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전상우와 김점문 사이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33] 이후 경상북도 대구시로 이주하여 성장하였고 대륜고등학교, 대한유도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한유도학교 졸업 후 육군에서 갑종간부후보생 출신 장교로 복무하였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1968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예편 후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했으며,[34]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경호 제5계장으로 근무하였다. 10.26 사건 당시 경호실 경호계장으로, 그날 청와대 본관 당직조였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관련 상황을 형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재빨리 알려 전두환과 보안사령부가 10.26 이후의 상황을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새마을운동협회 중앙본부 사무총장을, 1985년부터 1987년 2월까지 새마을운동협회 중앙본부 회장을, 1987년 2월부터 1988년 4월까지 새마을운동협회 중앙본부 명예회장 겸 명예총재를 지냈다.
하지만 1988년에 73억 6,000만 원의 횡령, 새마을신문사의 10억 원 탈세, 4억 1,700만 원의 이권 개입 등 7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며, 그 와중에 일본 출국을 시도하다 제지당하였다. 결국 1989년 5월 징역 7년, 벌금 22억 원, 추징금 9억의 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이것이 일명 "새마을 횡령 사건"이며, "5공비리의 결정판"으로 일컬어지는 사건이다.[35] 실제 이 사건 이후로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범정부적 차원의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은 6공 이후로 ODA 사업으로 명맥은 이어가나 정부정책 일선에서는 한순간에 사라지게 된다.
참고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 지강헌의 탈옥 계기가 바로 이 5공 새마을 비리 때문이었다. 이석재의 사건파일 표창원 교수의 해설
이후 복역하다 대통령 특별 감형으로 형기가 반으로 준 뒤 1991년 6월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가석방 되었으며, 1992년 1월 사면 복권되었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하려했으나 무산되었다.[36] 그 후 2000년 5월에 모 건설업체 회장으로부터 빌린 돈 20억 원을 갚지 못해 소송을 당한 끝에 패소했다. 2004년에도 모 건설업체 대표에게 외자 1억 달러를 유치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약 7억 원을 받은 혐의로 고소당했다. 이 사건으로 전경환은 2010년 5월 14일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는데 건강 때문에 법정구속을 면했으며 이후 뇌졸중(중풍)으로 인해 분당에 있는 모 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근황이 전해졌다. 간병인과 아내 외에는 어떤 지인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37]
2021년 10월 4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가 폭로한 '판도라 페이퍼스' 명단에 포함된 것이 알려져, 20여 년 전 조세회피처 사모아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역외 탈세를 일삼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21년 10월 21일[38]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9세. # 형인 전두환은 건강 상태가 안 좋다 보니 거동이 힘들어서 직접 조문을 못 가고 조화만 보냈다고 하며 그리고 불과 5일 뒤인 10월 26일에 형의 친구인 노태우 역시 사망했다. 동생과 친구를 잃은 전두환 역시 불과 1달 만인 2021년 11월 23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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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헌이 탈옥할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저지른 수십억(수백억이란말도 있음) 횡령사건에 대한 판사의 판결은 고작 징역 7년...것도 후에 1992년 노태우 정부 시절에 아예 사면까지 되며 3년 살고 나옴
그 이후 총선 출마까지 하려는 꼴갑을 떨었지만 이후의 그의 일생을 보면 그냥 사기꾼 ㅅㄲ로 살다가 뒤짐...
전두환 그 ㅅㄲ일가는 정말 하나같이 막장이였던...
근례에도 그런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판결이 있었죠...
누군 수십억 주가조작을 해도 명품백을 받아도 조사조차 안받지만 어느 누군 800원 커피값에 기소되어 판새의 판결에 해고된 사건요...
법조인들의 의식은 사법살인을 저질렀던 그때 이후로..아니...나라를 팔아먹었던 그 당시 이후로 기득권의 대리자로써 변함이 없는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