초를 공격해서 언.등 땅과 다섯 성을 점령했다.
또 초나라의 영.이릉을 공격하고 드디어 동쪽으로 경릉에 이르렀다.
초나라는 영을 떠나 동쪽 진(陳)으로 천도했다.
진나라는 초의 영땅을 남군으로 삼았다.
백기는 승진하여 무안군이 되었다.
소왕34년 백기는 위를 공격하고 화양을 점령해 적장 망묘를 패주시키고 삼진의 장군들을 사로잡아 목벤것이 13만이며,초나라와 싸워 초군2만을 황하 가운데에 익사시켰다.
백기의 공적은 이 외에도 수없이 많으나 이정도로 줄인다.
 
소왕46년 진나라는 좌서장 왕홀을 시켜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군으로 삼아 누벽을 견고히 쌓고 전 군에게 명했다.
ㅡ진군이 지치고 방심할때까지 기다린다ㅡ
진군은 자주 누벽을 공격했으나 능히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그러자 진나라 정승 응후 범수가 조나라에 천금의 돈을 뿌려가며 염파를 모략하고 이간질 했다.
"진나라가 두려워 하는것은 마복군의 아들 조괄장군 뿐이다.
무능한 염파따위는상대도 안되니 곧 진나라에게 항복할것이다."
 
이런 소문이 돌자 조나라왕은 염파를 자주 꾸짖고 불신하게 되었다.
진나라 첩자들의 말을 듣고 그말을 믿게된 조왕은 염파를 불러들이고 대신 조괄을 장군으로 삼았다.
 
조괄은 조나라 명장 마복군 조사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명성때문에 장군에 등용되긴 했지만 장수로서의 경력은 일체 없고 그저 아버지가 보던 육도삼략이란 책을 한번 본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조괄은 자신이 병법의 대가인양 자랑하고 다녔다.
조괄은
"진나라의 무안군 백기쯤 되면 모를까 왕홀 정도라면 단번에 쳐부술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다녔다.
 
조효성왕은 조괄에게 황금과 비단을 주고 장수의 부절을 하사하고 군사 20만을 주어 진나라와 싸우러 떠나게 했다.
조괄은 왕에게 받은 황금과 비단을 집에 가져가서 어머니에게 보였다.
조괄의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 조사는 장수가 됐을때 나라에서 주는 상도 모두 군사들에게 나눠주고 집에 가져온적이 없다.
네 아버지는 '만약 조괄이 장군이 되면 조나라는 망할것이다' 라고 했는데 네가 어찌 장수가 되었느냐?"
라고 꾸짖고 조효성왕에게 가서 조괄을 장수로 삼지 말것을 청했다.
그러나 조왕은 그 어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조괄은 장수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장평땅으로 나아갔다.
그는 염파를 대신해 장수가 되어 염파의 군진과 제도를 모조리 뜯어 고치고 염파의 부하들도
모두 자신의 사람으로 교체했다.
 
한편 진나라는 조괄이 무안군 백기를 두려워 한다는걸 알고 비밀히 백기를 장수로 삼아 진나라장수 왕홀을 돕도록 하고 이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조괄은 전쟁터에 도착하자마자 군사를 내어 몸소 진군에 도전했다.
진군이 패해서 달아났다.
상대를 얕잡아본 조괄은 승세를 타고 진군의 누벽까지 돌진했다.
그러나 진군의 방비가 워낙 견고해서 도무지 뚫을수가 없었다.
조나라군대가 어물어물하는사이에 진나라의 복병2만5천이 조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후방의 보급부대도 연락을 끊어버렸다.
조군은 세동강이로 나뉘어져 버린것이었다.
조군은 후대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보급로도 차단되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고
양식이 끊겨 46일간 굶게되자 아사자가 속출하고 서로 죽여 그 살을 베어 씹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괄은 '굶어죽느니 싸우다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고 최후의 일전을 벌여 탈출로를 찾으려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결국 수없이 많은 군사를 잃고 조괄은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사기 본문에는 조괄이 사로잡혔다고 되어있는데 다른책에는 활을 맞고 죽었다고 하니
글의 흥미를 위해 후자를 채택하였다.)
장수를 잃고 사기가 떨어진 조군 은 결국 전병력40만이 모두 진군에게 항복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무안군 백기의 계책이었다.
 
40만의 포로를 잡은 무안군백기는 그 처리에대해 골머리를 앓았다.
1~2만도 아닌 무려 40만의 군사가 반란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실로 큰일이 아닐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40만의 포로를 먹일 양식도 없었다.
 
어느날밤 진군은 조나라 포로들에게 술을 나누어주며 말했다.
"전쟁이 끝났으니 너희중 본국으로 돌아가고싶은자는 보내주고 우리 진나라군사가 되고싶은자는
우리군에 편입하여 우리와 똑같이 대우해줄것이니 그리 알아라."
이말을 들은 조나라 포로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술을마시며 흥겹게 취해 잠이들었다.
무안군백기는 장수들을 불러모아 진나라군사들에게 머리에 흰두건을 쓰게 하여
어둠속에 분간할수 있게하고 포로들을 몰살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자정이 되어 끔찍한 학살극이 시작됐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진군은 조나라 포로들을 칼로 창으로 일제히 찌르고 베어죽였다.
아무런 무기도 없는 조나라 포로들은 울부짖으며 죽어자빠졌고
대부분의 포로들은 학살을 피해 달아나다가 미리 파놓은 구덩이로 떨어져서 모두 생매장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생지옥의 장면이 벌어졌다.
요행으로 살아 도망쳐 나온 포로들도 매복해 있던 진군이 모조리 잡아 죽였으니
40만중에 살아남은자가 고작240명이었다고 한다.
이 240명은 모두 나이어린 소년들이었는데 이들을 살려준것은
진나라의 무서움을 천하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무안군백기는 죽은 시체들의 두골만 거두어 높이 쌓게하고 그 이름을 두로산 이라고 하였다.
높이 쌓인 두골의 산 위에 대를 짓고 그 대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백기대'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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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시절 현종황제가 이곳에 순행 한일이 있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바람소리가 스산하고 처절했다.
현종황제는 길이길이 탄식하고 삼장법사를 시켜 7일간 수륙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 나중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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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왕48년 진나라는 다시 상당군을 평정했다.
이에 두려움에 떨게된 한.조나라는 소대에게 후한 예물을 들려보내어
진의 재상 응후범수를 만나보게 했다.
소대는 범수를 만나 진나라가 한.조를 쳐서 성공하면 무안군 백기가 삼공의 지위에 오를것이며
백기의 지위가 높아지면 응후 범수가 무안군 백기의 아랫자리에 앉게 될것이라고 범수를 자극했다.
소대는 범수에게 백기가 전쟁에승리해서 자꾸 공을 세워봐야 범수 자신에게는
이득이 될것이 없음을 설파하고
차라리 한.조와 강화하고 약간의 땅을 할양받으면 백기보다 범수 자신의 공이 더 크고 그 땅도 범수가 얻을수 있을것이라고 계책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범수는 진왕에게로 가서 말했다.
"우리 군사들이 지쳤으니 사졸들을 쉬게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한.조의 항복을 받아주고 땅을 할양 받고 병사를 철수시켜야 합니다."
라고 설득하였다.
 
진왕은 그것을 허락하였고 회군의 명령을 받은 백기는 대로하였다.
백기는 그것이 모두 범수의 농간인것을 눈치챘지만 어쩔도리가 없어 그대로 회군하고 말았다.
백기는 그일로 재상 응후범수에게 앙심을 품었다.
 
소왕49년 진나라는 다시 한단을 쳤으나 전황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진나라는 더 많은 지원군을 보냈지만 진나라 장수 다섯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대패하였다.
진소왕은 역시 백기가 아니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백기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백기는 병을 핑계로 출전을 거부하였다.
화가난 진소왕은 왕홀을 장수로 삼아 한단땅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나라의 위험을 돕기위해 열국의 연합군이 참전하게되어 진군이 불리하게 되었다.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과 위나라의 공자 신릉군이 10만의 대병을 이끌고 진군과 싸웠으므로
진나라는 오히려 많은 군사를 잃고 패퇴하게 되었고 오히려 연합군이 진나라로 쳐들어 오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급해진 진소왕은 재상 응후 범수를 백기에게 보냈다.
"역시 제후국을 상대해 싸울사람은 무안군 그대밖에 없으니 제발 나가 싸워주시오."
그러나 백기는 범수의 말을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범수를 비난하고 나섰다.
"지난날 내가 조나라를 칠때 승상이 나를 불러들이지 않았소?
그때 나를 그냥 두었다면 조나라는 이미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을것인데 승상이 나의 앞길을 막아놓고서는
이제와서 다시 조나라를 치라고 하니 나는 갈수 없소이다."
이 말을 들은 범수는 할수 없이 궁으로 돌아가 소왕에게 다녀온일을 보고했다.
그런데 범수는 자기의 농간이 들통날것이 두려워 소왕에게 백기를 참소하였다.
"백기는 왕께서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진군을 철수시킨것을 크게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기는 대왕을 저주하는 이야기를 하더이다."
이에 대로한 진소왕은 무안군 백기를 파면하고 일개병졸로 떨어뜨려서 변방으로 내쳐버렸다.
 
백기는 하릴없이 함양을 나와 북쪽의 변방으로 떠나갔다.
무안군백기가 함양의 서문을 나와 10리쯤 가서 두우 땅에 머물고 있었다.
응후범수는 백기를 살려두었다가 자신의 참언이 들통날것이 두려워서 또다시 진소왕에게 백기를 참소하였다.
"백기는 무엄하게도 죄를 입고 귀양을 가는중에도 대왕을 비방하고 저주하였습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또한 백기는 용병술에 능하니 만일 다른나라에서 백기를 데려다가 장수로 삼으면
그것은 우리 진나라에 큰 우환이 될것입니다."
계속되는 참언을 그럴듯하게 들은 소왕은 백기에게 서둘러 사신을 보내어
백기에게 스스로 자결할것을 명하였다.
 
무안군 백기는 그말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한탄했다.
"내가 무슨죄를 지었기에 이런지경에 이르렀는가 알수없는일이로다.
그러나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할수없지.."
그리고는 한참후에 백기가 다시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지..나는 죽어야 할 목숨이었구나.."
"장평땅의 전투에서 항복한 조나라군사 40만을 속여 생매장 하고서도 내가 온전한 죽음을 바라는것은
옳지 못하다.
나는 역시 이렇게 죽어 마땅한것이다."
 
말을 마친 백기는 칼로 자기의 목을 찌르고 죽었다.
그때가 진소왕 50년 11월 이었다.
진나라 사람들은 백기가 억울하게 죽었다 하여 그를 동정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러곳에 백기의 사당을 만들고 때마다 제사를 드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것은 사실인지 알수 없으나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당나라 말기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들에있던 소 한마리가 맞아 죽었다.
잠시후 사람들이 몰려가서 살펴본즉 소 뱃가죽에 '백기'라고 씌어있었다.
 
사람들은 백기장군이 사람을 많이 죽였기때문에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짐승으로 환생하여
벼락을 맞고 죽은것이라고 했다.
대저 살생의 죄는 이렇듯 중한것이니 후세의 장수된 사람들은 특히 주의하고 조심하여야 할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왕전은 빈양의 동향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병법을 좋아했으며 진시황제를 섬겼다.
시황제11년 왕전은 장군이 되어 조나라의 알여땅을 격파하고 9개의 성시를 점령했다.
시왕18년 왕전이 조나라를 공격해 기어코 조나라를 격파하고 조왕을 항복시켰다.
조나라땅을 모두 평정해서 진나라의 군(郡)으로 삼았다.
그 다음해에 연나라가 형가를 보내 진왕을 척살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분노한 진왕은 왕전을 시켜 연을 공격했다.
놀란 연왕 희 는 요동으로 달아나고 왕전은 연의 국도 계 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진나라는 왕전의 아들 왕분을 시켜 초나라를 격파하고 군사를 위나라로 돌려 공격했다.
위왕이 항복하고 드디어 위나라가 평정 되었다.
 
진나라의 장군 이신 은 젊고 용맹해서 군사 수천을 이끌고 연태자 단 을 뒤쫒아 단을사로잡은 공적이 있었다.
진왕정은 이신을 총애하여 물었다.
"내가 초나라를 치려하는데 그대는 군사 몇명이 있으면 초를 멸할수 있겠소?"
"20만이면 충분합니다."
이신의 답을 들은 진왕정은 왕전에게도 물어봤다.
"그대는 몇명이라야 초를 깨뜨릴수 있겠소?"
"60만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신은 20만이면 충분하다던데 장군은 어째서 60만이나 필요하다고 하시오?"
"초나라는 오랜 강국이며 국토는 넓습니다.20만으로는 안될일이고 적어도 60만은 돼야 가능합니다.
 
진왕 정은 왕전이 늙어서 겁이 많아졌다고 생각하고 이신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남쪽의 초를 치게 하였다.
이신은 승승장구하여 평여를 함락시키고  언.영땅을 격파했다.
그래서 이신은 자만하여 경계를 소홀히 하고 방심하였는데
이때 초나라 명장 항연(항우의 조부)이 매복군을 숨겨놓고 이신의 군진을 급습하여 진군을 철저히 깨뜨렸다.
진왕정은 대경실색하여 직접 수레를 타고 왕전장군을 찾아갔다.
"과인이 장군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이신이 진나라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패전하였소.
이제 열국의 연합군이 우리나라로 쳐들어오고있으니 왕장군께서 나서 주셔야겠소."
"저는 늙어서 병들고 지쳐 정신조차 혼미합니다.제가 아니라도 현명하고 용감한 장수는 많으니
다른 장군을 찾아보십시오."
"아니오 왕장군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나가서 초나라를 쳐주시오."
"대왕께서 정히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군사는 60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해드리겠소."
 
그리고 또 왕전이 말한다.
"또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뭣이든 말씀하시오."
"훌륭한 전택과 아름다운 원지를 내려주십시오."
진왕정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그런것을 걱정하시오.그런근심은 하지말고 어서 출정이나 해주시오.
그대가 승전하고 돌아오면 나는 그대와 함께 부귀를 누릴것이니 장군은 장차 가난할것을 걱정할건 없소."
마침내 왕전은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성을 떠나 함곡관으로 나아갔다.
진왕정은 파수까지 따라나가서 왕전을 전송했다.
왕전은 그곳에 가서까지 재차 진왕에게 간청했다.
"제가 공이 있더라도 이제 늙어서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제가 죽고나서라도 저의 자식들을 위해 좋은 땅과 집을 청하는것입니다."
진왕은 그게 웃고 대답했다.
"알겠소 그대의 청대로 모든것을 들어드리겠소."
왕전은 함곡관에 도착한 후에도 진왕정에게 다섯번이나 사람을 보내 어디어디의 땅을 달라.어디어디의 집을 달라.어디어디에 있는 좋은 연못과 동산이 있는 집을 달라고 구체적으로 보상을 요구했다.
 
왕전의 부관 몽무가 왕전에게 물었다.
"노장군께서 그토록 끈질기게 청하여 전택을 요구하는것은 좀 지나친것 아닙니까?"
그때에 왕전장군이 몽무를 돌아보며 대답하였다.
"60만 이라면 진나라의 거의 모든 군사를 다 모은것이다.
만약 내가 딴맘을 품고 칼끝을 돌려세우면 어찌되겠는가?
우리 왕은 성격이 사나운데다 의심이 많아서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내가 많은 전택과 재산을 요구하는것은 왕이 나를 의심하지 않도록
나에게는 재산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것을 보이고 왕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이다."
부장 몽무는 그제야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왕전은 전장에 도착해서 굳게 누벽을 지키기만 할뿐 좀체로 나가서 싸우지를 않았다.
오히려 초군이 자주 도발해와서는 진군에게 욕설을 퍼붓고 돌아가곤 했다.
그래도 왕전은 대응을 하지 않고 오히려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목욕도 시키고 잘 먹이고 어루만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왕전이 부장을 불러 물었다.
"사졸들이 요즘 무엇을 하고 노는가?"
"행군의 피로가 완전히 풀려 뜀박질과 돌팔매질을 하며 놉니다."
"이제 사기가 충천했으니 가히 싸울만 하겠다."
 
한편 초나라 장수 항연은 1년이 다되도록 싸움한번 하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느라
긴장이 풀리고 방심을 하게 되었다.
왕전은 이제 싸울때가 되었다 하고 어느날 60만의 대군을 일시에 진격시켰다.
초장 항연은 창졸간에 대군이 밀려오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초군은 진나라 군사들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왕전은 기수 라는 강 남쪽에 이르러 드디어 초나라 장군 항연을 잡아 죽였다.
초군은 대패하여 달아났고 진군은 승세를 타고 초나라의 성읍들을 닥치는대로 공략했으니
이것이 바로 파죽지세 였다.
그후 약 1년정도 지나서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끝내 초나라는 평정 되었다.
진나라에서는 그곳을 진의 군현으로 삼았다.
왕전은 기세를 몰아 남쪽으로 백월까지 정벌하였고 왕전의 아들 왕분은 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 하였다.
연왕희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땅 평양까지 도망하였는데 왕분이 끝까지 따라가서
평양성을 깨뜨리고 연왕희를 사로잡아 함양으로 압송 하였다.
 
이리하여 위.조.한.연.초.제의 6국이 모두 멸망하고 천하는 진나라로 통일이 되었다.
이것은 진왕정26년의 일이었다.
진왕은 육국이 다 쓰던 왕 이라는 칭호를 쓰기싫어서 옛 삼황오제에서 착안하여 황제라는 말을 만들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그리고 무슨 황제니 무슨 황제니 하는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자기스스로 진나라를 시작하는 시황제가 되고 후세에 2세황제.3세황제라 칭하여
만세까지 이어지도록 하였다.
진시황제는 옥공에게 명하여 화씨지벽을 다듬어 옥새를 만들게 하고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基壽永昌) 의 여덟글자를 새기게 하였다.
 
진나라의 2세황제때쯤 왕전과 그 아들 왕분이 죽었다.
진나라에서는 왕씨와 몽씨가 공이 높았는데 몽씨일족은 연태자 단이 보낸 자객 형가를
진왕에게 알현할수 있도록 아뢴 죄로 멸족이 되었다.
그중에 몽가 와 몽오 등이 모두 죽었는데 몽오의 아들 몽무 만은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죽음을 면했고 또 전쟁의 공로가 있어서 죄를 면했다.
 
진시황이 죽고 2세황제가 즉위한후에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때에 진승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나서자 다급해진 진나라에서는 왕전장군의 손자 왕리를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치게 하였다.
왕리가 거록성을 포위하였는데 사람들이 싸움의 결과가 어찌 될것인가를 놓고 이야기 했다.
"왕리는 강한 진나라의 명문출신이니 조나라를 깨뜨리는것은 식은죽 먹기 일것이다."
"그렇지 않다 삼대에 걸쳐 장군이 된자는 반드시 패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토록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으니 그 원혼이 가만 있겠는가?
왕리는 반드시 그 불길함을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얼마안가서 항우(項羽)가 조나라를 구원하여 진나라 군대를 항복시키고 왕리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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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왕전열전의 끝에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이렇게 평하였다.
 
백기는 전략과 기계가 무궁무진하였다.그래서 명성이 천하에 진동했다.
그러나 응후 범수와의 갈등과 불화를 극복하지 못했다.
 
왕전은 진나라의 장군이 되어 6국을 평정했다.
당시 왕전은 백전노장으로 진시황제까지도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국가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지 못하고 부질없는 미봉책만 쓰다가 결국 사몰하고 말았다.
손자 왕리에 이르러서는 항우에게 사로잡힌 몸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라하겠다.
백기와 왕전도 각각 단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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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백기와 왕전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이들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결정적이고도 지대한 공을 세운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인명을 살상하여 천하인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모두에 말한대로 공이라는것이 무엇이고 죄라는것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어려움이 있다.
이들은 수십수백만명을 살상하고 결국 자신의 몸과 가문을 망쳤으니 가히 천벌이라는것이
있기는 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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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장수라 하는자는 적을 죽이는것을 업으로 삼는자이니 국가를 위해 일했다고 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할수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인명을 살상하는데 있어서는
좀더 신중하고 주의하여 처신하는것이 기본중의 기본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들 백기와 왕전은 사랍죽이는것을 가을논에 벼 베듯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수없는 생명을 죽였으니 세상에 이만큼 사람을 많이 죽인자들도 드물듯 하다.
당시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죽이고 국토를 넓히는것이 국가에 충성하는것이었는지는 모르나
그렇다 해도 인명의 살상에 있어서는 최소한의 최소한으로 처리했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런면에 있어 지옥의 야차와도 같은 삶을 살았다.
 
지금 세상에는 인본주의라는것이 생겨서 옛 춘추전국시대와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그것이 꼭 그렇지도 않은것 같다.
 
악마의 화신이라 할수있는 저 미국의 조지부시는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하여
이라크의 국민들을 학살하고 후세인을 잡아죽였다.
어디 그뿐인가? 근세에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 모두 그러하였다.
2차대전때 원폭투하가 그랬고 월남전이 그랬다.
중세유럽의 십자군도 마찬가지요 스페인과 영국의 아메리카 침공도 모두 적국이라하여 무고한 인민을 학살하였으니 이것이 역사라는것인가?
침략과 정벌이 끊이지 않고 이뤄져온 우리 인류의 역사는 자랑스럽기보다는 부끄러움이 훨씬 많다.
이것은 모두 탐욕 때문이니 돈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남의 생명을 빼앗는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 인류의 부끄러움을 어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단 외국의 일만도 아니요 또한 남의 나라 일만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삼십여년 전에도 한 반역군인의 탐욕과 권력욕 때문에 광주의 수천 시민이 죽고 부상당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것인가?
천하를 횡행하던 무안군 백기가 한번 응후의 지탄을 받고 대장군에서 일개 병졸로 전락하여
변방으로 쫒겨가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반역의 주범 전두환과 노태우가 이등병으로 강등당하고 법정 최고형을 언도받은 일이 있다.
 
그런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군은 어떤 생각을 하고있는가?
남북의 긴장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평화를 열망하는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심심하면 전쟁을 말하고 있다.
며칠만 시간을 주면 북한을 멸망시킬수 있다는 망언은 우리 국민들의 심장을 멎게 할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현대전이란것이 어느 한쪽만 멸망하고 한쪽은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우리군의 시각을 보며
참으로 위태롭다는 생각을 금할길이 없다.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던 이승만은 국민을 버리고 한강다리를 폭파한 후에
점심은 대전에서 먹고 저녁은 부산에서 쳐먹었다.
지도자라하는것들이 이모양이니 우리국민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할지 참으로 마음둘곳이 없다.
 
역사이래로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국익을 생각했던 지도자는 손으로 꼽을정도로 몇 안되는데
우리 국민은 다행히도 몇년전에 그런 지도자를 맞이 했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국민들의 탐욕과 무지때문에 그런 지도자를 잃고 이제 또다시 암흑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그 훌륭하고 위대했던,진정으로 국민만을 위했던 지도자가
스스로 존경하며 아껴마지않던 친구를 남겨주었다.
물론 국가의 불법과 부정으로 잠시 희망의 시간이 미루어졌으나
그 희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 오를날이 머지 않았음을
필자는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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