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책상의 보라색이 어슴푸레하게 눈꺼풀 안쪽을 채우는 것이 느껴진다. 어제 마시다 만 맥주를 마저 마시는 저녁이다. 맥주를 목 뒤로 넘겨도 별 느낌이 없는 것은 이미 김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가 남긴 것들은 이와 같이 항상 밍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침에는 장을 봤다. 간만에 밖에 나가 사온 것은 책 세 권과 맥주와 주전부리 몇 개였다. 다른 때와 별 다를 것 없는 장바구니였다. 나는 항상 같은 것만 사가는 그런 손님인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꼭 같은 것만 사는 것은 아니다. 우선 매번 똑 같은 책을 사갈 만큼 특이한 손님은 되지 못하며, 하고 많은 맥주 중에 같은 것만 마실 만큼 무언가에 빠져있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런 책이나 맥주의 하고 많음을 즐기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들도 많다. 맥주 시음가나 책 서평을 자주 작성하는 사람들처럼, 무언가의 다양함을 음미하고, 많은 종류의 음식이나 맥주를 맛보는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사실 다양한 종류의 것들을 체험하고 맛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무언가를 즐기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이 맥주가 저 맥주와 무엇이 다른지, 이 안주와 저 안주가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이 책이 저 책과 어떻게 다른지 사실 잘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실은 그냥 아무거나 보이는 것을 집을 뿐 무언가 고려하고 생각해서 고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같은 책을 두 세 번 샀는지도 모른다.
이전의 생에서도 내가 이런 인물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마음의 낮은 차원에서는 기억하고 있지만 의식적인 차원까지 올라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뭔가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을 조금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전의 생 보다는 현재의 생이 중요하며, 고로 현재에 충실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동시에 이전 생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각자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에 충실 하라는 말 자체가, 자신이 되찾고 싶은 과거의 기억을 좀처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반항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도 역시 과거에 대해 궁금한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전의 생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문화가 있다는 것은 어쩐지 조금 웃기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전 생의 기억을 그저 어떤 암시나 꿈 같은 것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꿈과 같다는 말을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면서 아무리 기억을 되 짚어보아도 결국 가장 끝 부분의 기억만이 남으니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인생의 마지막 부분이 인생 전체를 암시해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아무래도 무작위로 선정된 인생의 어떤 기억보다는, 보통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자신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려주지 않을까. 마치 꿈의 마지막 장면 만으로도 어떤 꿈이었는지, 좋은 꿈이었는지 악몽이었는지를 떠올리기에는 충분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이전 생의 마지막 기억은 꿈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또 꿈과는 반대로 밤이 찾아올수록 더 선명해지고는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