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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유학 5개월차 남편 근황
게시물ID : emigration_18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보리설란
추천 : 17
조회수 : 3575회
댓글수 : 50개
등록시간 : 2016/07/13 18: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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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Patrick은 내 남편의 영어이름이다.
작년, 학원을 정리하기 전에 거실에서 둘이 머리를 맞대고 이름을 지었는데,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아니면 레지던트이블의 앨리스처럼 낮선 환경, 상황에서 강하게 헤쳐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Alice.
아들은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의 이름을 따 Verdi
남편은 여러가지 이름중에 (워킹데드의 릭은 어떠냐 했더니 Dick이랑 비슷해서 싫다, 같은 이유로 그림형제의 닉도 싫다..)고민하다
목 늘어나서 버려야 하는데 안 버리고 입고 있던 녹색 티셔츠에 있던 Saint Patrick's day를 본따 패트릭이 어떠냐고, 잘 어울린다해서
Patrick이 되었다.
Family name은 나중에 둘의 한국 성을 따 Joan이나 그 비슷한 걸로 하자고 하고..
 
우리 남편 Patrick은 적은 나이가 아니다.
한국 나이로 38, 뉴질랜드 나이로 36..
한국에서의 경력도 뭔가 애매하다.
 
음대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재수해서 4년제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긴 했지만.
한국에서 음악으로 밥 먹고 사는 것은 유학 안 다녀오면 너무 어려운 일이라
이탈리아 유학을 계획하다가 결국 집안의 반대로 엎어졌다.
그 뒤로 생의 목표를 잃고 사설 경비원 일 전전하다 롯데제과 영업사원으로,
또 나와 결혼한 뒤에는 원장 겸 영어선생의 일을 했지만 결국 자기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결혼을 안했으면 심리상담으로 대학원 진학을 했을 예정이라 처음 만났을 당시 남편이 형편없이 망가져있던 상태라는 것을 알았었다.
큰 이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날개가 꺾였을 경우 느끼는 심리적 박탈감, 배신감, 불안감, 가족에게 받은 상처..
다시 꿈을 주고 싶어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만 믿고 자리도 만들어줬었는데..
남편은 쉽게 다시 일어서지를 못하게 되어버릴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남편이 처음에 뉴질랜드 간다고 했을 때
남편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우려를 표했다.
 
"걘 못할거야"
"나이가 많아서 어쩌려고 그래?"
"외국 사는게 생각보다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다"
"이민가면 다 해결될거 같지? 한국서도 못하는데 나가선 잘하겠어?"
 
남편의 가족들도 부정적인 반응이었지만 남편을 보아온 우리 친정 사람들도 부정적이었다.
나 혼자만이 남편의 방패가 되었었다.
 
"나이 40 넘으면 트라이 하고 싶어도 못하고 그 전에 학비나 생활비 다 해야 3천인데
자기 미래를 위해 그 정도 투자는 해 봐도 되는거 아니냐고."
 
그리고, 남편을 시모와 내가 없는 곳에 혼자 떨어뜨려 많이 고생하고 경험하고 하게 하고 싶었다.
시모는 자식들의 인생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성격으로 자식들이 자립심을 갖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애초에 차단한다.
본인 성격이 급하니 꾸물대는 자식들 보기 싫어하겠지만, 아이는 부모가 그렇게 휘두를수록 작아진다.
부모친(親)자를 파자하면 부모란 나무(木)위에 서서(立)바라보는(見)사람이라고..
부모가 나서서 다 해 주면 아이가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는 거니까,
잘 못하더라도, 실수하더라도, 지켜봐주고 격려해주고 공감해주고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게 진짜 교육이라는 우리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처음 결혼하고 너무 숨이 막혀 힘들었었다.
남편 보험(왜 내가 내 돈 내고 드는 내 남편 보험 해약하고 다시 드는데 참견을 하지?)
태아 보험(왜 내가 내새끼 보험 드는데 시모 아는 사람한테 들어야 하지?)
임신중 집들이(왜 내가 내 집에 친하지도 않은 친척 30명을 몸도 무거운데 불러서 잔치를 해 먹여야 하지?)
다행히 결혼하고 내가 알아서 모든 걸 본인보다 잘 하는걸 보고 나서 말은 못하지만..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은 제 힘으론 아무것도 못한다.
 
스스로 넘어져도 보고 사기도 당해보고 욕도 먹어보고 짤려도 보고 성공도 해 보고 칭찬도 들어보고 자율성을 보장받는 안에서
많은 경험을 함으로써 사람은 자란다.
40넘은 시누, 시아주버니가 정신적, 경제적 독립을 못한 건 그 반증이겠다.
 
학원은 내가 15년을 몸담아 온 일이고, 남편의 영역은 아니었다.
남편은 나보다 더 일을 잘해서 인정받고 싶었지만 내가 너무 잘해서 주눅이 들었었단다.
그래서 혼자 독자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시켜 보고 싶었다.
 
남편에게도
"당신은 한국에서 시간관념 없고 무능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는데, 나는 결국 이것이 당신이 예전부터 해 온 행동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고정관념을 갖게 된 거라고 생각해. 이제, 아무도 당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지낼거야.
그 사람들은 당신이 누군지 몰라.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당신에게 갖는 생각들은 예전의 당신에 대한 편견 없는
온전한 당신의 지금 모습이야. 만일 그 곳에서도 시간관념없고 무능하다는 평판을 얻는다면 그냥 당신은 그것밖에 없어.
그냥 그 정도인 사람인거지. 근데 내가 아는 Patrick은 그런 남자는 아닌것 같아."
라고 이야기 했다.
 
그래도, 밉고 눈치없고 시댁 가운데 역할 못하고 게으르고 무기력한 그런 남편이지만 믿어줬다.
내가 생각한 Patrick은 그 무기력한 Patrick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인생을 통틀어 사랑받고 배려받고 인정받고 성공한 경험이 없어 자존감이 낮은것에서 꽤 많은 문제들이 기인했으니
이제 한 번쯤은 있는 그대로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Patrick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그가 여기서 엄청 잘 나가고 영어가 유창하고 경력이 있어서 간 건 아니라고
당신들도 기회가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싶어서였다.
내 남편 Patrick은 잘난 남잔 아니지만 아직 제대로 날개를 펴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국에선 오히려 Loser쪽에 속한 편이었고.
나이는 40이 되어가는데 뭐 하나 할줄 아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취미도 없고 꿈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 살아내는 덜 큰 남자.
그가 내 남편이었다.
 
그런 Patrick의 뉴질랜드 유학 5개월차의 근황이다.
 
Patrick의 학교에서 학생 중 한 명이 암에 걸려 자선바자회가 있었다.
같이 플랫하는 악쉬랑 램이 Patrick 옛날에 성악했다고 소문을 퍼뜨려
학교 관계자가 바자회에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단다.
남편은 음악 그만 둔지 10년이 다 됐다며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3곡을 불렀고, 그에 따라 학교에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 가능한 바우처를 지급받아
악쉬랑 램이랑 먹고 왔단다.
 
유학원에서 한국 사람 하나도 없는 학교에 꽂아줘 영어도 빠르게 늘고 있고
친구들도 생겨 잘 지내고 있어 다행이다.
게다가 자기가 세계적 테너가 되고 싶었던게 어려운 이들을 돕게 하는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 였다고 이야기한 남편이라
그 목소리를 원하던 용도로 사용할 기회가 생겨 너무 다행이다.
이 때 캐쥬얼 잡 얻었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그것보다 남편이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게 너무 기뻤다.
뉴질랜드 방송나오고 총리 온다고 한건 학교 관계자의 뻥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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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ck은 지금 현재 코보(?)라는 웨스턴식당에서 일한다. (학교에서 유일하다고)
이탈리안 식당인데 첫 플랫에 같이 있던 샘이라는 이탈리안 헤드쉐프가 있는 곳이다.
2달 정도 인턴으로 일했는데 돈 받고 일하던 인도 쉐프가 나가면서 계약을 했다.
이 식당은 사장, 매니저, 쉐프가 모두 이탈리안인데 이탈리아 유학 준비때문에 이탈리아어 공부를 해 둔 것이 도움이 됐다고.
그리고 한국에서 주방 경험이 전무한 Patrick이어서 원래 최저임금으로 (15.25$)해야 하는데
16$에 계약. 코미쉐프 정도 수준이라고 한다.
너와 오래 가고 싶고, 주당 20시간 이상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20시간 까지는 택스 16, 그 이후는 캐쉬 13불 이렇게 일단 하고 있다고..
 
그리고 한국 여자분과 영국 남자분 커플이 운영하는 타이거버거에서도 일했는데
첫 날에
"Fucking awesome kitchenhand!"
칭찬 받았다고 자랑자랑 ㅎㅎ
결국 거기보다 코보가 더 나은 시급을 준다 해서 대우가 더 나은 곳으로 갔지만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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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근처 벽화
 
7월에 겨울이라 겨울 옷 보내주면서 깜짝 선물로 라면이랑 즉석밥 보내줬더니
불닭볶음면이랑 비빔면 전도사가 됐다.
이탈리안 식당에서 샘이 자기 매운거 잘 먹는다고 트라이 해 본다고 하더니
불닭볶음면 한 젓가락 먹고 포기.
매니저는 다 먹고 자기 할아버지는 이거 10배는 맵게 먹는다고 허세까지!!
 
악쉬는 불닭볶음면이랑 비빔면 맛있다고 한국인이 된 느낌이라며 잘 먹는단다.
가장 인기 없는건 사리곰탕면이라고.. 짜파게티도 그저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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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면 먹는 악쉬
"Korean noodle is awesome!" 했다고.
 
그리고 수업하면서 이제 빵도 만든다고 자랑..
피자도 만들고 파스타도 만들고..
참.. 독일 있는 동생이랑 다른 것이
 
동생은 "누나, 우린 지금 당장 벤츠도 살 수 있어" 이러고 자리 다 잡았는데도
매일 먹은거 보내면 부추김치, 김치찌개, 떡볶이 이런거 먹는데
Patrick은 맨날 파스타, 피자, 햄버거 이런거.. 김치 안 먹고 싶냐 물어보면 필요없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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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직접 구운 빵이랑 피자라고 맛있다고 자랑자랑
 
Patrick은 지금 이탈리안 식당에서 일하는 틈틈히 타이거 버거에도 도와주러 간다고 한다.
전화오는 시간을 보면 대충 밤 1시 다 돼서 집에 들어가는 것 같다.
학교 끝나고 일을 해서 그런건가.. 어쨌든..
 
Patrick이 말하는 뉴질랜드 Boss들이 서로 자기를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
일단 한국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건데..
시간 약속 잘 지키고, 한창 바쁠 때 주방에서 화상을 입었는데 드레싱 할 시간도 없어서
그냥 장갑끼고 일을 했다고..
그리고 손을 뱄는데 밴드 있냐고 물어봤더니 없다해서 그냥 천으로 칭칭 동여매고 일했다고.
그런 거 보고 한창 바쁠 때 펑크는 안내겠다 싶어서 선호하는 것 같다고 ..한다.
 
타이거버거 그만두면서 학교 친구 인도애랑 램 친구 베트남 애를 추천했는데
4시 반 출근에 둘 다 4시 14분 이때쯤 문자로 못간다고 두 번이나 그래서 너무 화났다고.
 
성실하고 근면하고 하는건.. 만국 공통인 듯..
나도 열심히 사업하고 남편도 잘하고있고..
우리 애기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우리 가족 홧팅..
 
Post Script
유학원에서 말씀하시길 현재 10명중 1명 정도 이렇게 될까 말까 한다 합니다.
상위 10% 안에 드는 진행과정이라 하네요.
한국인들 아예 관계를 안 맺고 한인들 쪽으로는 고개도 안돌리고
키위와 이주한 사람들 위주로 인간관계 맺으면서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하네요.
 
출처 http://m.blog.naver.com/lordara/220761310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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