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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꽂이
비 오는 날. 그녀 혼자 사는 아파트. 그녀가 손수 부친 파전에 소주를 얼큰하게 곁들인 후 무엇을 했을까?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모든 소음을 집어 삼키고, 인간의 체면과 부끄러움을 몽땅 감추어 버릴 만큼 어두운 비구름이 세상을 덮고 있을 때 젊은 청춘남녀가 무엇을 했을까? 상승한 혈중알콜농도에 자제심이 조금씩 증발하는 우리가 무엇을 했을까?
하긴 뭘 해. 이것들아! 그녀와 나는 아직 그런 관계가 아니다.
“갈게요.”
“네.”
“문단속 잘 하시구요.”
“네.”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네.”
“그럼, 내일 봐요.”
“네.”
여운과 미련이 남는 작별인사를 하고, 우산꽂이에서 나의 초록색 삼단우산을 꺼내 그녀의 아파트를 나섰다. 낮 동안에는 아스팔트를 부술 듯이 쏟아지던 비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맞고 갈만한 수준의 빗줄기는 아니어서 우산을 펼쳤다.
어라?
우산이 탄탄했다. 한 번의 장마와 두 번의 태풍을 경험한 내 우산은, 녹슨 우산살 중 하나가 부러졌고, 방수천은 피로에 지친 내 어깨처럼 축 늘어져 있다. 하지만 내가 펼친 우산은 누가 봐도 방금 출고된 신품이었다. 방수천의 주름마저 방금 다림질이라도 한 듯 빳빳한 우산을 들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내가 다른 우산을 들고 나왔나? 그럴 리가. 우산꽂이에 있던 우산은, 내 초록색 우산과 그녀의 빨간색 우산 두 개 뿐이었다. 사실 내가 적록색맹이었나? 말도 안 돼. 아니, 그 이전에 그녀의 우산은 접이식 우산이 아닌 긴 우산이다. 아무리 술을 조금 마셨다 해도 이 둘을 구분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바로 그녀에게 전화 했다.
“아, 접니다.”
“네.”
“제가 우산을 잘못 가지고 나온 거 같아서요. 혹시 우산 하나 없어지지 않았나요?”
“아니요. 제 우산은 제자리에 있는데요. 뭔가 착각하신 게 아닌가요?”
“그런가요? 그런 거 같네요.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네.”
집에 돌아온 나는 그녀에게 전화 하는 것도 잊고 우산을 먼저 살펴보았다. 색상, 디자인, 상표 등의 것은 원래 내가 사용하던 것과 완전히 같다. 하지만, 이제 슬슬 버려야지 하고 생각하던 고물 우산이 완전히 새것으로 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말도 안 되는 추론과 사고의 비약 끝에 한 가지 가설을 끌어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가설이어서 차마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그녀 몰래 작은 실험을 시도해볼 뿐이었다.
다음날 비가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산을 들고 그녀의 아파트를 찾았다. 어제와 다른 우산이다. 어쩌다 버릴 시기를 놓치고 사무실 구석에 방치되던 녀석이다.
이틀 연속 나의 방문에 그녀는 묘한 경계심과 기대감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또 왔습니다.”
“네.”
“오늘도 직접 만드신 저녁을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네. 앉으세요.”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가져온 우산을, 그녀의 우산꽂이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가져온 낡은 우산을 잠시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맑은 날 우산을 들고 온 것은 조금 어색했나?
그날 저녁식사는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그녀가 차려준 정갈한 음식을 집어먹으면서도 우산꽂이의 우산이 신경 쓰여, 식사시간 자체가 대충대충 지나간 느낌이다. 그녀와 교제를 시작하기 위해, 들인 마음과 정성과 노력이 얼마였는지 생각한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방심이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네.”
“또 저녁 먹으러 와도 괜찮을까요?”
“네.”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도착하면 연락하겠습니다.”
“네.”
그녀가 아파트 문을 닫자마자 나는 허겁지겁 우산부터 살펴보았다. 녹슬고 휘어져 펴지지도 않던 우산이 완전한 신품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파손되어 떨어져 나가 사라진 손잡이까지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너무 어처구니없어 차마 말도 꺼낼 수 없었던 가설이 맞았다. 그녀의 우산꽂이에 넣어둔 우산은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하찮은 사건을 경험한 그날 나는 엄청나게 흥분했다. 무슨 원리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우산꽂이 안에 시간터널이라도 뚫려있는 건가? 아니면 분자를 재구성 하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건가? 우와 너무 신기하다. 이 신기한 우산 꽂이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온갖 상상으로 흥분하며 잠자리를 설치던 내가 아침이 되어 깨달은 것은 ‘별로 쓸데없네’였다. 나의 빈약한 상상력은, 저 엄청난 상황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우산수리공 정도에서 멈추었다. 제기랄! 괜히 하룻밤 잠만 설쳤잖아.
하찮은 사건이었다.
그보다는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그녀와 좀 더 성인으로서의 운우지락을 나눌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더 큰 시기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그녀와 내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지 딱 100일 이 되는 날, 나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찾아 갔다. 물론 평소보다 더 정중한 옷차림, 꽃다발과 작고 빛나는 선물을 잊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오늘의 의미와, 내 마음 속의 애정과 욕망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평소보다 눈가와 입술의 색조가 강조된 화장, 천박하지 않을 만큼 섹시한 옷차림, 촛불, 와인 그리고 살짝 상기된 그녀의 볼이 내 머릿속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잠시 만요.”
뇌수가 증발되는 듯한 저녁식사시간을 마치고, 그녀는 서랍에서 낡은 DSLR 카메라를 꺼냈다. 왜? 또 뭐? 나, 숨넘어갈 것 같은 거 모르겠어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이에요. 이걸로 오늘 당신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요.”
타이머를 맞춘 카메라를 향해 그녀와 함께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셔터소리가 경쾌하다. 그런데 말이지. 저기 말이야. 이제 한계다. 이제 슬슬…….
“그럼, 잠시.”
그녀가 양해를 구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샤워기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심장을 지나는 혈액이 전부 용암으로 바뀐 것 같다. 정신이 없다. 안정을 찾을 수가 없다.
초조해 하던 나는 그녀의 DSLR을 들고 방금 찍은 사진을 열어보았다. 젠장! 안 보느니만 못하다. 사진속의 내 얼굴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기대와 욕망을 조금도 감추지 못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 삭제 하고 싶었지만 아직 일도 치르기 전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안정은 필요하다. 나는 다른 사진들도 열어보기 시작했다. 찍혀 있는 수십 장의 사진은 모두 그녀의 모습이었다. 방금 전처럼 타이머로 찍은 듯한 일상생활 중의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아빠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카메라를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닥 까지 더 높아진 상태에서 카메라를 떨어뜨렸다.
망했다! 망했어!
렌즈가 부러졌다. 정확히 말하면 렌즈와 카메라 본체를 연결하는 부분이 깨져버려 렌즈가 본체에서 떨어져 버렸다. 연결부위는 아미 확실하게 부서졌고 내손으로 이것을 고치는 일은 불가능 했다. 아버지의 유품이 박살난 꼴을 보게 된 그녀가, 오늘 밤 나에게 어떤 마음을 품어 줄까? 젠장! 망했다고!
이걸 지금 당장 복원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제발 기적이 필요…….
나는 말 그대로 매달리는 심정으로 우산꽂이에 카메라를 넣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꺼낸 카메라는 완벽하게 복원 되어 있었다. 할렐루야!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우산이외의 것도 과거의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카메라가 무사한 것을 기뻐하고 혹시 다른 곳에 고장난 곳이 없는지 살펴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욕실 샤워기의 물소리는 벌써 멈췄다. 하지만 헤어드라이어의 소리가 들린다. 오늘밤을 위한 몸치장을 시작하는가 보다. 여자의 몸치장은 오히려 샤워보다 더 오래 걸린다. 다행이다.
여기저기 작은 흠집이 보이는 것이, 카메라는 완전한 출고신품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우산은 완전 신품으로 복원 되었는데 왜? 카메라는 비싸서 그런가?
아! 아마 우산 꽂이 안에 넣어둔 시간이 짧기 때문인 것 같다. 우산꽂이에 오래 넣어둘수록 더 먼 과거의 형태로 돌아가는 가 보다. 뭐 부서지기 전보다 조금 더 깨끗해 진 것 같기는 하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잠깐만 과거의 것으로 돌린다고?
나는 다시 사색이 되어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젠장! 없다!
조금 전 그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사라졌고 아까는 보지 못했던 사진들이 보였다. 입력되어 있는 정보 까지도 과거의 것으로 돌아갔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파일을 넘겨보는데 액정에 이상한 모습이 비췄다. 그 파일은 사진이 아닌 동영상으로, 벌거벗은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지금 나의 처지를 잠시 잊고 당장 그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영상에 거의 기절할 뻔 했다.
동영상의 벌거벗은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눈에 익은 그녀의 아파트에서, 온몸이 청테이프로 꽁꽁감겨 묶여있는 또 다른 남자 사타구니에 앉아 몸을 흔드는 중이었고, 남자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환의에 찬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를 토하는 비명이었다. 그녀가 그 남자의 귀를 가위로 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속의 그녀가 카메라를 좀 더 가까이 가져가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을 때 나도 비명을 질렀다. 그 남자는 나였다.
‘뭐지? 뭐지? 뭐지? 뭐지? 뭐지? 뭐지? 뭐야? 뭐지? 뭐지? 뭐지?’
패닉에 빠진 동안 카메라 속의 그녀는 나의 얼굴을 가위로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특히 나의 코와 눈이 그렇게 쉽게 찢어지는 영상에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다.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다. 그저 얼굴만 닮은 다른 사람. 아니! 내가 확실하다. 도플갱어? 그럴 리가 있나. 지금 저기서 입술이 도려내지는 저 사람은 내가 확실하다고.
화면에 잠시 커다란 곰인형이 보였다. 지난 주, 내가 충동적으로 구입한 선물이다. 그렀다면 이 동영상이 촬영된 것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내 얼굴에는 어떤 상처도 남아 있지 않고, 머릿속에는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앗!
벼락을 맞는 다면 그 충격이 이럴까? 정수리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 코르셋과 가터벨트의 끝내주는 옷차림을 하고, 한손에는 망치 한손에는 가위를 들고 잇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무 세게 쳤네. 가위를 쓰기 전에 죽겠는 걸. 일단 복원부터 하자.”
그녀가 내 머리에 우산꽂이를 뒤집어 씌웠다.
※
그녀 역시 오늘의 의미와, 내 마음 속의 애정과 욕망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평소보다 눈가와 입술의 색조가 강조된 화장, 천박하지 않을 만큼 섹시한 옷차림, 촛불, 와인 그리고 살짝 상기된 그녀의 볼이 내 머릿속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오늘 드디어!
어라? 그런데 내가 언제 저녁을 먹었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에이 그녀가 천천히 내 옷을 벗기는 중인데, 저녁식사가 무슨 상관이야.
어! 근대 뭘 들고 있지? 청테이프? 가위?
출처 | http://jooc.kr/contest/note.detail.html?nn=10036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