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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들로 보는 민비!
게시물ID : history_124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국독립군
추천 : 14
조회수 : 1655회
댓글수 : 45개
등록시간 : 2013/11/04 11:20:59
일단 민비 시기 주요 사건들 정리

대원군 축출(1873) -> 강화도조약(1876) -> 임오군란 (1882) -> 갑신정변(1884) -> 동학농민운동(1893~1895) >>을미사변(1895)



 우리가 잘 알고 있듯 흥선 대원군은 꺼져가는 조선의 불씨를 되살렸다. 
+물론 쇄국정책으로 비판 받기도 하지만, 바로 옆 청나라가 개항이후 열강에게 탈탈 털리고 있는 것을 본 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으리라+
 
 생각보다 그의 개혁은 찰졌다. 
'세도정치의 혁파와 탐관오리 일소에 노력'
'지방 토호들의 백성에 대한 학대를 엄금'
'법전을 편수하여 정치 기강을 확립'
'환곡제도를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 

 이외에도 그는 정치가로서 매우 유능하고 합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거의 무조건적인 쇄국' 을 능가하는 막장의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민자영이를 고종과 혼인 시킨 것!

1873년 민자영은 최익현 등을 앞세워 대원군을 축출하고, 본격적으로 나라를 말아먹기 시작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흥선 대원군의 개혁을 깡그리 말아먹고, 자신의 친족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1. 1876년 강화도 조약

거창한 이유를 들먹이지만 사실 민자영이 개항을 결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쇄국을 결정은 민씨일파의 실각과 대원군의 득세로 연결된다.
2) 청나락 개국하라고 했다.

 그렇다. 결국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서였다.
올바른 개항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어야 했을까?

 그 이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바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그것이다. 
운요호 사건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배한척이 와서 무력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들의 무기가 앞섰어도 배한척으로 한 나라를 점령 할 수는 없다. 버티고 싸우면 
앞전의 두 사건때 처럼 물러나게 되있다. (특히 조선의 뒤에는 청이 있던 시기이다.)
바로 이때 물러가는 그들에게 우리측에서 먼저 개항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자영의 머릿속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은 없었다. 다른 의미의 정치적 계산 뿐이었다.
자신의 정권 유지! 

 때문에 협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 조차 무시한 채, 사상 초유의 불평등 조약을 맺는다. 
그 이후에도 같은 이유로 차례차례 열강들에게 문을 열어주게 됬으며,
그 짐은 고스란히 민중이 지게 된다. 


2. 1882년 임오군란

"1873년 이래 대궐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호조나 혜청에 저축해 온 것 모두가 바닥나 경관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으며 5영 군사들도 자주 급식을 받지 못했다." (위키백과)

 이당시 임금 체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무려 10년동안 제때 임금이 나오지 아니하였고, 임오군란 전 군인들은 무려 반년동안 아무것도 받지 못 하고 있었다. 악덕도 이런 악덕이 없다. 정말 돈이 없어서 못 주었는가? 절대 아니다. 
민자영이의 사치와 민씨일파의 부정부패로 인해 국고가 밑 빠진 독처럼 줄줄 샜기 때문!

이때 참다 못한 군인들이 겨를 섞을 쌀을 받고 폭발한 것이 바로 임오군란이다.

 당시 민비는 말그대로 죽은 듯이 도망갔다. 그리고 고종에게 밀사를 보내 청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한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청의 군대를 빌어 응? 
본래 다른나라에 이러한 군사 개입을 요청하면 흔쾌히 승락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를 주면 열을 받을 수 있는 먹음직스러운 거래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열은 100% 민중이 부담한다.

고종의 요청에 청은 인심이라도 쓰듯 군대를 보내 간단히 군란을 진압한다.

그 이후 미친 내정 간섭이 시작된다. 물론 위에서 말했든 그 짐은 100% 민중이 지게 된다. 


3. 1884년 갑신정변 

 청의 내정간섭에도 민자영은 불편함이 없었다. 위에서 언급했든 짐은 민중이 지기 때문에. 
하지만 일부 양심있는 정치인들은 이러한 불합리함을 못 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그들은 청의 내정간섭과 민씨일파의 부정부패를 타도하고, 진정한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들고 일어난 것이 갑신정변이다. 허나 민비는 또 한번 자신의 숙달된 스킬 하나를 시전한다.

'정변 직후 입궐하다가 달아난 민씨 세력은 왕비와 비밀리에 연락하였고, 민씨 정권의 인사들은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일단 몸을 피하고, 외세에 지원요청하기! 이.름.하.야 매국참!

 청나라 군대는 또 다시 간단히 이들을 제압하고, 더 빡센 내정간섭을 시작한다.
또 이때부터 일본과 청의 조선내에서 세력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이 사건은 다음에 나올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이 군을 파병할 명분을 주게 된다.


4.1893~1895년 동학농민운동

 계속 언급했든, 모든 정치적 책임은 정치가가 아닌 민중이 지게 되었다.
순박한 농민들도 막장 테크를 타는 민씨정권아래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함으로서 자진 해산 시켰다.

 이것만 보더라도 참으로 착한 이들이 아닐 수 없다. 또 이것은 정부가 민중들과 소통하며
그들을 위해 본연의 의무만 다 한다면 조금 후 나올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농민들이 해산을 하고 나자, 정부는 태도를 바꾸어 
그들을 '동비' 라 칭하며 역적을 처단하듯 보복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동학농민항쟁이 시작된다. 

 죽창을 든 농민들은 무장하고 훈련받은 정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함락시킨다. 
이에 놀란 정부는 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농민군은 해산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비와 고종은 또다시 고유스킬을 시전한다. 청에 지원요청. 
이에 일본은 갑신정변때 맺은 조약을 빌미로 청과 함께 병력을 보내고
청과 일본의 군대는 전주화약으로 농민군이 해산을 했음에도 조선에 머무른다. 청과일본은 충돌하였고, 
 일본은 한술 더떠서 궁을 장악하고 갑오개혁을 실시한다. (청일전쟁 시작7월25일~갑오개혁7월27일~일본승리)

 청일전쟁은 두달만에 구미열강의 지원을 받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고, 일본은 조선조정을 장악했다.
농민들은 이러한 국권 침탈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목적에 폐정개혁과 민씨 척신세력 처벌, 대원군 옹립이라는 조항이 들어있었고 
이것을 알게 된 민비는 동학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을 계획한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조선관군+ 일본군에게 패하고 봉기는 실패로 돌아간다.


즉, 민비는 이번에도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고 자신이 돌보아야할 백성을
자기 손으로 죽이기 까지 한 것이다.

5. 1895년 을미사변

 결국 그녀는 조선인들에게 까지 원망을 샀고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 치욕스럽게 살해되는
어찌보면 그녀의 행동에 걸맞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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