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보고 배운게 부족해서 제가 잘못해석하는 부분이 많을거라 생각합니다. 용어에 대한 이해나 표현에 미숙한 부분이 많을탠데 그래도 뜻은 전달되길 바랍니다.
노자와 왕필주 들뢰즈의 리좀에 관한 텍스트를 주제로 삼아 논의를 이어가던데...
리좀은 식물인데 나무 뿌리 사이를 연결하면서 살아 간다고 합니다. 사유를 리좀에 비유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라 했습니다. 나무의 사유와 리좀의 사유를 구분합니다. 나무는 존재론적인 사유, 리좀은 관계론 적인 사유.. 나무는 플라톤? 적인 사유 리좀은 현대의 구조주의 사유?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면서 노자 왕필주를 인용합니다 "... 있음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없음을 뿌리로 생각해야 하니, 장차 있음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싶다면 반드시 없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왕필의 주와 본말논의를 강신주는 "본말의 형이상학" 이라고 얘기하면서 리좀-나무 구분으로 나무의 사유, 존재론적인 사유로 해석하더군요.
비록 잘은 모르지만 노자에서 말하는 무는 인간의 인식틀 밖의 것을 얘기하는 거라 들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무에서의 유 그리고 본말을 말한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 넓게 해석하면 존재론적 인식의 한계도 얘기한다 생각합니다. 본말이나 노자의 무는 비록 이미지는 나무라고 하더라도 그걸 존재론적인 세계관으로 해석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왕필이 어떤 생각으로 주를 달았는지는 원 텍스트를 접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왕필이 존재론적으로 해석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하면 오히려 강신주가 왕필주만 인용하는건 노자에대한 오해 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난해하게 적은게 아닌가 하네요. 저 스스로도 명확하지 않아 어렵게 적게 된 것 같습니다.
제 질문은 강신주의 이러한 해석이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인식인가요? 아니면 방대한 내용을 대중들과 소통할려고 하는 강신주님 의 독창적인 해석인가요?
리좀의 사유를 노자에서는 찾기 어렵다 말하는 강신주의 해석을 이미지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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