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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걷는 길
게시물ID : panic_898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낭비_
추천 : 22
조회수 : 2238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6/08/07 23: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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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 신님, 잠시 쉬었다가면 어떨까요?

나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어느 방향이 정확한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두리번대며, 단어 하나씩 사방에 뿌리는 형국이었다. 

기실 목소리는 공기 중 울림이라기보다
관자놀이를 때리는 옅은 두통처럼 전해졌다.

앞으로, 곧바로, 직진. 

내 갈 길을 알려주곤 있었지만
일자로 쭉 뻗은 평지인지라
있으나 마나 한 가이드였다.

- 안 돼. 이제 정면으로 쭉 가.

- 언제까지 걸어야 할까요?

- 자리가 나올 때 까지.

지난 번 물었을 때와 같은 대답.

지나 온 길을 문득 돌아보니
지나치게 선명하고 곧은 길이 뒤로 누웠다.

같은 물음을 수천 번 던진 듯 했고
같은 걸음을 수만 번 디뎌왔던 것 같다.
바튼 폭으로 수십년 째 한 길을 가고 있었지만
확신 할 순 없었다. 
시간도 길처럼 가늠할 수 없는 길이로 흐르는 공간이었다.

길은 지하철 내부 폭 정도 되었다.
풍경은 없다.
길과 가는 색 농도로 구분지어졌다.
걷는 길은 연탄처럼 새카맣고
길가는 연탄재처럼 쟂빛이다.

반듯한 길 따른 올곧은 길가에는
사람 모양 픽토그램 같은 흙인형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웅크려 앉아있다.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목이 마르지도 숨이 차지도 않았다.

그러함보다 아니한 것으로 가득찬 순례길.
후회도 회한도 기쁨이나 설렘도 없었다.

모든 감정이 까만 물감에 녹아 든
다른 색들처럼 특징을 잃어갔다.
그나마 지루하다는 감정이 온전했다.

지루해서 지루한데
그래도 지루함은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지루했다.

그래서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살아온 날들 따위를.
그 날들이 곧게 뻗은 길과 선명한 시야처럼
맑고 분명하게 눈 앞에 그려졌다.
심지어 어머니 양수 속 웅크렸던 순간까지!

지루함이 지겨워서
하루 씩 날들을 기억하며 걸어왔다.
분명 살아왔을 날들인데 모든 순간이 새로웠다.

무엇보다,
내게 웃는 날들이 이토록 많았던가?
사소한 일로 자주 웃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어제 먹다 남은 식은 치킨 조각 하나를 떠올리며
헤벌쭉거리기도 했다.

별 것 아닌,
먼지 한 톨 만한 작은 순간들이
내게 행복을 주었다.

그러나 웃음은 알콜처럼 순간에 증발했다.

뭐 하나 짜증나는 일이 벌어지면
그간 웃어온 나날들이 단번에 메말랐다.
화를 가슴에 담고 자책으로 발목을 묶었다.

그렇게 내 삶은  나를 묵직하게 밟아가는 과정이었다.

마침내 주위에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게되었을 때,
난 세상 모두를 원망했다.

분노는 이윽고 세상 모든것에 깃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분노의 나날에도,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죽음을 향해
하루씩 살아가던 날들에도,
하루 한 번은 꼭 행복했다.
아주 잠깐, 3초정도라도.
 
홀로 차가운 소주 첫잔을 들이켜곤
그 짜릿함에  찡긋하며 미소 짓는 그런.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은 후
내용물을 버리고 포장을 손에 들고 있던 순간에도
제가 한 짓이 허탈하고 어이가 없어 옅게 웃었다.  

우울과 실패 의식이 정신을 잠식하는 동안에도
의외로 짬짬이 웃곤 했던거다.

삶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웃었다는 사실을 즉시 잊어서
웃음 자체가 없던 것처럼 여겨졌을 뿐.
   
끝까지 내 손을 부여잡고 눈물 흘리던 엄마와
나를 꼬옥 안아주며 당신을 믿는다던 아내와
고사리 손으로 내 어깨를 주무르며 아빠 힘내라던 아들과
내 실패의 순간마다 말 없이 소주잔을 채워주던 아버지와
큰 돈은 못 해줘도 너 술 한잔은 얼마든지 사준다던 세용이.

끝내 날 원망하지 않던 모두와
모두에 대한 추억이 깃든 많은 날.
망치 모루에 얻어맞은 듯
내게도 행복이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던 사람은
오로지 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지난 삶의 마지막 하루가 기억 위로 떠올랐다.

마침내 길이 끝나, 작은 문 앞이었다.

신이 말했다.

- 다 왔어.

내가 물었다.

- 이건 지옥으로 가는 문인가요?

- 아니, 곧바로 가. 

- 생전에 당신을 믿을 걸 그랬나봐요.
   진짜 신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 거기 있던 것들은 아무 소용 없는거야.
  나는 어차피 너한테만 있어.

- 나한테만? 

- 그래, 너한테만.
  세상에 신 한명이 모든 인류를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그게 다 몇 명인데....
  게다가 동물들에게도 영혼이 있어.
  물론 식물과 대지와 대기에도,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에 영혼이 있어. 
  신은 이 모든 것들 하나마다에 나누어 존재해.
  외부에서 우주를 총괄하는 현장소장같은게 아니란거야.

- 제 안에 신이 있다구요? 있었다구요?
  그럼 당신은 왜 날 그처럼 살게 내버려 두었나요?
  왜 내가 가족들 앞에서 목숨을 끊도록... 

신이 내 말을 잘라먹으며 들어왔다.

- 네가 외면했잖아.
  수없이 외쳐도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어.
  나 뿐이 아니지. 자, 뒤를 봐.
  네가 죽인 수 많은 네가 저렇게 많잖아.
  저건 각각의 감정이야.
  네가 살아온 매일마다 죽어간 너야.
  인류는 참 어리석어.
  자기 안에 신이 있음에도 엉뚱한 데 기도를 하니...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들으면
  거기 신이 있는데...
  나는 수없이 널 불렀고, 널 도우려 했지만
  넌 거부했잖아.

황당한 신의 다그침에 나는 반발심이 들었다.

- 당신이 언제... 당신은 그런 적 없어요! 

- 이젠 당신이라고 부르네.
  뭐라고 부르던지 별 상관은 없지만 말야.
  근데, 인류가 날 뭐라고 부르는 줄은 알아?

- 하나님? 알라? 아니지.
  당신 말 대로라면 각자마다 다르겠죠.

관자놀이를 때리던 통증이 사라지고
대신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오며
목소리가 내 안에서부터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 양심.

신의 답과 함께 길가에 늘어서 있던 흙인형들,
그러니까 나의 나날들이
일억량의 지하철처럼 내게 달려왔다.

그것들은 줄줄이 내 입을 파고들었다.
정확히 짚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것들 하나를 삼킬 때마다
미묘하게 다른 감정들이 전신을 스쳤다.

이를테면, 새끼발까락 사이를 모기에 물려 부풀어오른 상처 부위가 잘 긁히지 않아 짜증이 끝까지 오르지만 젓가락을 얼음에 담구었다 뺀 후 발가락 사이에 끼워 부풀어오른 부위를 꾹꾹 누를 때 느껴지는 해방감과 행복한 웃음,

같은 복잡하고도 섬세한 감정들.

이내 감정들이 내 안에서
한 두개로 단순하게 뭉쳐지는 느낌이 왔다.
머리가 맑아지며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 문 너머엔 뭐가 있나요? 

가슴을 포근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내가 답했다.

- 다시, 널 사랑해 줄 사람들. 




*** 


 "응애! 응애!"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리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의사와 간호사,
주마등 앞에서 힘을 주던 엄마와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던 아빠까지. 

아이는 탄생을 자축하듯
온 힘으로 세차게 울었다.

의사가 아이 아빠에게 가위를 쥐어 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탯줄을 자르는 아빠 눈에
온갖 감정이 농축된 눈물이 고였다. 

아기는 울음이 울음을 부르는 것처럼 울어제끼다가,
제 어미 품에 처음 안기는 순간,
그야말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잠깐의 몇 초,
엄마 눈을 처음 마주치고는

생긋 웃어보였다.                             
출처 https://brunch.co.kr/@nang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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