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은 명백하게 하지만 드러내지 않는 기독교 영화다. 물론 영화가 전적으로 기독교에 올인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를 베이스로 깔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영화를 만들고 각본을 쓴 나홍진 감독은 기독교인이다.(영화를 보며 그 사실을 확신했는데 실제 언론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그가 지금 현재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기독교에 심취했었고 신실한 믿음을 가졌었으며 그에 따라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 영화의 얼개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여러가지 영화적 트릭이 있을 뿐, 스토리가 복잡하진 않다.
이상현상을 겪는 마을. 그중 한 가족. 이상현상의 실체로 추정되는 존재들. 그리고 파국
영화 곡성속 세계의 대전제는 신과 악마의 존재가 있다는 점이다. 성경의 구절을 영화 시작과 동시에 제시했을때 부터 곡성은 신과 악마의 존재 유무에 관한 논쟁은 이미 제껴놓고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서 일광과 외지인의 관계에는 현혹될 필요가 없다. 일광은 해석의 논란없는 악인이고 그가 처음부터 악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단순히 사회에서 나쁜놈이라 말하는 악인이 아니라 진정한 악마에게 자신의 일부를 저당잡혀있는 악인이다. 하지만 그의 육신은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나방떼거지에 하나에 도망도 못쳐서 다시 돌아오고 무명의 앞에서 무기력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는 악하지만 인간임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종구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장독에 있는 죽은 까마귀를 없애버리는데 까마귀는 성경에서 성스럽다고는 할수 없으나 불길한 징조는 전혀 아니다.
성경에서 선지자였던 이사야(아이재아)를 먹이고 구하였던 것은 까마귀였다. 신의 대리자이자 신의 전령. 악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껄끄럽다.
외지인도 해석에 따라 다를수 있겠지만 그 또한 악이다. 자신이 만든 좀비 하나를 떼거지로도 당해내지 못하는 종구일행임에도 그는 종구일행이 자기를 쫓자 처절하게 살기 위해 도망친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이인간의 약점을 보여주지만 죽은 뒤 부활하여 마지막에 부제가 찾아왔을때는 자신의 악마적인 실체와 스티그마(성흔)를 보여준다.
여기서 나홍진 감독은 사실 매우 발칙한 질문을 던진다. 이는 어찌보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만큼 발칙하지만 곡성이 담고 있는 의미가 너무 많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손바닥에 스티그마가 있는 악인의 부활은 정말 공교롭게도 예수가 죽고 부활하였던 모습과 완전히 똑같다는 점이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과연 성경에서 부활한 예수는 진짜 예수인가?
매우 도발적이고 발칙한 질문이지만 해석의 여백이 크기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기독교적인 시각에서는 한번쯤 의심해볼만하고 나는 감독의 의심이 전적으로 투영되었다고 본다.
사실 이는 감독 개인이 가진 성경에 대한 의문일 것이다.
과연 성경에서 죽었다가 살아나 자신의 성흔을 의심많던 제자 도마에게 확인시켜주었던 그는 과연 진짜 예수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재림을 약속했던 예수는 이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조금의 낌새도 보이지 않고 있다. 온갖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은 약해져가는데 그가 약속했던 재림은 저 멀리 고개를 들어봐도 흐릿한 형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캄캄함속에서 감독은 던진다. 재림을 약속했던 예수는 정말 일까? 악마가 제자들을 현혹시켰던 것은 아닐까?
손에 못을 박은 적도 없는 외지인의 손에 보이는 못자국은 예수를 자칭하며 자기는 부활했다 말했던 존재가 사실을 예수가 아님임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사실 부제가 겁도 없이 악마를 죽이러 찾아간 마지막씬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 죽은 자를 찾아가고 그것을 단번에 찾아낸다는 것 또한 그렇다. 물론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면 이해될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 씬에서 정말로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마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 죽이러 갔던 부제가 악마에게 역으로 죽임을 당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오히려 자기가 믿어왔던 신의 부활이 실제로는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악마의 손의 스티그마. 생명이 죽는게 아니라 부제의 정신을 지배했던 신념이 죽임을 당한다.
감독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또하나 넣어두었다. 사실 영화내내 십자가가 두번 나온다. 부제의 삼촌이 맸던 십자가와 부제가 동굴로 들어가며 들고 있던 십자가. 사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최고의 상징물중에 하나로 쓰이고 퇴마와 관련된 매체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템이다.
하지만 곡성의 악마들은 이러한 십자가를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왜일까?
사실 스티그마와 예수, 십자가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기독교적인 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십자가는 그 고대의 이스라엘에서 현재의 전기의자, 프랑스의 단두대와 같은 최악의 형벌의 도구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대부분 손으로 알고있고(실제 영화에서도 손에 자국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아 움직이지 못하면서 피를 철철흘리게 하고 죽을때까지 매달리게 하여 관중들에게 모욕당하고 돌을 맞는 형벌. 시민들은 그 형벌의 공포를 생생하게 체험함으로 죄를 저지르지 말아야한다는 교육당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효수와 비슷한 개념.
그런 형벌도구가 왜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고 퇴마물들에서 성스러운 도구로 떠오르게 됐냐면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가라는 최악의 극형도 극복하여 인류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인간의 육체를 벗어나 신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고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진 성경중 신약 교리의 핵심이기때문이다. 죄를 극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대한 권능. 당연히 모든 악마들은 이러한 예수의 권능앞에서 두려움을 느낄수밖에 없다.
하지만 곡성의 악은 그 십자가 따위는 전혀 연연하지 않은채 부제의 삼촌을 조종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고 부제 또한 마찬가지의 운명으로 이끈다. 이는 예수가 결국 십자가라는 인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성으로 부활했다던 예수가 진짜 예수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더욱더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예수는 부활하지 못했기에 십자가를 매달고 다니는 인간들은 일광이나 외지인에게는 결국 자신들의 장난에 놀아난 존재고 그들에게 십자가란 결국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막대기 두개일뿐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사실 이 또한 곡성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곡성에서 사실 진짜 중요한 것은 무명이다. 감독은 무명을 중심으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무명은 신 혹은 신의 대리자이다. 천사라고 불러도 좋다. 흰색옷은 다소 틀에 박힌 이미지이지만 다른 색의 옷을 쓴다는 것도 우습다. 신이든 대리자든 여튼 중요한 것은 신의 권능이 무명에게는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명이 신의 권능을 선보이는 경우는 오직 한번. 일광을 물리치는 순간이다. 악의 지배속에 종구를 통하지 않고 무언가를 행하려는 일광을 무명을 오직 존재만으로 막아낸다.
당해내지 못한 일광은 도망친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든다. 왜 무명은 저 엄청난 권능을 오직 일광을 만났을때만 쓸까?
이는 사실 크리스천이 가지고 있는 아주 오래된 의문을 담았다.
'신은 왜 때때로 방관하고 관심없으며 무심한 것 같은데 왜 어떤때는 그렇게 자세하게 개입할까?'
실제 성경에서도 신이 개입하지 않아 신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은 매우 많다. 대부분의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중에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어 잘 모르지만 사실 성경에는 신이 돕지 않아 이른바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 혹은 개인이 신은 원망하는 경우는 셀수 없을만큼 흔하게 나온다.
이러한 고민은 현대의 크리스천들에게도 계속된다. 왜 그는 도울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을까? 그는 방관자인가 진정한 신인가?
그럼 이제 역으로 다른 고민이 든다. 왜 무명은 일광에게만 자신의 권능을 사용했을까? 그것은 마치 욥기를 떠올리게 한다.
욥을 괴롭히되 그의 목숨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였던 신. 일광은 무엇인가 정해졌던 선을 넘으려고 했다. 자신의 일부인 악의 생각에 따라..
하지만 그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종구를 파멸에 이르게 하되 일정한 선을 넘지말고 종구의 선택에 기다리라는... 아이러니하지만 이 상황.
욥기를 보면 알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매일 계속된다.
악마는 욥이 가진 신에 대한 믿음을 배신하게 하고 싶으나 목숨을 취하는 방식으로 그의 영혼을 타락하게는할수 없다.
일광은 종구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싶으나 그것은 오직 종구의 선택에 기댈뿐이다.
여튼 무명은 일광을 물리쳤으나 결국 최종 씬에서는 그를 적극적으로 구해주지 않았다.
최종씬은 논리라는 측면에서는 답답할정도로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광을 존재로써 압도해버리는 무명은 왜 적극적으로 종구를 구해주지 않을까?
이는 신의 존재와 그의 능력, 생각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여러개 던져준다. 이것이 영화 곡성의 포인트.
무명이 적극적으로 종구를 구해주지 않는 장면을 보면 성경에서 신이 자신이 만든 인간, 자신이 선택한 민족에게 관심이 있다면서 개입하되 왜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는 이해할수 없는 구절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하지만 사실 무명은 은연중에 줄기차게 종구를 구해준다. 일본인은 귀신(악)이라고.. 피하라고...
하지만 그 답에 대해 종구는 반신반의 할수밖에 없다. 무명의 말에 대한 증거도 없을뿐더러 무명의 존재자체도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믿음을 가지라 하지만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종구의 상황이 성경에서 신 또한 자신을 믿고 따르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얘기와 무엇이 다를까?
신의 가르침대로 살라고 하지만 세상은 신의 가르침대로 사는 자들이 성공한다는 증거도 없고 신을 모독하는 자들이 잘나가고 오히려 신을 따르는 자들이 고난을 겪는 모습. 그러다보니 크리스천들은 신의 존재자체조차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만약 있다해도 세상의 고통을 신은 전혀 해결해줄 맘이 없는것처럼 느껴지는 수많은 순간들. 왜 방관하는지 의심되는 순간. 결국 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다가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는 순간들.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 곡성은 바로 이어 신에 대해 또다른 질문을 던진다.
곡성을 보면 좀 이해안되는게 마지막에 종구에게 닭이 울기전 들어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 때 들어가지 않았어도 이미 종구의 아내는 죽었고 효진이는 미쳐있다.
대체 왜 무명은 종구 본인에게만 집중할까?
무명은 최종씬에서 종구 개인에 대한 목숨만을 말하지 아내의 죽음을 해결해줄 맘은 없었다.
일본인을 귀신이라고 알려주고 조심하라하였지만 그의 딸 효진이가 심각한 고통을 겪을때 이를 해결해주는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무명에게는 오직 종구의 목숨만이 관심이 있다.
이를 잘보면 [효진의 고통와 아내의 죽음 = 세상의 고통], [종구의 목숨 = 삶의 구원]으로 은유할수 있다.
데살로니가후서를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성경에서 신은 세상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 세상에 고통을 감내하고 자기의 뜻을 따르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만 말한다.
하지만 종구가 진정 바라는 것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효진이의 완쾌를 바랄지도 모르지만 여튼 무명은 그런것에는 관심이 없다.
성경에서 고난 따위는 마치 그냥 감내하라는 식의 신의 전언과 종구의 가족에는 관심없는 무명의 태도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더 웃긴것은 종구의 목숨을 구하기를 진정 바라지만 무명은 오직 말로 그리고 손을 한번 붙잡는 행위만을 할뿐이다. 그가 떠난뒤 울부짖는다. 왜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을까가 의심될 정도로..
이는 기독교에서 보여지는 신의 특징과 그에 가질수밖에 없는 의문을 매우 명확하게 드러낸다.
나홍진 감독도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신은 나를 돕는다면서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내 삶에 표적으로 확증하는 일따윈 일어나지 않을까?
성경을 보면 신은 엄청난 권능을 지녔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마구 억제하지 않는다. 로보트처럼 조종하지는 않는다.
그가 총애하고 사랑해 마지않던 이스라엘의 왕. 다윗(다비드)이 밧세바와 간음할때도 그는 막지 않는다. 지혜를 구하며 어릴적 그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솔로몬이 늘겅서 흥청망청 인생과 나라를 날려도 징벌하거나 되돌리려고 하지 않고 그의 자녀에게 고통만을 준다.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가두어 반강제로 의지를 꺽게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신 자신이 마음내키는대로 행할때뿐이다.
대부분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는 명목하에 그 어떤 표적도 기적도 행하지 않고 파국으로 달려가게 하거나 달려가는 것을 지켜본다.
종구가 무명과 일광의 얘기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평생을 품고 갈수밖에 없는 갈등의 완벽한 영화적인 표현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혹시 만약 신이 존재하다면 그가 세상을 다스리는 이 이해안되는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느냐에 대한 질문..
설득하되 결국은 종구의 자유의지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무명의 모습은 성경에서 비춰지는 신의 모습과 눈물날 정도로 너무 닮아있다.
이 답답하고 미치고 팔짝뛰는 의문속에서 나홍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악마의 고난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신에 대한 불신. 그 속에서 나약한 인간이 어찌 믿음을 가질수 있고 그의 뜻을 따를 수 있냐고 묻지만
나홍진 감독은 결국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하는게 인간일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야 종구의 목숨이라도 살릴테니.. 고난 따위는 묻어둔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