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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
내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물건은 지금의 내 눈꺼풀이다. 눈꺼풀이 내려앉아 세상을 덮어버리는 힘을 나는 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내가 눈을 감자마자 그녀의 섬섬옥수가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날아와 내 뺨을 후려 갈겼다.
"정신 차려요. 잠들면 안돼요. 여기서 잠들면 죽어요."
너무나 뻔한 재난영화의 대사, 후끈 달아오는 뺨, 졸음, 조난, 눈보라 등등 모두 짜증나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큰 짜증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여자가 내 얼굴에 손을 댈 수 있지? 이년이 미쳤나?
뭐,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으니 그만 하산하자던 그녀의 제의를 네 시간 전에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이런 험악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다. 그리고 그녀가 이런 일도 있을 까 싶어 라며 챙겨온 미니 텐트가 아니었다면 개방된 산허리의 눈보라 속에 벌써 얼어 죽었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다. 어떻게 내 얼굴에 손을 댈 수 있지? 진짜 미친 건가?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잠투정이 아니다. 이 미련한 여자에 대한 나의 교육이다. 나는 내 뺨을 친 여자에 대한 교육을 위해 주먹을 쥐고 휘두를 준비를 했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필요하실 까봐 챙겼어요."
그녀가 자신의 배낭에서 코펠과 버너를 꺼내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의 코를 뭉게 놨을 것이다. 하지만 이 번 만은 너그럽게 아구창을 후려갈기는 것으로 참아 주었다.
"그런 물건이 있었으면 진작 꺼내란 말이야! 이것아. 날 죽일 셈이야"
그녀가 부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코펠에 눈을 모아 버너 위에 올려놓았다. 따듯한 증기가 텐트 안을 휘감자 한결 살 것 같다. 하지만 조금 긴장이 풀리자 다른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어이, 뭐 먹을 것은 준비 안했어?"
"예. 혹시 필요하실 까봐 챙겼어요."
잠시 반색한 나에게 그녀가 꺼내 놓은 물건은 고작 초코바 세 개였다. 혹시 모르니 남겨두라는 그녀의 충고는 무시하고 모두 먹어 버렸다. 그런 잔소리를 할 거면 더 많이 준비해 놨어야지. 멍청한 년. 이딴 물건 간에 기별도 안가.
"침낭이나 뭐 그런 거는 없어?"
"죄송해요. 그것 까지……."
"네가 그러니까 내가 아직 결혼을 안 해주는 거야. 우리 엄마였다면 텐트에 침낭에 음식에 맥주 까지 바리바리 싸왔을 거라고. 넌 아직 한참 멀었다."
"죄송해요."
"이거 바닥이 차가워서 잘 수 있을까? 네 패딩 내놔봐. 깔고 자게. 그리고 나 자는 동안 버너 불 잘 지키고 있어."
"네. 주무세요."
내가 이 멍청한 여자를 감히 내 배우자 후보로 생각해주는 영광을 내린 유일한 이유는 우리 엄마와 같은 말버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필요할 까봐 챙겼어요.'
우리 엄마는 나를 위한 일종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시간, 어떤 상황, 어떤 공간에서든 내가 무언가 필요한 것을 요청하면 이미 그것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학창시절 일기예보도 예측하지 못한 비가 오는 날 다른 친구들은 비에 젖어 뛰어갈 때 내 가방에는 반드시 우산이 준비되어 있었다. 수업 중 커피나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내 가방 안에 반드시 그 때의 기분에 맞춰 커피나 주스가 준비 되어 있었다. 어떤 녀석이 프리미엄이 붙은 게임소프트 같은 것을 학교에 가져 와서 자랑을 하고, 주변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눈꼴실 때 가방 안을 뒤져보면 그것과 똑같은 물건이 이미 준비되어 있곤 했다. 어떻게 알고 그렇게 미리 준비하느냐는 질문에 엄마는 언제나 '혹시 필요할 까봐'라고 대답했다.
가방이나 지갑, 주머니를 뒤지거나 서랍과 냉장고를 열어보면 내가 원하는 물건 또는 필요한 물건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고 엄마가 뒤에서 말했다.
"혹시 우리 아들이 필요할 까봐 챙겼어."
덕분에 나는 매우 안정적이고 순탄한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무난하게 명문대를 거쳐 대기업에 입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신 이후 나의 승승장구에는 당연히 제동이 걸렸다. 언제나 내 방 책상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보고자료와 업무서류들이 사라지게 되자 나는 회사 내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고, 후임들에게 자리를 위협받을 지경에 처해 졌다. 특히 박대리 그놈. 나보다 입사가 2년이나 늦은 주제에 직급은 나와 같은 대리다. 다음 과장선발에는 박대리 저놈이 가장 유력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나는 그놈에게 질 수 없었다. 그 어떤 분야 에서도. 하필이면 놈의 취미는 등산이었고 나는 놈이 오른 산보다 더 높은 봉우리를 찾아 오르다가 지금 이 꼴을 당하고 말았다.
내 잘못만은 아니다. 나는 일정, 코스, 물품 등의 준비를 그녀에게 지시해 두었는데 이 멍청한 년이 오늘 같이 지랄 맞은 날씨에 등산 일정을 잡은 것이다. 물론 그녀가 처음 제시한 등산날은 어제였지만 어제는 그냥 귀찮아서 갈 수 없었다. 내가 오늘 등산을 하자고 우기기는 했지만 날씨가 안 좋으면 말렸어야 하지 않은가? 물론 그녀가 말리기는 했지만 더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다는 말이다. 짜증난다. 그녀가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나는 지금 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맛있는 음식에 맥주를 마시고 편안한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을 텐데, 이 멍청한 여자 때문에 이 고생 중이다.
다음날 날이 밝으면 눈보라가 사라진 맑은 날씨와 그녀가 미리 눈을 치워둔 안전한 하행 산길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해가 떴어도 여전한 눈보라에 시계는 어두컴컴했고, 그녀는 기름이 바닥난 버너 옆에 앉아 졸고 있었다. 망할 것! 우리 엄마였다면 내가 잠든 사이 나를 업고 이미 산을 내려갔을 거다. 말버릇이 비슷하다고 해서 이 여자에게 기대를 걸었건만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번에는 내가 여자의 뺨을 갈겨 깨웠다. 그녀는 잠든 동안 가벼운 저체온증에 빠진 듯 잠에서 깨어나는 데 시간이 결렸고 깨어난 후에도 한동안 행동이 굼떴다. 옷도 재대로 안입고 잠들었으니 당연하다. 자기 패딩은 내가 바닥에 깔고 자고 있으니 본인은 당연히 잠들지 않고 버디고 있었어야 하지 않은가. 더구나 잠들어버려 버너의 불조절도 하지 못해 기름을 몽땅 태워 버렸으니 정말 답이 없다.
이 멍청한 여자는 우리화사 하청업체의 파견직원이다. 우리 같은 거대 기업의 클레임을 직접 듣는 것이 두려운, 하청업체의 쪼다들이 우리의 불호령을 한 번 걸러 듣고 싶어 우리 사무실에 박아둔 일종의 몸빵이다. 언제나 비굴하고 굽실거리는 그녀가 감히 나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뿐이다.
어느 날 점심식사 이후 손톱 뿌리 쪽에 일어난 거스러미가 계속 신경에 거슬렸다. 그냥 두자니 신경 쓰이고 손으로 잡아 뜯으면 상처가 더 커질 것 같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손가락을 노려보고 있자 그녀가 나에게 손톱깎이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쓰세요. 혹시 필요할까 싶어 챙긴 거예요."
그녀의 말투에 충격을 받은 나는 이후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이것저것 부탁하기 시작했다. 혹시 스테이플러 있나요? USB 여분 있어요? 이 서류 복사본은? 3/4분기 판매실적 자료 있나? 오늘 내가 올려야 하는 지출결의서류는?
막힘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요청하는 모든 것을 요청하기도 전에 마쳐 놓고 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엄마의 환생인가 싶어, 나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그녀를 너그럽게 나의 배우자 후보로 삼아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엄마가 아니었다.
"오늘 올릴 보고서 줘봐."
"아! 오늘 올릴 보고서가 있었나요? 죄송해요 몰랐어요. 지금하고 있는 박대리님 연말정산 서류만 작성하고 바로 해드릴게요."
"뭐! 몰랐다고? 그게 말이 돼? 그것보다 지금 박대리 새끼 일을 하느라 내 일을 못하겠다는 거야? 이게 미쳤나. 우리 엄마였다면 어젯밤 중으로 보고서도 싹 쓰고, 내가 말도 하기 전에 겸사겸사 박대리 그 새끼를 죽여서 산에 파묻고, 내 아침 식사에 도시락까지 챙겨줬을 거라고. 넌 왜 그 모양이야. 우리 엄마 반만 따라가 봐."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런 썅! 차라리 죽어!"
내 눈앞에서 박대리의 일을 대신 해주던 이 병신 같은 여자는 그날 이후 일주일간 회사를 쉬었다.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멍만 조금 들도록 패줬을 뿐인데 회사를 쉬다니. 그 일주일동안 내가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기나 해?
이렇게 멍청한 여자 덕분에 산에 조난을 당한지 사흘이 지났다. 눈보라는 여전했고 그 때문인지 구조헬기는 커녕 산짐승의 코빼기조차 보지 못했다. 역시 내말대로 체력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었을 때, 한걸음이라도 더 산을 더 내려가야 했다.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다 등산로를 벗어나게 되면 구조대에게 발견되기 어려워진다고 징징거리는 그녀를 걷어차 움직이게 만들었지만 내 생각보다 많이 내려오지 못한 듯 싶다. 야, 이년아! 구조대 발견이 늦어지면 다 네 탓이야. 왜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나 이대로 죽는 거야? 싫어! 배고파. 추워. 추워 죽겠어. 싫어! 싫다고.
나는 흉흉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 앞섰을 가리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람이 최후의 순간에 닥치면 종족보존의 본능 때문에 이성을 갈구하다는 말이 기억난다. 하지만 나는 저 멍청한 여자를 범하기 위해 바지를 벗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렇게 추운데 옷을 왜 벗어. 저 여자 것을 벗겨서 입어도 모자랄 판에. 엉! 지금 내가 뭐라고 그랬지?
나는 여자를 다시 노려보았다. 역시 이 여자는 내 엄마가 아니다. 엄마라면 내가 말하기도 전에 자신의 옷을 벗어 나에 입혀줬을 것이다. 결국 내손으로 해야 한다. 나는 천천히 여자의 옷을 벗겼다. 속옷까지 몽땅 벗겨 내 몸을 감쌌다. 여자의 나체를 보고도 종족보존의 본능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내가 죽을 때는 아닌가 보다.
"배고프지 않아요?"
여자의 몸은 벌써 새파랗게 식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흔들림 없는 또렷한 발음으로 나에게 말했다.
"저는 배고파요. 혹시 필요할까 싶어서 챙겼어요."
여자가 자신의 배낭을 주섬주섬 뒤졌다. 이 죽일 년이 먹을 것이 있었는데 나한테 감추고 있었어? 그래, 오냐. 지금 진짜로 죽여주마.
분노에 불타는 내 앞에 벌거벗은 그녀가 꺼내 놓은 물건은 이미 사흘 전에 보았던 코펠과 버너였다. 그리고 감춰 두었던 여분의 버너 기름. 하지만 음식은 없었다.
"뭐야! 음식은 어디 있어."
"아직은 조리기구 밖에 없어요."
"이 등신아! 이 상황 조리기구가 무슨 소용이야. 너 진짜 돌았냐? 야채나 고기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진짜 답답하다."
"그래서 혹시 필요할까 싶어 챙겼어요."
그녀가 배낭에서 날이 시퍼런 식칼을 꺼냈다. 저 식칼이 나에게 필요한 물건인지, 그녀에게 필요한 물건인지 고민이다. 생각해보니 어느 쪽이라도 싫다.
출처 | http://jooc.kr/contest/note.detail.html?nn=10036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