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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쌍둥이 간의 교감에 관한 신비한 이야기가 많다. 어릴 적 해어져서 완전히 남남으로 지내 왔던 쌍둥이가 성장 후 다시 만났더니 서로 비슷한 직업, 비슷한 스타일의 아내를 얻어 비슷한 인생경로를 살아왔다는 이야기.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감정이나 통증 등을 공유 한다는 이야기. 쌍둥이의 교감. 쌍둥이의 텔레파시.
헛소리다.
이 세상에 같은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닮은 인간 또한 있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유니크 하다. 그것이 쌍둥이라 해도 변함없다. 그저 동일한 유전자 구조를 나눠가졌을 뿐이지 나와 형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두루뭉술한 휠체어에 앉아 쓸쓸한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고 있는 형과, 아침마다 썩은 생선의 눈을 하고 만원전철에서 반쯤 졸고 있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금요일 출근길. 오늘은 제발 야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일찍 퇴근한다고 해서 내가 어디 나갈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캔맥주 2개와 함께 다운 받아둔 영화나 한편 보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 세상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일 수 있다.
어랏! 내 등짝을 누군가의 커다란 백팩이 둔중하게 밀어대자 내 몸이 좀 더 앞의 사람들 틈으로 밀려들어갔고, 그 때부터 내 허벅지에 눌리는, 다른 사람의 둥그런 살덩어리가 느껴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여자의 엉덩이다.
럭키! 해피! 따위를 느낄 수 없다. 수많은 여혐종자들이 인터넷에 싸질러 놓은 꽃뱀들의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던 나는 겁부터 집어먹었다.
‘치한이야!’라고 여자가 소리 지른다. 주변사람들이 쓰레기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경찰에게 끌려간다.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소용없고 거액의 합의금을 내야하고 당연히 직장에서 쫒겨나 편의점 알바로 연명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당황한 나는 내 앞의 여자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오히려 내 하반신을 그녀의 몸에 더욱 농밀하게 비벼대는 결과만 나았다. 끝장이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자의 비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두 정거장 후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환승역에 도착 할 때 까지는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환승역에서 전철 문이 열리고, 구멍 뚫린 물풍선의 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혼잡함에 휘말린 나는 그녀의 모습을 놓쳤다.
미묘한 흥분감과 찝찝함 속에 사무실 문을 열고 출근 했다. 오늘 뭔가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복권이라도 살까?
하지만 전철에서의 그 일은 좋은 일의 징조가 아니었다. 거의 뛰어나가듯이 전철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과 옷차림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사무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철의 그녀는 차대리였다. 내가 짝사랑하고 있던 차대리 말이다. 어떻게 그녀의 뒷모습을 내가 못 알아볼 수 있었지?
그날 6시 반에 부장이, 7시에 과장이 7시 반에 주임이 모두 퇴근 했다. 대리 이하 평사원들도 모두 8시 전에 퇴근 할 수 있던 기적의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날 차대리는 나와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금요일의 향락은 캔맥주 2개와 영화 한편. 1년 전부터 지켜오던 나의 유일한 쾌락이다. 하지만 이날은 맥주 1.6리터가 들어있는 커다란 갈색 맥주병을 들고 귀가 했다. 뜻밖의 탈선에 형이 조금 놀란 듯 싶었다.
“너무 과음하는 거 아니야? 위험하지는 않을까?”
“가끔 이런 날도 있는 거야. 너무 참견하지 말아 줘.”
“누가 네 걱정 한데.”
“죽지 않을 만큼만 마실 테니까 잔소리 그만해.”
“알았다. 뭐 맥주 1500정도는 버티겠지. 그거 1600인가? 뭐 좋아. 그보다 빨리 바꾸자.”
최근 1년 동안 매주 금요일. 혹은 토요일에 이어오던 육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1년이나 계속되는 일이지만, 5~6일 동안 건강하게 걸어 다니다가 갑자기 다리의 감각이 사라지는 이 불쾌한 감각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단지 손만 익숙한 감각으로 TV와 PC의 전원을 켠다. 최신CPU와 RAM이 장착된 PC도, 그 PC와 연결된 50인치 LED TV도. 5.1채널 홈씨어터도, 막 배달된 따끈따끈한 후라이드치킨도 모두 형의 돈으로 산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내 것은 갈색 맥주병과 형의 정신이 들어가 욕실에서 샤워하고 있는 내 몸뚱아리 뿐이다.
휠체어 위에 내팽개쳐진 몸으로 오늘의 치맥과 함께 할 영화를 고르고 있는 중 형이, 그러니까 내 몸이 욕실에서 나왔다.
“아 시원하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이 감각이 진짜 죽인다니까. 그런데 너 배가 조금 나오기 시작 한 거 같다. 운동 좀 해. 피트니스 끊어줄까?”
“내가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어. 그렇게 걱정이 되면 형이 내 몸 가지고 운동 좀 하지.”
“나야 말로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냐? 고작 일주일에 하루만 이 몸을 쓰는 건데. 술 마시고 여자 만날 시간도 빠듯해. 뭐 알았어. 그럼 난 나간다. 그렇지 않아도 연약한 내 몸 너무 술에 혹사시키지 말아줘. 그럼 내일 봐.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는 형의 뒷모습에는 원래 그 몸뚱아리가 내 것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흥겹고 경쾌한 건강함이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근사한 여자와 질펀한 밤을 보낼 것인가. 사실 부러웠다.
형과 나의 외모는 간혹 부모님 조차 혼동할 정도로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우리 형제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쌍둥이라더니 누가 누군지 모를 만큼 똑같네.”
그렇지 않다. 형과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형은 친구가 많았다. 여자도 많았다. 재능도 많았다. 머리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듣보잡 지방 사립대에서 졸업학점을 겨우겨우 이수하고 있을 때 형은 최고의 명문대를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고 있었다.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보험금을 형과 반으로 나누었을 때 우리는 그 돈을 밑천으로 똑같은 도박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돈을 모두 카지노에서 날렸고, 형은 선물거래니 공매니 FX니 하는 다른 성질의 도박에서 크게 한탕하여 수백억의 재산을 모았다.
그 후 거의 1년 동안 도박빚과 사채빚에 시달리던 내가 자살을 결심하고 밧줄에 올가미 매듭을 짓고 있을 때,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앉은 형이 찾아 왔다.
“그러니까 내 몸을 달라고?”
“증여가 아니라 대여. 일주일에 하루만 빌려 주면 돼. 그러면 네 빚을 모두 갚아주고 살 집에 직장 까지 알아봐 줄게. 어때?”
영화는 아직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맥주병은 벌써 다 비어 버렸다. 맥주의 이뇨작용 때문인지 요도에 삽관된 관을 통해 끊임없이 소변이 배출되고 있다. 아침에 가정부가 오기 전에 소변팩이 넘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하긴, 이따위 몸이라면 동생의 몸이라도 빌려서 놀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부모님도 헛갈리던 쌍둥이니 위화감도 없고 안성맞춤 아닌가?
형은 오늘밤 또 어떤 끝내주는 여자와 황홀한 밤을 보내고 있을까? 쌍둥이의 교감이 실제로 있다면 나도 그 파편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다. 형과 계약을 체결한 이후 나는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형은 계약을 충실히 지켰다. 자신의 오피스텔의 방 하나를 비워 내가 살 수 있게 해줬고, 직장도 잡아 줬다. 그리고 내 빚을 10년 상환으로 갚아주고 있다. 이 상환이 끝날 때 까지 나는 일주일에 하루는 형에게 몸을 빌려줘야 한다. 뭐 나쁘지는 않지만, 형이 알선해준 직장이 야근이 조금 많은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돈 모아야지. 야근 수당이 이렇게 착실하게 나오는 곳 흔하지 않다. 조금만 나가보면 노동법을 똥으로 취급하는 사장들이 부지기수야. 수당도 없이 일만 시키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형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안다. 직업도 없이 빚에 시달리는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 줄도 잘 알기 때문에 함부로 형의 말을 어기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청춘이 여자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외모 때문이 아니다. 내 옷과 내 몸뚱이를 걸치고 나간 형은 별다른 노력이나 돈의 사용도 없이 매번 잘도 여자를 유혹하여 놀고 있다. 결국 내 탓이라는 것이다.
형은 이 지경이 되어도 즐겁고 행복한데, 나는 멀쩡한 몸을 가지고도 항상 불행 하다.
“빌어먹을!”
고함과 함께 맥주병을 집어 던졌다. 취중이었지만 유리병이었다면 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에 날아가든 별다른 데미지를 주지 못할 플라스틱 병이었기에 마음 놓고 던진 것이다. 집어던진 맥주병이 형이 사용하는 서랍에 맞았다. 그런데 서랍의 문이 열린다.
어라? 서랍은 미닫이 아닌가? 왜 여닫이처럼 열리는 거지?
그 안은 금고가 있는 비밀장소였다. 비밀번호와 지문으로 문을 열 수 있는 금고였다. 지금은 당연히 형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는 나는 별 고생 없이 금고문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거창하게도 우리의 생일 이었다. 더욱 거창한 것은 금고의 내용물이었다. 나는 무슨 금괴나 달러뭉치가 숨겨진 금고 인가 했다. 하지만 그 단단한 금고 안에 보관된 물건은 100원 짜리 노란 서류봉투와 봉투 안의 A4규격의 종이 한 장이다.
그러나 그 A4지에 적혀있는 법원 공증 까지 받은 내용은 조금 허탈해 지려는 내가 기겁을 할 만한 내용이었다.
‘본인의 사망 후 모든 재산은 쌍둥이 동생에게 전부 상속한다.’
뭔가 어려운 단어와 복잡한 문장들이 더 많이 있었지만 핵심 내용은 이것이다. 즉 이 종이는 형의 유언장이었다. 형의 막대한 재산을 모두 나에게 남긴다는 유언장.
울었다. 평생 형과 비교되는 자신을 원망하고 형을 원망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은 나를 갉아먹는 역귀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은 내 형이었다. 유일한 혈육.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하면서 나를 향한 형의 사랑으로 뜨겁게 울었다.
하지만 그 용광로처럼 뜨거웠던 눈물이 근세 새파랗게 얼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토요일 저녁. 곧 있으면 형과 몸을 교환한지 24시간이 지난다. 한 번 몸을 교환하면 24시간 후 강제로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게 된다. 처음에는 형이 나의 몸을 훔치려는 것이라는 의심도 했지만 이 규칙은 절대적인 것이라서 다른 사람의 몸에 24시간 이상 있을 수 없다. 역으로 조금 귀찮은 규칙도 있는데, 한 번 바꾼 몸은 24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원래 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한동안은 술과 여자로 진탕 놀아난 형이 24시간이 넘도록 제정신을 차리지 못해 내가 상당한 고초를 겪은 적이 있다. 24시간이 지나 강제로 몸이 교체 되었는데 호텔 침대에서 생면부지의 여자와 발가벗고 누워있던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다. 여자와 평범한 대화도 하지 못하는 내가 침대 위에서 나누는 대화의 방법을 알 리 없다.
극도로 당황한 내가 갑자기 어버버 거리며 횡설수설하면 대부분의 여자는 나를 정신병자로 여기고 불쾌하게 달아나거나, 원나잇한 여자를 때어내는 더러운 방법을 사용한다며 귓방망이를 날리기도 한다. 심지어 어제의 당당한 그 형이 사리지고 찌질한 찌꺼기 동생이 남아있는 것에 분노한 여자가 성폭행으로 경찰을 부른 일도 있었다.
그 성폭행 신고 이후 형은 가능한 24시간 안에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나는 형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형이 돌아오면 나에 대한 형의 관심과 사랑에 내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형을 사랑하고 미안한지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형이 돌아오지 않는다.
24시간이 되기 30초 전. 이거 텃네. 이번에는 어떤 여자 옆에서 깨어날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낫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번에는 그 여자 알몸이나 천천히 감상해야 겠다 라고 생각한 순간 몸이 바뀌었다. 머리가 아프다. 속이 울렁거린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화장실? 화장실이 어디야? 정신없는 겨를에 슬쩍 훑어봐도 상당히 고급스런 호텔이다. 아! 전에 온 적 있다. 졸지에 강간범이 될 뻔한 그 호텔이다. 화장실이 아마 저기 였지.
다행히 늦지 않게 화장실 변기를 잡을 수 있었다. 시원하게 구토하니 조금 정신이 돌아온다. 쭈뼛거리며 침대로 돌아왔다. 핸드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몸이 바뀌기 전에는 여자의 알몸이라도 천천히 감상해 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둘 다 옷을 입고 있다. 그 이전에 나는 내가 입어야 하는 바지위에 여자의 브래지어가 있는 것만 보고 숨이 막히던 얼간이였다.
침대위의 여자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핸드폰을 들었다. 여자를 깨워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까?
안녕히 계세요. 저 먼저 갑니다.
헛소리. 나는 그런 소리 절대 못한다. 왜냐 하면 무섭기 때문이다. 내가 달아날 때 까지 여자가 깨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저쪽에서 정신을 차린 형이 나에게 전화 했다.
“아. 머리야! 지금 몇 시예요?”
여자가 깨어났다. 나는 얼어붙었다. 단지 여자가 깨어나서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그 여자는 최대리였다.
※
동생 녀석은 내가 동생과 몸을 바꾸자마자 술 퍼마시고 오입하러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이 나를 그따위로 생각한다니 조금 슬프다. 내가 동생과 몸을 바꾼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걷는 일이다. 한쪽 발을 들어 앞으로 뻗어 내딛을 때 까지 다른 발이 균형을 유지하는 일. 구두 밑창에 깔린 아스파트가 규칙적으로 퉁퉁거리는 소리를 내는 일. 계단에 발을 올리고 허벅지에 힘을 주어 몸을 올리는 일. 한참 걷다가 짝다리를 집고 비스듬히 서있는 일. 이런 모든 일들이 좋다.
그 24시간 동안 나는 잠도 자지 않는다. 가능한 앉거나 누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서있거나 걷거나 뛴다. 주말 아침 조기축구회가 뛰어다니는 학교 운동장에 허락도 없이 뛰어든다. 다리로 하는 모든 것이 좋다.
물론 술과 여자를 즐기기도 한다. 난 아직 젊은 남자다.
오늘은 유흥보다는 걷는다. 동생은 앞으로 8년은 더 매주 나에게 몸을 빌려줘야 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몸을 교환하는 것이다. 내 원래 몸은 앞으로 이틀 후 죽는다. 내 몸을 뒤 덮은 암세포를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최신의료기기는 내 남은 수명을 시간 단위까지 측정해 준다. 다행이다. 덕분에 나는 마지막으로 동생의 몸을 빌려 걷기를 즐기고 동생이 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일반인들도 총맞을 걱정없이 24시간 음주가무를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다. 덕분에 몇 시간이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 유흥가를 걸어 다녔다. 갈증이 난다. 편의점에서 물을 한 병 사서 홀짝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눈앞에서 여자 세 명이 뭉개져서 걷고 있다. 자세히 보니 인사불성으로 취한 한명의 여자를 두 명의 여자가 부축하느라고 악전고투하고 있는 중이다. 피식 웃으며 그 여자들을 지나쳐 가려는 찰나 인사불성 여자가 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야! 이, 나쁜 새끼야!”
싸다구가 날아온다. 뭐지? 뭐야? 미친 여자인가 싶었는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인사불성은 내 동생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며 나에게 손바닥을 날리고 있었다.
“나한테 왜 그래. 하지마! 무섭단 말이야. 하지마!”
술은 한모금도 안마셨지만 내가 인사불성이 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노력했다. 근처 커피숍에서 새 여자와 마주 앉은 나는 그 여자들의 말을 필사적으로 조합했다.
결국 밝혀진 내용은 차대리 라는 그 인사불성은 내 동생의 직장 동료이고 나머지 두 여성은 그녀의 친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날 아침 인사불성은 만원전철에서 내 동생에게 무려 성추행을 당했고,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아무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던 것이 취중에 나를 만나 폭발했다는 것이다. 야! 이 자식아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나는 일단 무조건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 미안합니다. 사고였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너무 그렇게 울지 마요 예쁜 얼굴 망가져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차대리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친구들의 눈빛은 더욱 험악하게 변하고 있었다. 동생의 몸을 빌린 최후이자 최악의 24시간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최악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좋아한다구요.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래요. 무서워요. 하지 마요. 상냥하게 대해줘요. 좋아해 줘요. 부드럽게 안아줘요. 계속 좋아했어요. 안아줘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차대리가 내손을, 그러니까 동생의 손을 붙잡고 얼굴을 비비며 술주정 하는 소리를 들은 친구들은 나만큼이나 당황하더니, 험악하던 눈빛이 심술궂은 악동의 것으로 변했다. 잠시 후 내가 화장실을 다녀 온 사이, 여자들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차대리 혼자 반 쯤 정신을 놓은 채 앉아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사라졌다. 나로서는 이 친구들이 정말 좋은 친구들인지 나쁜 친구들인지 판단 내리기 미묘하다.
차대리를 애용하던 호텔의 침대에 눕혔다. 평소라면 같이 씩 웃어주었을, 포터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오늘따라 꼴보기 싫어서, 차대리를 같이 부축하고 왔음에도 팁도 주지 않고 쫒아 버렸다.
하루 종일 앉아서 컴퓨터만 바라보는 나는 동생의 SNS도 샅샅이 뒤져 본다. 그래서 이 차대리가 동생이 좋아하는 여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지는 나름 숨기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감히 어디 형을 속이려고.
그리고 이 여자도 내 동생을 좋아하고 있다. 말하자면 제수씨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여자를 좋아해도 그런 여자에게 까지 손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거의 정신을 잃은 여자를 호텔방에 팽개치고 좋아하는 걷기를 계속 할 수도 없다.
니미, 썅!
룸서비스로 좋아하는 위스키와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먹고 마셨다. 이번이 마지막인데 이제 다시는 걷기를 할 수 없는데. 죽는다는 사실보다 다시 걷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 진한 아쉬움을 느낀다. 짜증난 나는 서서 걸어 다니며 술과 음식을 먹고 마셨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계를 보니 내 몸으로 돌아오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큰일이다. 나는 서둘러 동생에게 전화 했다. 받지 않는다. 안 돼. 전화 받아. 다시 전화를 건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제기랄! 침대 위의 차대리를 보고 뭔가 오해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우야. 형을 믿어줘. 그나저나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지? 의료기기로 다시 체크해보니 내 수명은 앞으로 10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동생의 손을 잡고 임종을 맞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동생을 사랑하는지 말해주고 죽고 싶었다. 다 틀렸나? 그래도 내 전 재산을 남기고 가니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야근이 많아 힘들었을 직장에 처넣었는데 2년이나 군소리 없이 잘 다니는 것을 보니 이제 확실히 정신을 차린 듯 싶다. 조금 멍청하지만 착한 녀석이니 잘 살 것이다. 그보다 차대리도 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는데 메모라도 남길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정부인가? 아니다. 동생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동생이 나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뭔가로 덮는다. 달짝지근한 냄새와 함께 나는 의식을 잃었다.
천천히 정신이 돌아온다. 발이 너무 시리다. 양발을 안 신고 있나? 잠깐! 발에 감각이 느껴진다고? 눈을 번쩍 뜨니 눈앞에 내가 휠체어에 앉아있다. 나는 동생의 몸으로 옮겨져 있었고, 온몸이 수갑과 밧줄로 꽁꽁 묶여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입에 청테이프를 몇 바퀴나 감아 붙여놓았는지 숨 쉬는 것도 조금 힘들 지경이다.
나는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지만 애처롭게 꿈틀거리며 모기 같은 소리를 냈을 뿐이다. 나의 몸을 한 동생은 더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개X끼야. 네가 차대리에게 손을 대? 일부러 그런 거지. 일부러 나 보란 듯이 저지른 거지. 죽여 버릴 거야. 이제 알았어. 나에게 재산을 남긴다는 게 뭔지 이제 알았다고. 우리가 몸을 바꿨을 때 나를 죽이고 내 몸을 차지할 작정이었지? 당하기 전에 먼저 죽일 거야.”
나는 여전히 애처로운 꿈틀거림과 모기소리를 냈다. 하지만 동생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밖에 휠체어 탄 장애인 전용의 자동차를 불러놨어. 그걸 타고 여기서 아주 먼 곳으로 갈 거야. 그리고 24시간이 돼서 다시 몸이 돌아오기 직전에 독을 먹을 거야. 술집에서 수많은 목격자들 앞에서 독을 먹을 거니까 다시 서로의 몸으로 돌아와서 네가 죽으면 너는 자살이 되는 거지. 네가 다시 이 병신 몸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었어. 독에 중독돼서 죽어가는 몸에 돌아올 거라고. 천천히 확실하게 죽을 거야. 아주 고통스러울 거야. 죽어버려.”
동생이 집을 나서고 24시간이 넘게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동생이 독을 먹기 전 그 육체의 생명은 먼저 끊어졌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묶여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경찰이다. 아마도 나의 아니 동생의 병사를 전하러 온 모양이다.
출처 | http://jooc.kr/contest/note.detail.html?nn=10036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