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시작이다. 두 도시를 물바다로 만든 태풍이 왔다간 다음 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하고, 아스팔트 위에 물기를 머금은 자국 하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일상적인 하루였다.
벌써 발이 차갑다. 아직 하루마다 반팔과 긴팔을 번갈아 입고 있지만 내 체온은 이미 완연한 가을이라 말한다. 침대위로 노오랗고 곧게 뻗은 햇볕에 차가워진 발을 녹이며 아침 여덟 시 알람 이후부터 아무 소리도 내지않는 핸드폰을 켰다. 메신저어플이 아니더라도 업데이트 시켜달라며 매일을 귀찮게 굴던 어플들의 알림메세지 하나가 없다.
어제 나와 그 사이에도 태풍이 한차례 몰아쳤었다. 나로부터 시작된 감정의 소용돌이는 쓰나미와 같은 거센 감정의 파도를 일으켜 나와 그, 둘 다를 침수시켰다. 아니 사실 침수는 나만 됐을 수도. 그의 마음 속 두터운 벽이 넘실거리는 내 감정으로부터 굳건히 지켜줄 만큼 쌓여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확실한건 나는, 잠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잠겨있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요구가 집착이라고 말했다. 난 단지 '선 상황 후 통보'가 아닌 '선 통보 후 상황'이길 바란 것 뿐인데. 이게 집착이라면 저 사람은 왜 연애를 하려했을까 싶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친다. 나에 대해 흥미가 떨어진건가. 어디서 안좋은 소문을 들었나. 내게서 정 떨어질만한 무언가를 본건가. 아니면 외로운 타지생활 중에 심심할 때 언제든 불러낼 여자가 필요했던건가. 정말 웃기게도 그렇게 좋아한다던 돼지고기를 공짜로 얻어먹고싶어서 만난건데 한번도 안먹여준건가 싶은 생각까지 든다. 그 이유가 뭐든 이 남자가 내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란게 명확해진다면, 더이상의 미련은 없다. 미련둘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이길 바라는 희망사항은 아직, 있다.
여자의 서운함을 남자는 이해심 부족이라 말하고 여자는 애정의 식음이라 말한다. 이 남자 역시 나의 이해심 부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애정의 식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여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거부하는게 아니라, 식을만한 시간이나 있었어야지. 그럼에도 애정이 식은거라면, 그런 남자에게 마음이 더 깊어지기전에 빨리 그만두게 된거니까, 아쉽지도 않다.
참으로 고요하고 또 고요한 밤이다. 식당에는 손님이 없어 고요하고, 입닫고 고요히 글만 쓰고있는 나와 하루종일 울리지않는 고요한 핸드폰이 지키는 내 방도, 참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