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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 열전 - 기황후
게시물ID : history_123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2
조회수 : 1451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10/31 19:34:05
완자홀도황후完者忽都皇后 기씨奇氏는, 고려高麗 사람으로, 황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다. 집안이 미천했으나, 황후가 부귀해짐으로써, 3 대가 모두 왕이란 작위로 추봉됐다. 애초에, 휘정원사徽政院使 독만질아禿滿迭兒가 궁녀로 바쳐, 차를 바치는 것을 주관하며, 순제順帝를 섬겼다. 황후의 천성은 빼어나고 교활해, 나날이 총애를 받았다. 후에 답납실리황후荅納失里皇后가 한창 교만하며 시기할 때, 자주 그녀를 욕보이는 것을 독려했다. 답납실리가 살해당하고 나서, 황제는 그녀를 세우고자 했으나, 승상丞相 백안伯顏이 다투어 안 된다고 간했다. 백안이 승상에서 물러난 후, 사랄반沙剌班이 마침내 제 2 황후로 세우길 청하여, 흥성궁興聖宮에 거주하며, 휘정원을 자정원資正院으로 고쳤다.
 
황후가 일이 없을 때는, 여효경女孝經, 사서를 취해, 역대황후 중 어진 행실이 있던 이를 찾아서 본받았다. 사방에서 공물을 바친 것 중, 혹 진미가 있으면, 번번이 먼저 사자를 파견해 태묘太廟에 올리게 하고, 연후에 감히 먹었다. 지정至正 18년, 경성에 대기근이 발생해, 황후는 관리에게 명해 죽을 끓여서 그들을 먹이게 했다. 또한 금은, 양식과 비단을 내어 자정원사資正院使 박불화朴不花에게 경도에서 11문에 무덤을 만들게 명하여, 죽은 이의 유해 10여 만을 매장했고, 다시 승려에게 수륙대회水陸大會를 일으켜 그들을 제도濟度하도록 명했다.
 
당시에 황제가 자못 정치에 태만하여, 황후와 황태자 애유식리달랍은 급히 내선內禪을 도모하며, 박불화를 파견해 승상 태평太平에게 뜻을 타이르게 하나, 태평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태평을 불러 궁에 이르게 해, 술을 들어 그에게 하사하며, 몸소 전의 청구를 말하나, 태평은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뿐이라, 이로 인해 황후와 태자는 그를 원망하였다. 그리고 황제 또한 황후의 뜻을 알게 돼, 노하여 그녀에게 소홀하여, 2개월간 보지 않았다. 박불화는 황후로 인해 총애 받았는데, 죄가 드러나 파면되고 나서, 황후는 어사대부御史大夫 불가노佛家奴에게 그를 위해 변명을 하라고 완곡한 어조로 타일렀다. 불가노가 도리어 다시 박불화의 죄상을 드러내길 도모하니, 황후는 이를 알고, 도리어 어사에게 불가노의 죄상을 드러내도록 부추겨서, 조하潮河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애초에, 기씨의 종족 중 고려에 있던 이가,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횡포하여, 고려왕이 노해, 그들을 다 죽였다. 23년, 황후가 황태자에게 이르길 : “너는 어찌하여 나를 위해 복수하지 않느냐?” 마침내 고려왕족 중 경사에 머무르고 있는 이를 왕으로 세우고, 기씨 종족의 자식 삼보노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았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첩목아崔帖木兒를 파견하며 승상으로 삼아, 병사 만 명을 부리고, 아울러 왜병倭兵을 불러들여, 함께 가서 거두게 했다. 압록수鴨綠水를 지날 때,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이에 대패하여, 나머지 17 기만이 돌아와, 황후가 매우 부끄러워했다.
 
24년 7월,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가 거병하여 대궐을 침범해, 황태자는 나가 기녕冀寧으로 달아났고, 패라첩목아를 토벌하라고 하령했다. 패라첩목아가 노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 무기종武起宗을 부추겨 황후가 밖에서 국정을 어지럽혔다고 말하게 하고는, 황제에게 의당 황후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상주하나, 황제가 대답하지 않았다. 25년 3월, 마침내 임금의 명이라고 거짓으로 꾸며서 제색총관부諸色緫管府에 가두고, 그의 무리 요백안불화姚伯顏不花에게 이를 지키게 했다. 4월 경인일, 패라첩목아가 황후를 핍박해 궁으로 돌아와, 인장印章을 취해서, 황후의 서신을 위조하여 태자를 불러들이게 했다. 황후가 여전히 유폐된 곳으로 돌아가, 후에 다시 자주 패라첩목아에게 미녀를 바쳐서, 백일이 지나, 비로소 환궁하였다. 패라첩목아가 죽었을 때, 황태자를 불러 경사로 돌아오게 하며, 황후는 뜻을 전해 곽학첩목아廓擴帖木兒에게 군으로 황태자를 호위하여 성에 들어오게 하며, 황제를 위협해 양위하게 하고자 했다. 곽학첩목아는 그 뜻을 알아서, 경성 30리 밖에 이르러, 곧 군을 영으로 돌아가게 하여, 황태자는 다시 그를 원망하였다. 이 일은 곽학첩목아전에 보인다.
 
때마침 백안홀도황후伯顏忽都皇后가 죽어서, 12월, 중서성中의 대신이 상주해, 황후가 의당 중궁中宮에서 정위正位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나, 황제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상주하여 자정원을 숭정원崇政院으로 고치고, 중정원中政院 또한 겸해 이를 주관하라고 하니, 황제가 이에 책보冊寶를 그녀에게 수여하며, 그 책문冊文에서 이르길 : “땅이 건원乾元을 받아들여, 인륜에서 부부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황후가 천하에 어머니가 되니, 임금의 덕화는 진실로 가방家邦에서 시작된다. 전례의 규율에서, 고금 소중히 하는 바이다. 아아 그대 숙량합씨肅良合氏는,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것이 홀로 두터워 명족에게서 태어나, 와서 짐의 몸을 섬겼다. 경계하며 서로 협력해, 매번 밤낮으로 힘썼고, 공손하고 검소해 아랫사람에게 모범이 되며, 여러 해를 지났다. 저위儲闈에서 원자를 발상發祥하게 하고, 다시 경사를 전하여 갑관甲觀에서 황손이 태어났다. 중궁의 위치가 이와 같음을 돌아보니, 참으로 의당 훌륭한 배우자인 현인이어야 한다. 종친과 외척, 대신이, 때마침 모두 말하며 널리 청하였고, 궁중의 제어諸御는, 모두 앙모하며 높이 받들어 존경하였다. 도리어 여러 번 겸손한 말로 사양하여, 더욱 착하고 귀하게 여겨 칭찬할 만하다. 지금 섭태위攝太尉 모씨를 파견해 부절을 가지고 가서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수여하며, 그대를 황후로 명하노라. 아아! 부디 내궁의 정사를 다스려, 그대가 보좌하는 마음에 더욱 힘쓰고, 아름다운 언행에 대한 소문을 밝히며 이어, 함께 우리의 넓은 복을 보우하라. 이에 흠모하고 총애하는 명으로, 장수하고 다복해지길 기원하노라.” 28년, 황제를 따라 북으로 달아났다.
 
 
 
 
 
원사에 기록된 바에 따라 살펴보아도, M모 방송사의 드라마에서 주장하듯이 정치력이 있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 표현 그대로 머리를 굴릴줄 알아 철저하게 여론을 조장하였고, 순제가 권력 다툼에 학을 떼서 정치에 태만한 틈을 노려 자신이 밀고 있는 자들을 이용해 권세를 누렸지요.
 
실제 다른 사료와 함께 볼때 전면에서 정치적인 활동을 담당한 것은 기황후가 밀어준 박불화와 고용보와 같은 고려 출신의 환관들입니다, 이 들이 영록대부와 동지추밀원사 같은 문무 양측의 최고위 관직에 올라 그 들의 파벌인 자정원당과 함께 정권을 농락했습니다.
 
그 권세를 보여주는게 고려풍, 고려양으로 교과서 등에는 간단하게 유행 정도로 넘어가지만 실제는 황후와 황후가 후원하는 도당들이라는 새로운 조류에 거스르느냐 아니냐를 가늠할 기준이라고 보여집니다, 황명이 없어도 관직을 박탈하고 사형을 시키는게 가능했던 이 들 앞에서 엇나가서 살아남을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멀쩡한 집을 부수고 고려식으로 새롭게 지으며, 복식등에 있어 고려를 따라 그 들 아니 그녀에게 잘 보여야 겠지요.; 어찌보면 참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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