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널리 알려진 사실. 영어권에서는 배를 지칭할 때 인칭대명사 she를 사용한다. 예로부터 많은 국가에서는 배를 여성으로 취급했다.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배와 관련된 용어나 미신에는 이러한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자매함이나
처녀항해라는 용어라든가, 배에 여자를 태우면 (같은 여자인) 배가 질투를 해서 불운이 닥친다든가. 배에 이름이나 별명을 붙일 때에도 배는 흔히 여성 취급을 받았다. 미군의 전설적인 항공모함 CVS-2 렉싱턴의 별명이
잿빛 귀부인Gray lady였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1. 헌데, 군함의 - 별칭은 공식적으로 붙이는 게 아니니 그렇다고 쳐도, - 이름은 이러한 전통이나 관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군함의 이름은, 일반 선박의 이름과는 달리 군함 개개를 호칭할 뿐만 아니라 군함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며, 단순한 이름 이상의 정치적, 군사적 함의를 갖기도 한다. 예컨대 미 해군이 대대로 사용하는 군함명 엔터프라이즈Enterprise처럼, 혹은 한국 해군의 독도함처럼, 군함의 이름은 단순히 군함을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하겠다. 이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다른 나라보다 더한 측면이 있었다. 오늘은 그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2. 일본 해군의 군함에는 어떤 이름이 붙었을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 몇 가지를 꼽아보자. 아카기赤城, 소류蒼龍, 야마토大和, 나가토長門, 콘고金鋼, 텐류天龍, 아키구모秋雲 등등… 척 보기만 해도 저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아카기? 붉은 성? 소류는 푸른 용이란 뜻이고, 야마토는 일본을 뜻하는 말이란 것까진 - 일반 상식에 비추어 - 알 수 있다. 그런데 나가토는 뭔가? 긴 문? 영역하면 Long gate인가? 그럼 텐류는, 아키구모는 또 뭐란 말인가? 최대한 그럴듯하게 머릿속에서 짜 맞추다 보면, 우리는 쉽게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거 그냥 멋있어 보여서 지은 이름 아냐?"라고. 그리고 이 생각이 맞다. 단순히 멋있게 지은 이름 아니다.
3. 놀랍도록 규칙성이 없어뵈는 이름들이지만, 사실 일본 해군은 군함의 이름을 지을 때 명확한 대원칙을 갖고 있었다. 모든 군함은 이 원칙에 따라 이름이 주어졌다.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전함에는 번국명, 즉 일본 역사상에 있었던 고대국가 이름을 사용했다.
2) 항공모함에는 특수한 이름(特殊名)을 썼다. 보통 상서로운 동물의 이름이 붙었다. 1943년에는 일본 각지의 산 이름도 항공모함에 붙이게 되었다.
3) 중순양함에는 산의 이름을 썼다.
4) 경순양함에는 강의 이름을 썼다.
5) 구축함에는 해상, 기상의 자연현상 등이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6) 기타.
잠수함 - 형식에 따라 이伊-(숫자), 로呂-(숫자) 등으로 표기되었다.
연습순양함 - 신사神社의 이름이 쓰였다.
수상기모함 - 과거의 무훈함, 또는 추상명사를 썼다.
잠수항모 - 끝을 경鯨 (일본어 발음 게이げい) 로 통일시켰다.
이에 따라 위에서 나열한 이름을 구분하면,
야마토, 나가토는 번국의 이름이었으므로 전함
소류는 특수명에 해당하므로 항공모함
콘고, 아카기는 산의 이름이니까 중순양함
텐류는 강의 이름. 따라서 경순양함
아키구모는 자연현상에서 따온 이름이므로 구축함
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렇듯 군함의 이름만 보아도 해당 군함이 어떤 종류인지 판별할 수 있게 해주는, 실로 편리하고 합리적인 원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일본군 하면 불합리, 부조리, 비효율의 3박자에 왜 그 자리에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작자들이 지휘를 하는 괴악한 군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일본군도 하나의 군대이며, 특히 일본 해군은 한때 태평양을 지배할 뻔했던 세계 2위의 해군이었다. 이 정도의 원리 원칙을 만들어 굴릴 정도는 되었다는 뜻이다. 무작정 일본군 하면 까내리고 보는 태도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
4. 정답지 공개
열거한 군함들의 실제 함종은 이렇다.
1) 전함 - 콘고, 나가토, 야마토
2) 항공모함 - 아카기, 소류
3) 경순양함 - 텐류
4) 구축함 - 아키구모
전함인 줄 알았던 아카기는 사실 항공모함이다. 중순양함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던 콘고는 전함이었다. 분명 일본 해군의 원칙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작자들은 어째서 자기네들이 세운 원칙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것일까? 저 둘이 너무나도 특수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일까? 자세히 알아보면, 이 문제는 결코 한두 척만 갖고 있던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1) 항공모함 아카기 - 말했듯 산의 이름을 갖고 있다. (즉 이름만 보면 중순양함이다)
2) 항공모함 카가 - 이쪽은 번국의 이름이다. (이름에 따르면 전함이다)
3) 콘고급 순양전함 콘고, 히에이, 하루나, 키리시마 - 모두 산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름은 중순양함이다)
4)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 미쿠마, 스즈야, 쿠마노 - 넷 모두 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경순양함이어야 한다)
5) 쿠후소급 전함 후소 - 고대 일본을 가리키는 말은 야마토가 아니라 이쪽, 후소다. 야마토 역시 고대 일본의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혼자 유별난 이름을 갖고 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인가? 이는 순전히 일본군의 경직된 대가리 때문이었다. 일본 해군이 배에 이름을 붙이는 시점은 바로 군함을 건조하기 위한획에 착수할 시점이었는데, 도중에 계획이 변경되어 함종이 바뀌는 경우에도 한 번 붙인 이름을 결코 고치려 하지 않았다. 원칙에 맞게 다른 이름을 붙이면 될 것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여튼, 왜 이런 식으로 바뀌었는지 해설을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0) 콘고급 순양전함들 >순양전함은 일반 전함과 다르게 산의 이름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본 해군에서는 순양전함을 전함의 변종이 아니라 순양함 - 그것도 무거운 순양함 - 의 확대개편안으로 취급했던 탓이다.
1) 아카기 > 본래 아마기급 순양전함으로 계획된 군함이었으나, 도중에 항공모함으로 용도를 변경해서 순양전함에 붙일 산의 이름을 가진 항공모함이 되었다. 참고로 아카기는 아마기급의 2번함으로, 1번함인 아마기는 아카기처럼 항공모함으로 용도가 변경될 예정이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박살났다.
2) 카가 > 이쪽은 전함으로 계획되었다가 항공모함이 된 사례다. 참고로 이쪽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항공모함이 되었다.
3) 모가미급 중순양함들 > 일본이 건조한 대표적인 조약위반함이다. 즉, 만들 때는 경순양함이라고 속이고 실제로는 중순양함을 만들었다는 뜻. 따라서 이름도 경순양함에 붙이는 강의 이름이었다.
4) 후소급 전함 후소 > 태평양 전쟁 때 활동한 전함 후소는 2대째로, 초대 후소는 19세기 말에 건조된 장갑프리깃함이었다. 왜 이 전함에 후소라는 이름을 준 건지는 불분명한데, 추측컨대 일본이 자체적으로 설계, 건조한 최고성능의 함선에 '일본 그 자체'인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당장 동급함인 2번함 야마시로山城는 일반적인 전함의 명명방식대로 번국의 이름을 준 것으로 보아, 썩 말이 되는 듯 싶다.
5. 이것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일본군이 자랑하는 - 해군과 육군 모두! - 각종 또라이 함선들이 끼기 시작하면 작명원칙은 사실 아무래도 좋았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된다. 그렇다, 일본 해군은, 일본군은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머리가 굳은 바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