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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곁들인 이런 저런 고려와 몽골에 대한 이야기들의 정리
게시물ID : history_123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8/4
조회수 : 127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28 13:55:53
 
지금까지 적어온 글들 중 고려와 몽골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 정리해볼까 합니다.
 
 
20090923000129_0.jpg
 
1. 일단 먼저 적자면 심양왕이라는 작위는 지금의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에 대한 권리입니다, 그러니까 요녕성 일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게 아니라 심양이라는 도시와 그에 수반되는 지역에 대한 권리만을 준것이지요.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상기의 지도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습니다, 네 대도와 동방 3왕가의 영지 중간 지역으로 좋게 말하자면 인계 철선입니다,
 
고려와의 전쟁이 몽골로서는 유별나게도 당사자로서는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비교적 온건한 전쟁을 치룬것도 이러한 까닭인데, 요나라 그러니까 거란과 송나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동방 3왕가와 몽골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가질수 있는 지리적 요건때문입니다.
 
 
 
MongolEmpire.jpg
이훈1_~1.JPG
 
2. 대충 그리자면 저 정도가 옷치긴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 3왕가의 영역입니다, 화북 이외에 강남지역에 대한 것도 있는데, 급하게 그리느라 사실 안흥령 산맥의 위치도 가늠하지 못한것에서 볼수있지만 전혀 표시가 안되어 있네요.
 
다시 그리기는 참 시간이 애매하니 넘어가겠습니다, 일단 안흥령 산맥의 위치는 별개의 그림으로 표기하였습니다, 틀린 부분이 있고 많이 조잡하지만 그냥 이런게 있구나 하고만 생각해주세요 orz
 
대략적으로 몽골과 만주를 가르지르는 안흥령 산맥의 동쪽 지역과 북만주 일대가 전부 그 들의 강역이었습니다.
 
서방 왕가에 비하자면 작은 영역이라 할수 있지만 그 위치를 놓고 볼때 원나라에게 서방왕가와 다르게 큰 걱정 거리가 될수 밖에 없습니다,
 
첫째로 이 들에게는 몽골 귀족들의 힘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쿠빌라이의 사례에서 볼수 있듯이 대칸의 작위를 놓고 볼때 계륵과도 같았지요, 두번째로 매우 인접해 있었습니다, 서방 왕가야 뭐 거리가 거리인 만큼 또 그 들은 주변에 신경쓸게 한두가지가 아닌터라 중앙정부 사이에 별다른 영향이 없었지만 이 들은 달랐습니다.
 
경제,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 지척에 위치하였으며 힘도 강성하여 원나라 중앙정부에 속한 까놓고 말해 지방 정부이지만 명분 외에는 이 들을 강제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특히나 그 들 셋이 서로 상반된 입장으로 움직인다면 모를까 가장 강성한 옷치긴 왕가를 중심으로 결속되어 사실상 동방 3왕가는 하나의 영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로 나얀의 시대에 접어들면 조금 과장되있기는 하지만 나머지 카치운과 카사르 왕가의 민호를 모두 얻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3. 그래서 고려가 중요합니다, 바로 턱 밑에 드리워진 비수와도 같았으며 원나라와 연계하여 동방 3왕가에 대한 미묘한 균형을 이룰수 있었지요,
 
수탈이나 이런 저런 문제가 많습니다만 심양왕의 작위 역시 부마국의 위치와 함께 황금 씨족의 자리 등과 같이 명분적인 힘을 안겨주기 위한 조치입니다, 실상 국력을 비교하자면 심히 미흡하지만 동방의 왕가들이 중앙 정부와 일단은 온건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방관할수 밖에 없었지요.
 
물론 그 들이 중앙 정부와 병행하는 수탈이라던가, 서해안 일대의 영향력이라던가 하는 것은 몽골에서 행하는 원정의 전통적인 측면에서 당위성을 가지는 씁쓸하지만 당연하고 부차적인 문제이지요.
 
 
4. 그렇다고 해서 고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관계를 가지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고려는 일단은 부마국이지만 황금씨족에 이름을 올린 자주적인 국가였고, 사회적인 위치만을 놓고 볼때는 동방 3왕가와 대등했습니다, 당연히 외교 상대는 장인어른의 나라인 원나라이지요.
 
 
5. 화제를 돌려 정리해보자면 봉분의 기준은 간단합니다, 1. 징기스칸이 내린 기준인 동쪽은 형제들에게, 서쪽은 아들 들에게, 2. 재산공유전통 즉 주체가 누가 되었듯 몽골의 원정이 가지는 전통인 원정에 참여한 사람에게 전리품을 분배해준다.
 
 
6. 사실 테무게 옷치긴이후로 옷치긴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사라집니다, 물론 말자상속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만 어느 정도 타협을 이룬것도 있고 하지만 본명보다 별명이 더 유명한 사람이나, 그 별명이 고유 명사화 된 것은 옷치긴 왕가가 유일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재산을 더 많이 배분 받은 사유에서도 보이는데, 막내인것을 떠나 징기스칸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차가타이, 톨루이, 옷치긴이라는 원나라 최고의 가문 셋을 놓고 볼때 어찌보면 가장 뼈대가 있지요.(...)
 
 
7. 통혼으로 맺어진 관계는 비단 고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인들의 땅에서 그토록 가혹한 수탈을 감행하였음에도 별 탈이 없었던 것은 그 지역의 군벌, 유지등과 맺어진 혼인 관계에 근거합니다, 부민들만 빼면 왕가와 군벌,유지들 서로 간에 모두가 행복한 계약이었지요.
 
 
8. 원나라로서는 구휼을 위해 지급하는 비 정기적인 지원금과 연단위로 지급하는 정기적 지원금으로 왕가들을 통솔하려 했습니다만...근본적으로 불가능 했습니다, 이미 화북과 강남을 비릇한 왕가의 영지들에서 거두어들이는 물산과 부는 중앙정부에서 자립이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지요.
 
 
9. 다루가치는 두 가지 임용 방식이 있습니다, 왕가에서 가신을 임명후 중앙정부에 결제받는 방식과 우리가 아는 중앙정부에서 직접 보내는 방식인데, 수탈의 역사를 통해 볼때 의외의 사실이나 대개 민족과는 무관하게 실무진인 만큼 능력 위주로 선발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치케치, 왕부라 불리는 공무 일체의 사무를 담당하는 왕가의 관리 역시 민족과는 무관하게 능력 위주로 선발되었는데, 중앙정부에서 보내는 방식과 왕가에서 직접 선발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지요.
 
 
10. 그렇다고 해서 왕가에서 무작정 다루가치를 보내 수탈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세목에 관한 법률 조항은 준수해야 했으며 열매가 아닌 과실수를 베는 우는 피해가야만 했습니다, 또한 화북과 다르게 강남의 땅은 중앙정부를 통해 배분되었습니다, 일종의 주식이라고 할까요?
 
 
빼놓은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질문주시면 답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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