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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치긴 왕가에 대한 간략한 정리 네번째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3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8/4
조회수 : 98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27 21:37:10
705px-China_Hebei_svg.png
 
옷치긴이 분봉 받은 화북의 땅을 보자면 산동성의 익도현과, 하북성의 노룡현과 난현입니다, 다른 동방왕가들도 이 지역들 그러니까 상기 지도에 표시된 땅들의 주현을 분봉받았는데, 이 화북지역의 땅들은 징기스칸 시기 분봉받은 동북의 유목 지역과 다르게 농경지가 대다수를 이루는 지역인터라 조세 징수에 매우 유리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들은 당연하게도 이러한 오호사료五戶絲料와 또 강남호초江南戶鈔를 왕가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는데 물론 그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외에는 원나라 중앙정부로 부터 세사歲賜와 사여賜與를 통해 재정을 충당했습니다.
 
사족으로 이 세사와 사여가 무엇인지 알아보자면 세사는 연단위로 지급된 쉽게 말하자면 생활에 보태쓰라고 주는 봉급 같은것입니다, 사여는 기근등에 대한 구휼을 목적으로 비 정기적인 성격을 가진 지원금이었지요, 원나라 정부는 중앙 집권화를 위해 이러한 지원을 대폭 강화하였으나 별반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원나라의 재정만 날이 갈수록 악화시켜나갔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것이 왕가들에게는 이미 경제적 기반이 충분히 있었으니 말이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자면 왕가에서는 이러한 식읍에 대하여 정해진 세금뿐만 아니라 비 정기적, 정기적 가릴것없이 온갖 목적의 세를 부과하여 식읍의 부민들을 고통스럽게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탈 없이 돌아간 이유는 그 들의 통치 정책에 기인하는바가 큽니다.
 
보통 왕가의 신하를 그것도 민족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이 된다면 가리지 않고 다루가치로 뽑아 식읍의 통치를 맡기는 것도 그러한 정책중 하나이겠지만 그 지역의 유지들, 그러니까 몽골의 화북 점령 시기 몽골 정부에 귀부한 한인세족들로 기존에 보유한 세력을 인정받아 지배계층의 지위를 상실하지 않았던 이 들의 자제들을 왕가로 보내어 볼모 + 세뇌?의 작업을 거치는 것도 통치 정책의 일환이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식읍의 군벌들과의 복잡한 교류 관계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민왕~2.JPG
 
 
바로 결혼입니다, 상기의 그림은 노국공주와 공민왕이라고 하는데, 그림의 진위여부는 둘째치고 그러한 것보다 스케일은 좀 작지만 사람간의 결속을 통한 관계 개선은 원나라 치하의 한족들 간에 또는 그 들과 원나라 귀족 간에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던 셈이지요.
 
아무튼 이러한 군벌들 즉 통제력이 미치지 못한 화북지역에 출현한 향촌자치집단의 수령들과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 식읍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통제력을 강화시키며, 정치적 역량을 증대시킨다는 서로에게 매우 유익한 '거래'가 될수 있었습니다,
 
가령 옷치긴 왕가에서 화북의 한인 군벌 이단에게 왕가의 여식을 시집보낸다거나 이단의 적자를 식읍의 총관으로 임명한다거나 아릭 부케와의 대립시 이단의 군세와 연합을 하였다는 것 등은 이러한 사안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수 있겠지요.
 
이 웃치긴 왕가는 8만호를 소유한 툴루이의 말자 아릭 부케와 6만 8천여호를 가진 우구데이가의 구육 다음으로 많은 6만 2천여호의 오호사호五戶絲戶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한족의 땅에서 거두어들인 수입은 위에서도 적었지만 왕가의 재정을 늘 충만하게 채워주었습니다, 물론 쿠빌라이 칸 시절에 분봉 받은 강남의 땅들은 이처럼 소유권이 왕가에 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귀속되어 있는 형태였지만 나라에서 거두어 들인 수입의 일정량을 관리하는 왕가에게 따로 돌려줌으로서 왕가의 재정에 있어 적지 않은 수입원이 될수가 있었지요.
 
 
두서 없이 달리는 글이지만 이 글의 나머지는 다음 글에 이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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