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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火傷)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악기는 인간의 성대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 말에 찬성하는 편이다. 세계 최고의 장인이 필사의 노력으로 제작한 명기의 연주보다 사람의 노랫소리가 나는 더 좋다. 내 몸 역시 악기와 비슷하다. 이를 테면 건반악기?
하지만 나의 악기는 성대가 아니다. 내 몸 여기저기에 이식된 푸르죽죽한 피부를 피아노 건반처럼 누르면 내 머릿속에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 허벅지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까지 헛살았다는 거야. 29살이나 먹어놓고 아직도 그런 간단한 사실을 몰라?”
젊은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오른 쪽 종아리를 지그시 눌러본다.
“당신네 과장이라는 사람은 원칙대로 일을 처리 했을 뿐이에요. 아무리 당신에게 급한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당신은 일과 중에 사적인 일을 했고, 과장은 그 일에 관해 지적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요.”
항상 차분한 바리톤 음성. 나는 종아리에서 울려 퍼지는 이 남자의 목소리가 좋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었다. 벌써 한 달 째 같이 동거하고 있으면서 허벅지의 여자는 종아리 남자의 목소리를 아직도 싫어하는 척 하고 있다.
“그러니까 네가 여태껏 모태솔로인거야. 내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잖아. 잘못을 했으면 지적하는 것이 맞지만, 그 과장의 비아냥거리는 태도나 말투도 나쁘다는 이야기라고.”
“그것도 타인과의 교류, 의사소통, 사회생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당신도 28살이나 되었고, 군대 갔다 온 저보다 오래 사회생활을 해봤으면서도 아직도 그런 판단을 못하는 겁니까?”
“그놈의 군대이야기 왜 안 나오나 했다. 꼴에 사내라고 꼭 이렇게 마초근성을 드러내요.”
“논점 흐리지 마세요. 쓸데없는 오류에 빠집니다.”
“그래! 논리적이고 똑똑하고 잘라나서 좋겠네. 그냥 이유 없이 내편 들어주면 안 돼? ‘그 과장 나쁜 놈이네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이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제가 왜 이유 없이 당신 편을 들어줘야 합니까?”
“그야, 나와 당신이…….”
갑자기 양쪽에서 말이 사라졌다. 그리고 종아리와 허벅지에서 동시에 뜨뜻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아주 강한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다. 츤데레?
두 사람은 아직 한마음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벌 써 한 몸은 이루고 있다. 남녀의 성적인 결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두 사람은 내 몸을 빌려 동거하고 있다.
가스폭발, 화재, 화상. 뭐, 뻔한 이야기다. 폴리에스테르가 잔뜩 섞인 바지가 홀랑 타버렸고, 내 가슴 아래와 하반신에 심각한 화상이 남았다. 젖가슴이라도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렇게 쭈글쭈글 일그러진 하반신을 가진 여자에게 어떤 남자가 욕정을 품어줄까? 그보다 욕정 같은 사치스러운 고민을 하기 전에 두발로 걸어 다니는 문제가 급했다. 화상으로 일그러지고 굳어버린 피부는 발목, 무릎, 골반 같은 관절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 버린다. 내가 다시 걷기 위해서는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탄력 있는 새 피부가 필요했다. 나는 그 피부를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 하나씩 얻고 있었다. 자가피부이식, 인공피부이식도 모자라 사체피부이식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그들과의 동거가 시작 되었다.
그날, 처음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수술의 통증과 진통제효과로 인한 환청이라고 생각하고 그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하고 분명한 의사전달을 하고 있었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에게 이식된 피부의 원래 주인, 도너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 패닉에 빠질 뻔 했지만, 허벅지에 이식된 여자의 그악스러운 지랄 발광에 나의 놀라움이 꺼져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이미 죽어 사려졌고, 세상에 남은 것은 손바닥만한 살토막이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하긴, 누가 이런 미치광이 같은 상황을 납득할 수 있을까? 그녀와 차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이식받고 반년이나 지난 후였다. 죽기 전 그녀는 28세의 평범한 직장인으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학교를 다니고, 평범한 회사를 다니다가 평범한 해수욕장에서 평범한 피서를 즐기던 중 물에 빠져 죽는 독특한 경험을 했다.
유행하는 액세서리를 손에 넣듯이, 장기기증카드를 남들에게 자랑하며 자신의 이타심을 으스대기 위해 장기기증을 신청한 일은 그녀에게 악몽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꼴을 당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테레사 수녀라 할지라도 기증을 망설이게 될 것이다. 허벅지의 그녀는 이식된 자신의 피부를 때어내어 태워버릴 것을 오랜 시간동안 끈질기게 요청했다. 이런 젠장! 피부이식수술에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중화상환자의 치료에는 대부분 심리치료도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한 달에 두 번 만나는 심리치료사에게 이 어이없는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믿어줄지도 의심스러웠고, 설령 믿어준다고 해도 차후 발생할 복잡한 문제들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체피부이식수술을 받은 날. 나와 허벅지는 숨을 죽이고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새벽 무렵 맑은 바리톤 음성의 남자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저승 입니까? 천국인가요, 지옥인가요?”
남자는 침착했다. 자신이 죽었음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독특한 첫 질문과 조금씩 드러나는 냉소적인 의식을 통해 자살한 것이 아니었나 짐작해 본다.
세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묘한 일이 벌어졌다. 저 두 사람이 본체인 나를 따돌리고 둘이서 조용한 대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하지만 곧 해결책을 찾아내었다. 아무리 조용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이식받은 그들의 피부를 지그시 누르면 그들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온다. 허벅지 여자는 사생활침해니 뭐니 하며 대들었지만 목소리 말고는 반항할 방법이 없다. 나는 느긋하게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즐겼고, 이 커플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결혼해 주세요."
종아리남자가 허벅지여자에게 청혼한 그 목소리는, 내가 지금 까지 들었던 그 어떤 음악보다 황홀했다. 차라리 내가 종아리남자와 결혼하고 그의 아이를 낳아주고 싶다는 충동마저 일 정도였다. 종아리의 청혼을 허벅지가 받아들인 이후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는 일을 조금 자제하게 되었다. 결혼을 한 이후 두 사람은 매우 직설적이고 농염하고 음탕한 대화로 서로를 자극하고 있었다.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 목소리뿐이기에 그 정도는 금세 한계를 넘었고, 그 대화를 듣는 내가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 되었다.
"당신을 먹을 거야. 네 XX를 마구 먹을 거야."
"날 먹어! 날 먹어! 네 OO으로 날 먹어줘."
이 대화를 끝으로 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피부를 누르지 않아도 간혹 둘의 목소리가 새어나올 때가 있는데 차마 글로조차 쓸 수 없을 만큼 추잡하고 더러운 아름다운 사랑의 밀어였다.
그러는 어느 날 종아리와 허벅지에 이상한 열기를 느끼고 잠에서 깨었다. 다리에서 시작한 열기는 금방 온몸으로 번졌고 나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나는 성적인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평생 그 근사치조차 경험해본 적이 없는 강렬한 오르가즘!
숨막히는 감각에 온몸을 비틀며 이부자리를 움켜쥐었다. 짐승 같은 신음과 함께 하반신을 거칠게 들썩거렸다. 나의 신음소리가 거의 비명으로 바뀌어갈 무렵 여성으로서 익숙한 황홀경의 한켠에 생경한 감각이 자리 했음을 깨달았다. 보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배설에 가까운 쾌감! 생전 처음 느껴보는 성욕의 오르가즘. 이것은 남자의 오르가즘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손을 뻗어 확인하려다, 허벅지와 종아리로 향하던 손을 화들짝 치우고 말았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서웠다. 내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동안 화상을 입을 때보다 더 뜨거운 것 같은 감각 속에 몸을 비틀다가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그들과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끊고 살았다. 때로는 그들이 내 몸에서 사라진 것이 아닌가 의심할 때도 있었지만, 간혹 벌어지는 그 백열같이 뜨거운 광란의 밤은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존재를 의식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야, 이 미친 연놈들아!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진정해. 진정하라고. 이건 기적이야. 신의 선물이라고. 이해할 수 없어?"
"닥쳐, 허벅지! 종아리, 네가 설명해봐."
"죄송합니다. 저도 어찌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듯이 그저 기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런 XX! 너희들 당장 때어내서 불에 태워버릴 거야. 허벅지 네가 원한대로 그렇게 해주겠다고!"
"잠깐만요!"
"잠깐만!"
경험한 적이 없는 몸의 이상에 병원을 찾았고, 주치의가 당황한 표정으로 산부인과를 소개할 때만 해도 이게 무슨 농담인가 싶었다. 하지만 무정한 현대의학은 내 자궁 속에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선고 했다.
"제기랄! 하나님! 내가 성모마리아 2호기 입니까?"
"제발, 제발 진정해 주세요. 그렇게 흥분하면 아기에게 좋지 않아요."
"그래. 우리 아기를 위해서 진정해줘. 제발 부탁이야."
"닥쳐! 닥쳐! 이 아이 때버릴 거야. 낙태해 버릴 거라고."
내 입에서 '낙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엄청난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허벅지와 종아리에서 무시무시한 감정이 흘러나온다. 압도당한 나는 황급히 차분한 말투로 그들을 설득했다.
"내 화상은 복부 까지 덮고 있어. 뱃속의 아이가 커지면 배의 피부도 늘어나야 하는데, 손상된 내 배는 늘어나지 않아. 그러면 아이는 자궁에 짓눌려 죽을 거라고. 사산 된단 말이야."
그제야 두 사람의 광기가 사라졌다. 종아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러면, 복부에 피부이식수술을……."
"늦었어. 임신한 몸으로 이식수술을 받으라고? 최소한 임신 1년 전에 했어야 할 일이야."
결국 아이는 의사의 권고대로 중절해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악을 쓰며 저항 했지만 소용없다. 둘은 허벅지와 종아리일 뿐이다.
아이를 지운 다음날부터 종아리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의사의 진단은 이식거부반응. 아니, 왜 이제 와서? 의사역시 이식 후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나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 본다고 한다. 또 가족을 잃게 되는 상황에 허벅지는 정신이 나간 듯 발광했지만 종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종아리는 조용히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아기가 사라지고, 종아리가 사라지고 허벅지는 세상을 부정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아 그녀도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할 무렵 그와 만났다. 병원에서 안과병동을 지나칠 때 진찰실의 문을 열고 나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허벅지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강렬한 감각이 느껴졌고, 나는 병원 복도 한복판에서 크게 비명을 질렀다.
비명에 놀란 그 남자가 나를 바라봤고 다시 눈이 마주쳤다. 틀림없다. 종아리의 눈이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종아리의 각막을 이식받은 사람이다.
이제 허벅지에서 화산이 터진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그 절절한 감정은 나의 진심마저 지배해 버렸다. 당장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그 남자의 눈꺼풀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차분한 바리톤 음성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여기는 저승 입니까? 천국인가요, 지옥인가요?”
출처 | http://jooc.kr/contest/note.detail.html?nn=10036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