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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유비무환2
게시물ID : panic_893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굶주린상상력
추천 : 31
조회수 : 204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6/07/19 09: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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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2

 

 

아내의 예지능력은 결혼 전 연애 때부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능력은 나의 크고 작은 곤경을 많이 해소 해 주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취업스팩을 쌓기 위해 토익 시험을 치르던 중 옷소매에 실밥이 덜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왠지 신경이 쓰여 끊어버릴 요량으로 잡아당겼더니 솔기가 풀리며 실이 주욱 늘어난다. 당황하여 이로 끊으니 어쩐지 깔끔하지 않다. 평소 이런 일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시험의 긴장감은 나를 약간 편집증 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직 남아 있는 실밥은 계속 나의 시선을 잡아챘고, 나는 시험지에 도저히 집중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벌에 쏘인 강아지처럼 낑낑거리게 될 무렵 내 점퍼 주머니에서 작은 가위가 나왔다. 미리 준비하기는커녕 생전 처음 보는 가위였다.

여하튼 그 가위로 실밥을 자르고 한층 편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 가위를 내 주머니에 넣어둔 사람은, 당시 막 연애를 시작한, 지금의 내 아내다.

 

"혹시나 해서요."

 

아내의 입버릇이다.

 

이런 일도 있다.

사회 초년병시절, 중요한 거래계약을 위해, 상사와 함께 먼 지방의 업체로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가 원래 만날 담당자는 술을 좋아하는 중년의 남성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고급양주를 선물로 준비했다. 하지만 우리를 맞이한 담당자는, 중년이기는 하지만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은 여성이었다. 최근 담당자가 급하게 바뀌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임자가 뇌물수수와 횡령으로 급하게 잘린 것이었다.

전임자의 사단이 벌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 후임자에게는 그 어떤 선물과 뇌물이 통하지 않았다. 이미 뒷돈으로 기름칠을 해두어서 계약성사는 문제없다고 호언장담하던 내 상사는 쩔쩔매었다. 이 계약에 음성적인 접대비를 상당히 끌어다 쓴 상사에게 계약실패는 곧 모가지와 같은 일이었다.

당시 나는 아내의 능력을 아직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아내 역시 '실밥 때문에 가위가 필요할 줄은 몰랐어요. 그냥 혹시나 해서 가위를 챙겨드린 거예요. 우연이에요'라는 정도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새로 바뀐 담당자에게 입을 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본 물건을 수입하는 편이 낫겠네요. 일본 사람들 손이 꼼꼼하잖아요. 도쿄돔에 모여서 퀼트 박람회를 할 정도로 수작업 좋아하는 민족이라 서요. 혹시 일본 가보셨나요?"

 

나의 앞뒤 없는 소리에, 동석한 상사는 나를 미X놈 쳐다보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당시 애인이던 아내가 챙겨준 물건의 위력을 간절히 믿고 싶었다.

 

"혹시나 출장 가시는 길, 기차에서 심심하실까봐요."

 

아내가 챙겨준 물건은 책이었다. 나로서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던, 유럽과 일본의 퀼트에 관한 책. 기차 안에서 캔맥주로 잠들어 버린 상사 옆에서 심심해진 나는 그 책을 뒤적거렸고, 그 효과는 대단했다.

 

"젊은 남자가 퀼트를 알아요?"

"제 여자친구 덕분에 저도 취미를 갖게 되어서요. 개인적으로는 발상지인 유럽보다는 일본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들더군요."

"어머! 저도 그런데. 저희가 취향이 맞나 봐요."

 

기차안에서 대충 흘깃거렸던 퀼트에 대한 지식을 한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쥐어짰더니, 계약에 성공했다. 덕분에 상사의 목은 무사했고, 상승세를 탄 그 상사의 라인을 제대로 올라탄 나 역시 승승장구했다.

 

아내는 사랑스러운 동시에 나에게 헌신적인 여자였다. 더구나 이러한 획기적인 옵션까지 있으니 나는 주저 없이 그녀에게 청혼하여 결혼했다. 나는 아내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즐거운 나날을 지낼 수 있었다.

반대로 아내의 준비를 무시 했을 경우 그 대가는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여행을 갔던 날. 낮동안에는 멋진 풍경을 즐기고, 저녁은 맛좋은 음식과 술을 즐겼다. 그리고 밤에는 부부로서, 남녀로서 운우의 정을 즐기려고 시도하는데 아내가 작은 종이상자를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요."

 

아내가 나에게 건넨 물건은 콘돔 상자였다. 우리 부부는 그 때 까지 계속 피임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까지 아내가 준비한 것을 보면 오늘밤 피임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아기가 생긴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 슬슬 아이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터였고, 술과 함께 몸도 달아오른 상태여서 결국 아내의 준비를 무시하고 그날 밤을 보냈다. 그리고 몇 주 후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임신했다.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임신소식을 들은 아내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그리고 몇 주 후 내 표정은 아내보다 더욱 어두워졌다.

 

"초음파진단결과 아이의 팔다리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돌연변이 증상입니다. 아마도 곧 사산될 듯 합니다. 산모를 위해서는 차라리……."

 

의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리의 첫 번째 아이는 결국 낙태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다친 마음을 치료하는 동안, '아내가 시키는 대로 했어야 했어'라고 수없이 후회했다.

 

당연히 나보다 아내의 상처가 더 심하게 남아있었다. 낙태 전에는 차분하다고 생각되던 아내의 성격이, 이후 무거운 것으로 바뀌게 되었고, 나를 위한 획기적인 준비도 예전 보다 덜하게 되었다. 퇴근길에 예상 못한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어서 귀가하거나, 슬리퍼를 신고 편의점에 다녀오는 중 보도블록에 새끼발가락이 부딪쳐 팔짝팔짝 뛰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일상생활 중 누구에게나 당연히 찾아올 수 있는 작은 불행이다. 하지만 언제나 먼저 우산과 운동화를 준비했던 아내와의 생활에 몸이 익은 나는 그 작은 불행도 참을 수 없는 불쾌한 일이 되었다.

 

"뭐야! 오늘 비올 줄 몰랐어? 우산 챙겼어야 할 거 아니야!"

"죄송해요. 일기예보에 그런 소리가 없어서요."

 

"아파! 아프다고. 왜 현관에 신발이 슬리퍼만 있는 거야? 운동화 한 켤레 꺼내 놓으면 어디가 덧나나?"

"죄송해요. 현관에 신발이 어수선해서 정리한다는 것이……."

 

인간은 한 번 누리게 된 안락함 에서 어지간하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 때문에 자연과 환경이 파괴되어 차츰 파멸로 걸어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휘발유를 태우는 내연기관과 거대한 발전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계속 이렇게 지속되면 그 끝이 불행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짐작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안락과 편안을 위해 아내를 닦달하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 내가 오늘 뭘 가지고 나가야 해? 혹시나 생각나는 게 뭐야?"

"왜 이러세요, 여보? 저도 몰라요. 나에게 왜 이러는 거예요?"

"시치미 때지 말고 그 잘난 초능력 좀 발휘해 보라고. 내가 잘못 되도 좋다는 거야?"

"그냥 그건 우연이라고 몇 번을 말해요. 무서워요, 여보. 이러지 마세요."

"이런, !"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렇게 사소한 일에 어째서 그렇게 초조해 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나는 아내의 준비가 사라지는 것에 심각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공포에 쫓긴 나는 너무도 간단하게, 사랑하던 아내의 얼굴에 손을 올리는 남자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지속될 리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외도를 하기 시작했고, 이것저것 신경 쓰고 눈치 봐야 하는 아내와 달리, 그저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여자라는 점에 외도상대에게 푹 빠져 아내를 멀리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도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임신했어요."

 

우리 회사 타부서의 직원. 부모님은 지방에 살고 혼자 상경해 자취하는 여직원. 고졸 특채사원으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일을 시작하여 19살 밖에 안 된 신입사원. 이러한 그녀가 자신의 자취방에서 나에게 뱉은 말은 내 인생을 뒤집어 놓을 위력이 있었다.

 

"아이는 낳고 싶어요."

 

이혼하고 결혼을 해달라는 등의 말은 없었다. 그저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이례적인 출세코스를 타고 있는 나는 곧 과장 발령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부남이 하급직원에게 손댄 것이 알려지면 승진은커녕 퇴직이 분명하다.

 

당황한 나는 습관처럼 가방과 주머니를 뒤졌다. 이전에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지면 그 상황을 해결할 만한 물건을 아내가 미리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상의 안주머니에서 뭔가가 만져 졌다. 화장실로 들어가 조용히 꺼내보니, 종이에 쌓인 가루약이다. 약을 싼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혹시나 해서요.'

 

온 몸에 털이 솟아오르는 소름이 돋았다. 이걸로 어쩌라는 거지? 아니, 그전에 아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패닉에 빠진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아내의 의도에 몸을 맡겼다.

 

"미안. 나도 좀 혼란스러워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내일 대답을 해줄게."

 

임신한 신입사원에게 적당히 에두르는 말을 남기고 그녀의 자취방을 빠져나왔다. 남겨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을 피해, 그녀가 애용 하는 물 잔에 가루약을 담아 두었다.

 

그녀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 되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평소 문란한 생활을 해오다가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한 충격이 자살의 원인으로 되어있었다. 회사에도 경찰이 찾아와 그녀와 친했던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에게는 오지도 않았다.

 

이후 아내에 대한 나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겉으로 보면 예전 같이 화목한 부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그 화목함의 기반이 사랑이었고, 지금은 공포라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아내의 기분을 살피며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썼다. 아내는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대했고 표면적으로는 우리 부부는 다시 정상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누른 용수철은 반드시 튕겨지기 마련이다. 아내에 대한 공포와 굴종을 참지 못한 나는 아내와 영원한 이별을 준비했다.

 

아내의 인감도장을 아내 모르게 잠시 빌리는 일은 일도 아니다. 나는 우리 부부의 생명보험증서를 보며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가입된 생명보험으로 배우자 중 한 사람이 사망하면 남은 배우자에게 거액의 보험료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 결행시기와 장소는, 결혼 2주년 기념일 여행지인 캄보디아로 결정했다. 치안이 좋지 않은, 먼 타국에서 벌어진 사고는 조사하기 힘들 것이다.

 

드디어 결혼기념일 여행을 떠나기 위해 차를 몰아 공항으로 가는 길이다. 문득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 부부의 불행과 파국이 고작 1년 동안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낙태하고 수십 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내는 작년 여행 때와 같은 밝은 표정으로 짐을 챙겼다. 아내의 미소를 보며 조금쯤은 죄책감이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에게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캄보디아가 조금 허름하기는 하지만, 야시장이 볼만하고 특히 앙코르와트가 장관이라고 하더라.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

"물가도 싸서 여행비도 많이 안들이고 좋네요. 과일도 좋다던데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푹 쉬다 와요."

"짐도 이것저것 챙기는 것 같던데, 이번에는 혹시나 해서 챙기는 물건 없어?"

"당신도, ! 그건 우연이라고 몇 번 말해요."

"그래도. 뭐 없어?"

 

나는 들뜬 마음에 쓸데없는 소리를 아내에게 지껄이고 있었다. 몇 번을 난처해하던 아내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뒷자리에서 커다란 비닐봉지에 든 물건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혹시나 해서 이걸 챙겨 왔네요."

 

아내가 봉투에서 꺼내 뒤집어 쓴 물건은 커다란, 오토바이용 헬멧이었다. 그리고 운전하는 차의 브레이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출처 http://jooc.kr/contest/note.detail.html?nn=1003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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