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불펜에서 토론되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논의를 보고 문득 시인 이상이 떠올랐습니다.
흔히 이상을 수식하는 말인 '모더니스트'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이상은 죽는 순간까지 (모던으로 상징되는)'레몬 향기를 맡고 싶어' 하던
'모던'에 경도된 식민지 조선의 모던뽀이였습니다.
일제가 한국 근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논의는 뒤로 하고
일제의 강점 이후 한국에 근대적인 시설이 들어선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경성엔 전차가 다니고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밤을 밝히며 큼지막한 현대식 건물들이 마구 들어섭니다.
전근대 사회에 살던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문화적 충격을 가져왔지요.
조선 최초로 서양에 파견된 '보빙사'의 일원으로 1883년 미국에 갔었던 민영익이 귀국 후
"나는 암흑에서 태어나 광명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제 나는 다시 암흑으로 돌아왔다." 라고 하였는데
식민지 조선의 민중이 느꼈던 충격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지금은 치욕스럽게 여겨지는 창경원이 개장한 이후에는, 창경원을 보려는 수많은 경성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사회학자 김백영의 연구에 따르면, 1917년 당시 봄철 휴일의 하루 관람자가 1만명을 뛰어넘으며 신분 계층 민족의 차이를 뛰어넘는 군중 스펙터클을 이뤘다고 합니다.
이 밖에 1916년부터 열린 종로 야시장에는 수만명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일본의 대표적 백화점인 삼월오복점(미쓰코시 백화점)이 본정(혼마치; 명동)에 들어서게 됩니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으로 만드려고 했지요.
'완전지배'를 위해서는 총칼로만 쑤셔서는 불가능 합니다.
일본은 조선에 '근대'를 가져옵니다. 미쓰코시 백화점은 그 '근대'를 한 눈에 전시하는 총본산이었습니다.
이광수 등이 일본에 경도되어 누구보다 훌륭한 황국신민이 된 것도 일제가 그들에게 모던을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경성 남촌의 대표적 건물인 조선은행, 경성우편국과 남대문통 대로를 두고 삼각형 랜드마크를 형성한 이 백화점은 무엇보다 휘황차란한 서구식 신상품들을 늘어놓은 들머리 쇼윈도우와 엘리베이터, 그리고 경성의 최고 명물로 손꼽힌 옥상정원으로 유명했습니다.
근대 도시 소비문화의 마약같은 매력을 처음 맛보게 된 경성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살 것이 없어도, 백화점 내외부와 혼마치 일대를 얼빠진 듯 방황하는 이른바 ‘혼부라당’(혼마치를 어슬렁거리는 무리란 뜻의 일본 속어)의 근대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이상의 얘기를 잠깐 해볼까요.
이상은 총독부에서 측량기사로 일한 적도 있고, 시도 스스럼없이 일어로 쓸 정도로 '민족어'에 자각이 없던, 식민지가 되고난 조선에서 태어난 '식민지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카프의 서기장이었던 임화와 같은 치열한 사회주의자조차
일본의 파시즘이 극에 치달아가던 39년, 드디어는 황군작가위문단의 실행위원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이상은 단 한 편의 친일 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의 경성은 매우 황폐한 곳, 사멸의 가나안,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구별되지 않는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일층위에있는이층위에있는삼층위에있는옥상정원에올라서남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옥상정원밑에있는삼층밑에있는이층밑에있는일층으로내려간즉동쪽에서솟아오른태양이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서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시계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시간은맞는것이지만시계는나보다도젊지않으냐하는것보다는나는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시계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 「조감도; 운동(運動)」 전문
여기서 이상은 바로 그, 미쓰코시 백화점에 들어갑니다.
그는 일층위에 있는, 이층위에 있는, 삼층위에 있는 옥상정원에 오르는데, 시의 표제도 그러하듯이 그가 이러한 반복적인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의 '모던'에 대한 욕망을 찾기 위해 오르는 그 운동의 과정에 대한 형상화입니다.
그러나 그가 올라선 옥상정원-식민지 조선의 중심부이자, 일제가 보란듯이 건설한 모던의 심장-에서 그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바라본 옥상정원의 동서남북은 경성은행, 서울역, 조선총독부 등 모던의 정수였음에도
'모던뽀이' 이상은 그 모던에 열광하던 식민지인들과 다르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인식은 이상이 건물에서 내려온 뒤 해가 뜨고지며 흘러가는 시계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과의 화해 불가능성으로 이어집니다. 1930년대의 경성이 폭압적 군사통치와 더불어 ‘모던’과 관련한 여러 헤게모니적 기제들을 통해 인민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구축하는 데에 상당한 정도의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상의 이러한 인식은 매우 주목할 만한 곳이 있습니다.
이상은 정치에 관심도 없었지만, 그가 쓴 시는 매우 정치적입니다.
그건 그가 이 세계에 대해,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조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쓴 시들은 이데올로기의 투영을 통해 즉자적으로 읽혀지는 삐라가 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이면을 투영하는 고도의 정치성을 가진 훌륭한 텍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글쓴이의 재설명>
이상이 자신의 천재성을 이용해 내선일체에 저항했다는 해석은 잘못된 이해이십니다. 혹시 제가 쓴 글이 그렇게 읽힌다면 제 글솜씨가 너무 과문한 탓입니다만..;
이상은 정치나 시의 정치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뛰어난 시인들이 모두 그렇듯이 그는 본질적으로 세계를 관찰할때 매우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뭔지 모를 부조리함을 시에 적었을 뿐인거죠. 오히려 이게 20년대를 주도했던 프로문학등의 선동적인 정치성보다 훨씬더 강력하고 뛰어난 정치적 텍스트를 만들어 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