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과 강유의 군재를 낮게 보는 이유는 다름아닌 북벌이었습니다.
전쟁이라는것은 인적 물적으로 부담을 안게되는데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인 익주를 안고 무리한 북벌을 감행하였냐 라는 주장이죠.
예전부터 삼도와 삼갤에서 활동해왔지만 저보다 정리와 글을 더 잘쓰신 분들이 많아 이렇게 펌해왔습니다.
저역시 뉴비시절에는 자오곡 행을 택하지않는 제갈량의 군재를 의심하였으며 1차북벌과 3차 북벌의 아쉬움을 제갈량의 덕탓이라고 치부해왔지만 많은 분들의 토론끝에 제갈량의 북벌은 최상의 선택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저는 촉에서 북벌이라는게 꼭 필요했을것이라 판단되었습니다.
위와 촉의 국력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심해질수밖에 없습니다. 익주라는 땅은 타지역에 비해 피해가 적고 풍요롭다고 하나 익주라는 지역의 한계점은 분명하며 중원은 한세대가 거치며 눈에 보이는 회복을 보여줍니다.
선제 유비의 인재라인역시 외부인재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게되는데 이 인재라인까지 익주라인으로 자연스로 옮겨지는데 이는 촉한의 멸망당시의 위의 인재들과 너무 극심히 비교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북벌당시의 인재들인 용장 위연역시 익주출신이 아니었으며 왕평은 익주출신이지만 항장이었고 강유도 항장 출신이었습니다. 요화 마대 마속 제갈량 자기자신도 익주 출신이 아니었고 내정을 위해 남겨둔 장완과 비의까지도 형주출신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촉의 3인자 이엄역시 익주에서 등용을하였지만 형주출신으로 외부인재의 유입이 큰비중을 차지하고있던만큼이나 익주라는 땅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봅니다.
가장중요한 북벌을 하지않으면 명분이라는것을 잃게됩니다.
촉한이라 한나라를 계승하는데 멸위흥한을 목표로하는 촉나라에서는 국가를 하나로 묶고 이들에게는 북벌은 국가의 존립자체의 가장 기본적 가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 글은 삼도에서 대대로님의 글을 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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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북벌에 대한 평가는 2가지로 요약된다. 제갈량 북벌을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그 이면에 공격에 의한 방위, 즉 이공위수(以攻爲守: 공격이 최고의 방어)를 통한 실리를 추구한 행위'로 평가하는 것과, "매년 군대를 움직였으면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임기응변의 지략이 그의 장점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는 진수의 평대로 북벌의 실패 요인을 제갈량 개인의 능력 부족에서 찾은 평가이다. 즉 제갈량이 북벌의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이를 감행한 것은 쇠퇴해 가는 촉의 국운을 살리기 위한 전략적 목표가 담겨 있는 것이므로 제갈량 북벌을 실리를 우선시한 효용론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또한 오나라의 장엄이 지은 묵기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당시 약국인 촉은 방위에 더욱 전념해야 함에도 무모하게 군대를 동원시켜 쓸데없이 국력을 낭비시킨 제갈량을 그리 뛰어난 인물로 볼 수 없다며 그를 혹독히 비판하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제갈량의 실패는 물론 개인의 능력 부족도 있겠지만 의도된 실패였다. 즉 촉의 실리 추구를 위하여 질 것을 미리 계산하고 이를 감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제갈량 북벌에 대한 평가에 무게를 두고 글을 써내려 가고자 한다.
제갈량이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부여되었고, 무엇보다 한 왕실의 부흥과 선주의 유언을 받들어 촉이 건국될 때까지 이어져 온 대의명분을 실행시켜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촉이 백성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그 존망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북벌을 거의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촉의 경제상황은 이릉 전투에서 패하여 궁핍한 상황이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제갈량은 남중 원정을 떠난다. 제갈량은 북쪽에서 위나라의 압박이 거세지고 동으로는 촉의 틈새를 노리고 있는 오의 형세 가운데 촉의 운명이 다하고 있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갈량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촉의 국력 회복이었다. 그러나 촉이 국내에서 경제를 회복시켜 줄 만한 시간적 여유를 위와 오가 줄리 만무했다. 촉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절박하게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남중 원정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남중에서 제갈량의 활약으로 촉의 국력은 어느 정도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은 이에 힘입어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던지고 6차례에 걸친 북벌에 나선다. 첫 출병은 순탄하게 이루어졌으나 제갈량 용인술의 실패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실수로 촉 군은 퇴각한다. 이 실수는 바로 마속이다. 어떤 이는 마속이 이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촉이 위를 점령할 수 있었지 않으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제갈량의 북벌은 기울어져 가는 촉의 국력을 살리기 위한 방어를 위한 공격이었다. 결코 위를 치는 과정이 아니었다. 이러한 북벌을 통해 촉이 얻은 성과는 농서 일대의 땅을 차츰 점령해 나갔고 망국의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 이에 따라 민심도 상승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제갈량이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정신적 효과였다. 북벌로 인해 촉 한의 단결력을 꾀하였던 것이다.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와 같이 북벌로 인해 무너지는 촉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어찌 보면 북벌의 실패는 매우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촉은 내정이 무척이나 불안한 상태였고, 오나 특히 위에 경우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소국이었다. 계속되는 북벌로 인해 국가 재정은 파탄 지경의 상태였지만 북벌을 통해 조정에서 제갈량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 졌을 것이며, 또한 단결력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제갈량은 어떤 것이 기울어지는 촉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빠르게 파악하여 미리 결과까지도 계산해낸 것이다. 당시의 정세로 미루어 볼 때 제갈량의 북벌은 촉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이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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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대전 이후 불안정한 촉의 상황에서 유비가 죽자 위에서는 항복서신까지 보냅니다. 223년 사도 화흠, 사공 왕랑, 상서령 진군, 태사량 허지, 알자복야 제갈장의 이름으로 보냈지요. 이는 이릉대전이후 촉의 상황을 대변해주는 모습이라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남중을 정벌 하고 내정에 힘을 쏟아 오히려 이릉전 이후의 국력으로 회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227년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한중에 들어오자 위의 황제는 조예는 정촉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산기상시인 손자(孫資)는 '촉과 오를 치기에는 지형이 험하고 전쟁을 하자면 많은 자원이 소모가 되는데 이보다는 편히 쉬면 중국은 강해지고 오랑캐들은 위축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간언을 합니다. 그래서 조예는 전쟁을 중지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1년후 228년 제갈량이 출병을 하게되지요. 이 때에 <자치통감>과 <촉서 : 제갈량전> 중 주석인 <위략>에 의하면 유비가 죽고난 후에는 방비가 없었는데 갑자기 제갈량이 출동하니 조야가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위에서는 유비까지 죽었으니 촉은 쇠퇴해질 것이라 예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산기상시 손자의 전략도 그렇고, 좀 더 앞으로 가면 가후의 전략도 그렇지만, 위에서 전쟁을 하지 않아 편히 쉰다는 전략에는 한가지 전제가 붙어야 합니다. 촉과 오가 쳐들어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도 소요 정도가 아니라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갈량은 위의 전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먼저 공격을 한거죠. 물론 제갈량, 더 나아가 촉한의 북벌 목표는 멸위흥한입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위를 멸하기 위해 북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번째 목표는 옹양주를 점령하여 국력을 신장시키는 것이고요. 1차 북벌의 시작이고 위의 허점을 노린 북벌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위태하던 촉의 경제및 군사력을 회복하였으며 또한 북벌이라는 이름아래 촉을 하나로 묶을수있는 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삼도의 포증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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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북벌은 총 5차례가 있었습니다. 228년 봄, 228년 겨울, 229년, 231년, 234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조진이 쳐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230년의 일인데, 이 때에 조진의 정촉 명분은 '촉이 연이어 쳐들어왔으므로 공격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위의 첫번째 정촉은 제갈량 스스로가 불러들인 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진의 정촉의 이유였던 제갈량의 1, 2차 북벌은 공교롭게도 '촉한이 안쳐들어갔으면 위도 안쳐들어왔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꼴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조진의 정촉은 사실상 제갈량의 두차례의 실패에 기인한 탓이 큽니다. 그러니까 가정, 진창에서의 패배로 인해 조진은 촉한을 정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진군의 조언을 참고한 조예가 조진에게 사실상 유보하겠다는 조서를 내렸지만 오히려 이에 근거하여 정벌을 감행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촉한이 승기를 잡기 시작한 경우라면, 위로써는 거기에 끌려다닐 수도 있다는 유추가 가능하게 됩니다.
제갈량은 231년에 기산으로 출병했을 당시 사마의와의 노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진서 : 선제기>에서는 사마의가 승리를 거뒀다고 되어있지만 <제갈량전>의 주석인 <한진춘추>에서는 제갈량이 승리를 거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자치통감>에서도 <한진춘추>를 인용하였습니다. 더욱이 만약 사마의가 승리를 거뒀다면 승기를 잡고 제갈량을 압박했을텐데 그 후 시종일관 수비만 했다는 점에서도 사마의가 승리했다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위는 촉한에게 적극적인 공세가 아닌 수비로만 대처했고, 이에 따라 제갈량은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엄의 그릇된 행동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위가 공세로 나오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마의는 노성 전투에서 패배했고, 장합은 목문까지 갔다가 전사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위는 과거에는 촉한을 얕잡아봤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234년,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었던 오장원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갈량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이에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동서고금 통틀어서 국경을 넘어가서 오래 주둔할 기초를 만들고 더욱이 적국의 백성들과 편안히 지낸 예는 드뭅니다.
1편에서도 말했듯이 제갈량의 북벌 목표는 멸위흥한입니다. 제갈량이 위를 쳐들어간 이유는 이공위수, 즉 수비를 위해 공격을 감행한다는 적극적인 수비전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이 국면을 주도하면서부터는 이공위수라는 효과까지 거두었던 셈입니다.
제갈량의 적극적인 북벌이 위의 공세를 저지하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제갈량이 북벌을 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라가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내적으로도 그렇고, 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일치단결할 명분이 있어야 응집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위를 멸해야 한다면서 수비로만 일관한다면 점점 방만해지다가 일찍 쇠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는 촉한 자체가 증명합니다. 제갈량이 적극적으로 북벌을 했을 때에는 나라가 일치단결하였으나 그가 죽고 북벌을 하자는 의지가 줄어들게 되자 쇠퇴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리하여 일어난 것이 조상의 정촉이었습니다.
조상의 정촉은 243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상이 정촉을 하려고 한 이유는 '위엄있는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대외정벌을 하게 되는 이유는 네 가지 정도가 있을겁니다.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기 위해서, 힘이 남아돌아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공적을 드높히기 위해서,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어서입니다. 이 중에서 조상의 정촉은 세번째에, 사마소의 정촉은 첫번째와 세번째 정도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공적을 드높히고자 한다 하더라도 국내가 불안하거나 힘이 부족하면 정벌을 감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243년 조상의 정벌은 나름 적기였던 셈입니다.
제갈량이 234년에 죽은 후 촉한은 안정화를 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장완을 대장군으로 삼아 재상으로 세우고 그를 중심으로 정치구도를 재편시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북벌을 하지는 못했고, 강유가 여러 차례 침범했다고는 하나 이는 무력시위 정도였을 것입니다. 오에서 241년에 여러 갈래로 위를 쳐들어가긴 했으나 이렇다한 교전 없이 후퇴하였으니 위의 국력은 점점 쌓여져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243년의 조상의 정촉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촉한이 북벌을 안했다면 위에서도 국력이 쌓일 수밖에 없고, 이에 243년 조상의 정촉이 일어났으므로, 만약 제갈량이 북벌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명분의 정촉 역시 더 일찍 발생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사마의의 거사가 성공한 후 하후패가 249년에 촉한으로 투항하자, 강유는 하후패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사마의가 이미 저들의 정권을 잡았으니, 당연히 다시 정벌할 뜻을 가졌겠지요?" 이런 질문의 전제는 제가 대외정벌의 이유로 제시한 네가지 이유 중 첫번째와 세번째 정도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촉한이 수비로 일관했다 하더라도 사마씨가 내부가 안정이 되면 촉한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것입니다.
조진의 정촉은 촉한이 공격했기 때문에 시도되었던 것이지만, 조상의 정촉은 촉한이 공격하지 않아도 시도되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마소의 정촉 역시 촉한이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가지 않아 국면을 주도하지 않았기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역사의 흐름이 증명해주는데 '촉한이 공격하지 않았으면 위도 공격하지 않았다'라거나 더 나아가 '촉한이 공격하지 않았으면 멸망을 늦췄을 것이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다소 미흡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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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의 북벌은 결과적으로보면 실패로 끝이납니다.
하지만 북벌의 과정을 되짚어보자면 1차 북벌과 3차북벌의 병크가 상당히 큰비중을 차지하게되는데 1차북벌에서는 제갈량의 인용술이 까였으며 3차 북벌역시 제갈량의 인용술이 다시한번 까였습니다.
또한 북벌이 실패했다고해서 국지전에서 패배가 아닙니다. 더구나 3국정립 이후 위의 땅을 빼앗은 전적이 있는건 제갈량이 유일무이 합니다. 음평과 무도를 얻어냈지요.
전쟁에서 가장위험한 작전이 어떤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회군 퇴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갈량이 회군할때 피해를 최소화하였습니다. 5번의 북벌후 회군의 피해는 미미하였습니다.
오히려 왕쌍을 격퇴하고 장합이라는 촉전 에이스를 참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더 자세히 군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1차에서 5차까지의 북벌을 이야기해야하는데 이미 역게에서 한번 나왔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제갈량의 북벌이 실패하고 이는 촉을 멸망의 길로 가게하였으며 촉을 방어를 하며 인재양성에 힘을 쏟아야 했다'
라는 식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