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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억) 우아하게
게시물ID : readers_256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빨간냄비
추천 : 1
조회수 : 72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07/07 1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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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비둘기들이 닭을 흉내내는 그렇고 그런 공원의 벤치 한 귀퉁이에 앉아 있다. 그가 입은 회색양복은 꽤 값나가는 원단으로 만든 것이어서 외려 그에겐 헐거워 보인다. 명예퇴직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류가방이 없는 걸 보니 출근을 가장한 채 공원에 나와있는 부류는 아닌 것 같다. 이미 돈을 꽤 모았거나, 전관예우로 한직에 머물면서 적당히 작아진 권력을 주무르는 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르게 친해지고 싶어진다. 그 우아한 권력의 꼬리라도 맛볼 수 있을지 모르니. 다가가 말을 걸어보기로 한다. 김재철 씨, 혹시 김재철 씨 아니십니까. 김재철이 누굽니까. 난 그런 사람 모릅니다.
 
 나의 예측이 빗나간 모양이다. 그럴 때면 아스트랄함을 느낀다. 아스트랄함이란 무엇인가. 저 머나먼 우주 한 켠의 가스성운이 뀌는 방귀냄새같은 것인가.
 이 범우주적인 당혹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벤치에서 일어나 간판들이 덕지덕지 묻은 상가들 틈새로 사라져간다. 어느 상가에서 흐르는 유행가가 그의 뒤안길에 울려퍼진다. 모두 날 가지고 매일 가만 안 두죠. 어딜 걷고 있어도 빨간 바닥인 거죠. 레드카펫같은 기분 모두다 쳐다보죠.
 출근할 때마다 레드카펫을 걸었던 당신. 쏟아지는 호소와 구호들에 짐짓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사라져간 당신. 우아한 당신. 머릿속엔 늘 화양연화가 흩뿌려지는 무용극의 라라라 장면들이 지나가는 당신. 그래서 법인카드로 고급호텔들을 라라라 긁고 다닌 당신. 월세를 걱정하는 신입기자들의 말문 따위는 어떻게 이젠 더 할 말이 없게 닫아버린 당신. 아, 참으로 우아한 당신.
 
 나도 우아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당신과 나는 뭔가 말이 통하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우아함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나는 당신에게 내 어린 시절의 꿈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사랑해요, 밀키-이쓰! 따봉! 온가족이 함께 투게더 투게더.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 아아아아- 야 이제 한다. 우당탕탕. 과일 좀 먹어가면서 봐 아주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가겠네. 어어, 얏 그런 건 따라하지 마!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어 이제 광주도 나오네? 지역이 추가되는 사이 제비족은 점점 더 우아해져가고 그런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가는 순정의 상대를 지켜보기만 하는 제비족의 고향친구는 괴로움에 밤마다 뒤척거린다. 아아 나도 서울 한 번 가 보고 싶다, 저봐요 저곳에선 뭔가가 벌어지잖아요 막 응 막. 막내야 넌 제비족 홍식이랑 촌놈 춘섭이 중에 선택해서 살아야 한다면 누구를 택할 거야? 당연히 홍식이죠 보이스비엠비샤쓰잖아요. 역시 넌 아직 인생을 몰라 저기 봐라 결국 저 사람은 저렇게 뒷골목에서 죽어가잖니. 아녜요! 누가 죽어요 라스팔마스, 라스팔마스로 간다잖아요. 그는 이곳이 지겨워졌던 것 뿐이에요. 나도 샤쓰를 찢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엄마 아빠 곁을 떠나 먼 곳으로 가서 살 거예요. 아얏! 과일이나 먹어!
 라스팔마스. 여기가 라스팔마스인가. 아냐 서울..도 아니구나. 경기도 한 공업도시의 자취방에서 샤쓰도 못 찢은 채로 스무살이 되었다. 혀를 끌끌 찰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부모님은 최선을 다하셨고, 이건 내 문제라고. 그분들은 내가 무작정 TV 앞에만 앉아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대화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학년 차이가 꽤 나는 형들과 부모님은 때로 저 TV에 나온 시위현장의 앞모습과 그 뒷면에 관해 긴 토론을 하기도 했다. 밥상토론이 100분 가까이 이어질 때면 뭣모르는 내게 발언권을 주기도 했다. 막내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러니까 서태지와 아이들이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일, 빨리 과일을 깎아다 줘.

 뭔가 벌어질 줄 알았나 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따위를 상상할 수 없었던 뇌 용량의 시기를 거친 10대 후반의 나는 깡마르고 상처받은 고집불통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구를 지키려면 서점에 쌓인 자기계발서들을 다 불태워야 해요. 전 그런 자서전이나 쓰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수학의 정석에 담긴 기쁨을 외면하는 겁니다. 과일 먹을래? 싫어요, 다 싫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한껏 세상을 싫어해봤자 아침해가 뜨면 지하철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노동자들을 맞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싫어하는 것만 많았지 어떻게 출근하는지도 모르는 촌놈이었다. 확 죽어버릴까. ..일단 배가 고프니 뭘 먹고 나서 생각해보자. 근데 밥은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누군가에게 뭘 물어보는 것도 잘 할 줄 몰랐다. 어머니 예 잘 지내시죠 그럼요 저도 잘.. 어떻게 진지는..? 네? 밥이요? 그럼요 잘 해 먹고 있죠. 근데 밥솥이 오늘따라 말을 잘 안 듣네요 이게? 네? 아.. 우선 플러그를 다시 꼽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시절 난 자기계발서 몇 권을 읽고 운 적도 있다. ..아니다 역시 이건 너무 부끄럽다 다시 얘기하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 난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며 지냈다. 어떻게든 20대로서 살아가려면 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을 텐데 10대 때 묵언수행이나 하던 놈이 그게 가능할까. 일단 라디오를 들으면서 생각하자. 근데 시그널음악이 참.. 바빠라 바빠 바빠 바빠라~ 이 바쁜 방송에 스님도 나오시네? 설마 핸드폰 연결인가? 천성산 도룡뇽은 뭐야? 먹는 건, 아니구나. 터널? 그런 문제도 있었군. 근데 이분은 스님하고도 어쩜 이렇게 꿀리지 않고 얘길 잘 하실까. 핵심을 회피하지도 않고, 본질을 흐리지도 않으면서,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것으로 어디로 (데려)가길 원하는지, 단박에 잡아내는구나.
 멋지다. 아나운서란 자서전같은 직업이라고 여겼던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몰라. 그래 그러니까 도룡뇽은 지켜야 하는 거지? 아 훈훈한 아침이야. 근데 잠깐, 네? 공사현장 담당관을 연결하겠다구요? ..왜요? 그 사람들 얘긴 왜 들려주는 건데요? 우리끼리 얘기 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들. 다른 사람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다른 사람들. 그들의 말, 그들의 한숨, 그들의 논리, 그들의 사정. 그들도, 상대방. 그러니 일단 더, 더 귀를 열겠습니다. 일단 잘 듣고 난 후에 얘기하겠습니다.
 
  손석희 씨 외에도 몇 분 더 있지만 지면상 그분들 모두를 불러오기는 어렵다. 10대 땐 싫어하는 게 그렇게 많았었는데 20대 땐 좋아지는 게 너무 많아서 걱정일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적에게 보내는 소환장을 잘 쓰는 것보다, 1장의 연애편지를 잘 쓰는 것이야말로 진검승부라는 것을. 그걸 깨닫게 해 준 그분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나쁜 인생을 살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 늦겨울. 아침엔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으며 시선집중을 듣고 저녁엔 요리를 해 먹으며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던 때. 밤엔 <놀러와>를 봐야지. 아차 오늘은 화요일이구나. 어제 집에 오자마자 기절해 버려서 착각했군. 그냥 <PD수첩>을 보자. 유재석 씨 안 나와도 볼 만 해. 오늘은 쪽방촌에 관한 이야기구나. 한두평 남짓한 방에서 겨울을 나고 계신 노인 분들이 보인다. 그 방에 항상 켜져있는 TV. 어릴 때가 생각난다. TV로 들어가겠어 그냥. 과일, 과일 먹을래. 잘 계실까. 지난 주말에 전화통화 했으니 괜찮을 거야. 퇴직하신 아버지가 지난 날의 불공정진행에 대한 댓가로 어머니 대신 과일을 깎으실 때도 있다는군. 저기, 아이돌 가요프로그램들이 깎여져 나오는 TV를 보며 저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이젠 싫은 건 귀찮고 좋은 건 버겁다. 그걸 더 생각하려면 글을 써야 돼. 서른이 얼쩡거리는데 뭔 놈의 글이람. 안 돼, 하지 말자. 나는 이제 어떻게 출근하는지 정도는 알잖아. 일단 자자구. ..오늘밤 꿈엔 도룡뇽 나왔으면.
 
 당신이 우아하게 이 사소한 즐거움들을 베어버렸다.
 
 2010년 여름, PD수첩 8월 17일 방송예정분은 법원이 기각한 국토부의 방송금지가처분신청을 사장인 당신이 낼름 받아들인, 아직까지도 이게 대체 뭔 일인지 잘 모르겠는 어쨌든 그렇고 그런 과정을 통해 방영금지당했고, 제작진 중 한 명인 최승호PD는 결국 해고당한다. 해당내용은 4대강 사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2012년 가을, 방송문화진흥회는 당신의 해임안을 부결한다. 그때 뉴스화면에서 맞닥뜨린 당신의 두 눈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모든 것뿐 아니라 공적자금까지 동원해야 (가능)했던 로맨스, 운명의 발길질에 걷어차이고 남은 가혹한 정신분열,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노구를 이끌고 전장의 프론트맨, 총알받이로 역사에 남기까지, 누구의 시선도 맞대응하지 못하는, 영향 아래 놓인 인간의 그 어떤 가능성이 담긴 두 눈.
 그 눈을 보며 나는 언젠가 당신을 다룬 극영화가 나올 것이라 확신했다. 그 눈에 담긴 비밀을 풀면 지난 MB정권이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행했던 온갖 비열한 짓들이 산사태가 녹듯이 와르르 관객들 앞에 쏟아져내릴 것이다. 핵심을 회피하고, 본질을 흐리면서, 상대방이 무엇을 물어봤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만들어, 결국 자신들의 목적을 소리소문없이 달성해버린 저 프론트맨의 협잡이 쌓인 눈.
 
 그 후 세 번의 가을이 지났고 나는 이미 많은 걸 잊어가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책임을 회피하는 얼버무림의 잔기술은, 확실히 는다. 이거, 눈이 침침한 지 잘 보이질 않네요?
 쥐꼬리만한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화양연화의 추억을 만들고 싶은 욕망도 꿈틀댄다. 직원들에게 더러운 말 좀 하면 어때. 이 실크같은 와인으로 혀를 씻어주면 되는 걸. 김양도 그렇게 생각하지? ..혹시 무용은 배운 적 있어?
 
 지난 밤 꿈에선 도룡뇽 대신 거울과 맞닥뜨렸다. 그리고 거기에 당신이 서 있었다.
 
 지금도 가능하기만 하다면 나는 그 거울을 깨부순 후 큰 유리조각 한 놈을 잡은 채 당신을 저잣거리에 끌고 나가 그것으로 우아하게 당신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 당신의 참수당한 머리를 한 손에 들고 외칠 것이다. 내가, 당신들이 스캐닝하던 이 내가 이 자의 목을 잘랐소. 그러니 나는 이 자와 통하는 부분이 없는 것이오. 똑똑히들 보았소? 아 유 낫 엔터테인드!? 그러니 나에겐 엄지손가락으로 ‘싫어요’를 누르지 마시오!  싫어요, 다 싫어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니체의 책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말.
 
 거울도 깰 수 없고, 자서전을 쓸 위치에 있지도 않은 나로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있는 힘껏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 미래가 되지 말아주세요.
 
 아니다. 손석희 씨가 알려주었듯이, 인본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그것을 둘러싼 시스템도 봐야 한다.
 
 나는, 프론트맨을 앞세운 채 우아하게 둘러처진 검은 장막 뒤에서 구경하는 방문진.. 아니 방문객을 가장한 당신들이 싫습니다. 내 어머니 아버지 형수님 형님들도 당신들이 그렇~게 싫다네요?
 
 연애편지 쓸 시간에 소환장이나 쓰게 만든 당신들, 놓치지 않을 겁니다. 쉽지 않은 시민들 그게 우리니까.
 
 
- 전 MBC사장 김재철은 2013년 봄, (그전 해 약 6개월에 달하는 MBC 사상 최장의 파업기간을 거치고
   그해 겨울 18대 대선에서 여당후보 박근혜가 당선된 후) 자진사퇴방식으로 물러났다. 나는 이 세 사건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 2015년 늦겨울, 김재철은 업무상 배임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 2016년 봄, 김재철은 MBC에 특별퇴직위로금 지급 소송을 냈으며 요구액은 2억3000여만원이다.
   그는 소송 당시 인터뷰에서 ‘해직자들에겐 죽을 때까지 미안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 최승호PD는 해직 이후 뉴스타파에서 활동중이다. 그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자백>은 지난 2016년 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별다른 제재없이 상영되었으며 이 작품의 상영 이후 영화제측에 가해진 외압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없다. 백주대로에 버젓이 대놓고 행해진 외압을 버텨야만 했던 영화제는 따로 있다.
 
- 2016년 봄, MBC의 장수 라디오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최양락의 재밌는 라디오>는 방송 14년만에
   폐지되었으며 DJ최양락은 5월 13일 금요일 마지막 방송 당시 ‘다음주 월요일에 돌아오겠다’는 인사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2016년 여름 현재, 까지도, MBC는 방송문화진흥회라는 재단에서 운영을 관할하며,
   이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진은 방통위, 즉 국가가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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