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재미있다는 소문이 많아서 큰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읽다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될놈될안될안이었습니다. 참나… “하루 종일 너의 축축한 보지만 생각해”라고 편지를 보내도 될놈은 되더군요;;; 아…쓸데없는 소리는 자제하고 저의 감상을 적어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읽는 내내 아주 재미있었지만 엔딩은 많이 아쉽습니다. 일단 이야기의 컨셉이 무엇을 강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면 누가 이길 건지 보여줘야하고 인어공주가 칼을 들었으면 왕자님을 죽이든지 자신이 거품이 되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한다는 얘기죠. 먼저 1장의 브리오니가 로비와 세실리아의 밀당?을 오해해서 로비에게 누명을 씌운다는 이야기는 아주 명확하게 다음 이야기를 강제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중에 소설 전체를 읽고 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려집니다. 극복 못한다. 이게 답이지요. 이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가막히는 방법으로 이 상황을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라면 다른 쪽에서 독자를 충족시켜줘야 합니다. 뭔가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지죠. 그 다른이야기가 어떤 성과를 거두었느냐가 거의 이 소설의 성패를 결정할 겁니다. 일감으로 떠오르는 것은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이 이 사건들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인데요. 작가는 여기에 더해서 브리오니 개인의 성장과 결자해지에 좀더 무게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목이 속죄니까요. 아무튼 그 이후의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2장에 나오는 로비가 다이나모작전 중에 겪는 이야기들은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충분히 이야기할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파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기 위해 돼지를 잡는 이야기나 군중의 광기에 의해 죽을 수도 있었던 공군 행정병을 탈출시키는 이야기가 그런 것들이죠. 이것들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교회장면과 성격이 좀 비슷합니다. 전체 서사에는 별 관련이 없지만 그 자체로 재미있는 것들이죠. 이 사건들이 전체 이야기와의 유기성을 가지려면 로비와 세실리아의 관계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데 직접적으로 그런 것을 만들기는 힘듭니다. 이언 맥큐언이 참 대단한게 로비가 편지에다가 어떤 일은 적고 어떤 일은 적지 않는가를 통해 그것을 해내더군요. 편지를 통해서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시간을 잘 견딜 수 있게 나름대로 현실을 편집합니다. 뭐 어떻게 보면 편리하게 보일 수 있는 방식이지만 어쨌든 정확하게 주제에 접근하면서 정서적인 효과도 충분해서 저는 굉장히 좋은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사이사이에 죽이는 문장들이 채워져 있습니다.
가장 관능적인 기억들 - 서재에서 함께했던 몇 분과 화이트홀 버스 정류장에서의 키스 - 은 너무 자주 불러내어 이젠 그 색깔이 바래버렸다.
3장은 브리오니가 결자해지를 위해 행동에 나서는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1장의 이야기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량을 브리오니가 어떻게 바로잡으려고 하는가가 아니라 1장의 사건이 탈리스 자매의 삶과 로라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에 할애한 것은 탁월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1장의 질문에 대한 해답임과 동시에 의미를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치 행복절대량 불변의 법칙이 이 세계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행복절대량 불변의 법칙이 이야기에서 활용된 좋은 예는 에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입니다.) 브리오니가 이런 현실을 바라보면서 윤리적 책임을 느끼는 것 까지는 필연입니다. 브리오니가 롤라의 결혼식에 찾아가는 장면은 꿀잼이죠.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나이 든 브리오니가 아라벨라의 시련이 초연되는 것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속죄를 했느냐 안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엔 여러가지 관점이 작동할 수 있습니다. 속죄를 하지만 너무 늦게 해서 무의미하다라던가, 속죄를 끝끝내 하지 못했지만 어떤 현실적인 효과?가 있었다던가, 속죄와는 무관하게 세실리아와 로비가 행복했는지 어쨌는지가 중요하다던가. 어떤 의미가 발생하든 그 의미는 1장의 사건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고 그 의미를 결정하는 데에 브리오니의 행동이 영향을 미쳤겠죠.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반전이 나옵니다. 작가는 3장에서 로비와 세실리아가 재회했다는 것은 소설 속 이야기고 로비는 돌아오지 못했고 세실리아도 공습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반전으로 사용합니다. 반전이 사용된 이 후에 독자가 재조명할 수 있는 것은 브리오니의 태도와 행동의 의미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브리오니 나쁜년 만드는 거죠. 여기까지만 한다면 이것은 소설의 결론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소비할만한 텍스트가 끼어들 여지가 굉장히 많습니다. 공리적인 목적이나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데도 윤리적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가? 나의 죄책감이 해소된다면 그 역시 어떤 이익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요런 질문들이 바로 튀어나와야죠. 입아프지만 참… 이야기는 의미를 소비해야죠. 깜짝 반전만 친다고 이야기가 되는 게 아닙니다. 비슷한 증상으로 예감은 반드시 일어난단가 제목이 정확히 생각안나는데 줄리언 반스의 부커상 받은 그 소설 엔딩이랑 증상이 똑같습니다. 반전은 앞에 했던 이야기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환기시키고, 관점을 제시하고 뭐 이런 역할을 해야합니다. 뭐 깜짝 놀래키기만 하면 재밌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이 끝끝내 아무런 결실도 가지지 못했고 잠깐의 행복도 누릴 수 없었다는 사실이 주는 슬픔, 안타까운 감정이 강력하다고 해서 소설이 스스로 강제한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저라면 브리오니가 가족파티?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이라도 만들어 넣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말하겠죠. 할머니 벌써 뇌졸증 증상 보이시네…브리오니 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했단다…뭐 이러겠죠. 그리고 상상력과 자의식이라는 폭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놓고 썰을 풀면 됩니다. 뭐랄까 이 엔딩은 클리쉐를 피하기 위해, 혹은 너무 클리쉐를 의식한 나머지 해야할 것을 안하고 있습니다.
나름 생각을 정리한답시고 써본건데도 두서가 없군요. 이런 과격한 주장을 할 때면 항상 반대쪽에서 스스로에게 공격을 해봅니다. 이정도가 충분한 것 아니냐? 너의 그 비판은 과도한 것이 아니냐? 뭐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거죠. 하지만 소설이 본질적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누가 나서서 니가 그건 잘못본거야, 니가 알아차리지 못한 거야라고 얘기해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