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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으로 드나드는 남자
“이 쓸모없는 놈.”
36년 동안 살아오면서 백수가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이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 부터는 매일 2~3회는 들었던 말이지만, 서른다섯 이후로는 거의 듣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아예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니트, 히키코모리, 방구석폐인, 루저의 공통점은 모두 이집의 외아들 백수를 지칭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백수에게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차피 안 들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이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안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욕한다는 말은, 단순한 경구나 조언이 아니다. 실제로 백수가 백수를 향해 욕을 퍼 붓고 있다. 백수의 성질 같아서는 당장 백수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데, 백수는 백수를 죽이면 혹시 백수가 죽을 지도 몰라 그냥 참고 있는 중이다.
지금 백수에게 싸가지 없는 욕을 하고 있는 놈은 3일 전의 백수 자신이다.
3일전 백수는, 큰맘 먹고 산 50인치 LED TV로 명작미드의 DVD를 정주행하는 중이었다. DVD는 물론 TV는 모두 백수의 아버지 카드로 긁었다. 어차피 사용하려고 만든 카드 아닌가? 안 쓰고 곱게 모셔두기만 하려면 도대체 카드는 왜 만든 건가? 쓰려고 만든 카드를 잠시 썼는데, 저렇게 한숨을 푹푹 쉬며 잔소리 하는 부모의 정신상태를 백수는 이해 할 수 없다.
취향에 꼭 맞는 미드 전집과 라면과 맥주에 넓고 깨끗한 50인치화면 까지 더해지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고작 시즌 4까지 밖에 못 봤는데 어느새 3일이 지난 것이다. 물론 그 시간동안 온종일 방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맥주와 라면을 가지러 부엌으로도 나가야 했고, 방광과 창자를 비워주기 위해 화장실도 다녀와야 했다.
시즌 4의 마지막화가 끝나는 순간 시간은 정확히 새벽 4시였다. 이제 잠시 취침을 취하기로 했다. 시즌 5는 좀 더 맑은 정신으로 보고 싶었다. 잠들기 전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다. 맥주는 이뇨작용이 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 그냥 참고 잠들었어야 했다. 그날 화장실에 가기로 한 결정을 백수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방문을 여는 순간 백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TV가 켜져 있었고 DVD가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히 껐는데……. 하지만 방문을 완전히 열고 방으로 들어선 순간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백수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다. 그 놈은 바로 백수 자신이었다.
사람이 정말 놀라게 되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나보다. 이 세계에 원래 존재하던 백수1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차원이동을 한 백수2는 한마디 말이라도 했다.
“억!”
백수 1과 2가 서로를 노려보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두 백수가 서로에게 달려들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이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평소 탐닉하던 일본애니메이션의 기괴한 설정을 너무 자주 접한 탓에 이 괴상한 상황에 조금 내성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도플갱어?”
“아닌데.”
“평행세계?”
“음, 그럴지도 모르겠다. 혹시 네가 사는 세상에서 너 취직했냐?”
“아니 그냥 백순데.”
“한심한 새끼.”
“지랄한다. 나도 기왕이면 잘나가는 내가 살고 있는 평행세계로 왔으면 좋았겠는데, 너도 백수지?”
“우선 앉아라. ‘웰컴투더리얼월드’다.”
“니미. 뭔 소리냐?”
“맥주 마실래?”
백수2는 백수1이 건네주는 캔맥주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홀짝이며 잠시 더 대화를 나누자 지금 이 상황은 평행세계가 아니라 시간이동인 듯 했다. 백수2는 3일전의 세상으로 떨어진 것이다. 백수1은 백수2가 3일전부터 보기 시작한 미드 시즌 1의 3화를 보는 중이었다.
“저 여자 스파이다. 나중에 배신해.”
“스포하지마!”
잠시 잡담을 나누던 백수 1과 2는 머리를 맞대 이 상황을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3일 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미래잖아. 뭔가 쓸만한 정보 없어?”
“3일 내내 DVD만 봤는데.”
“이 쓸모없는 놈.”
‘이 쓸모없는 놈.’
거의 평생을 들어온 말이지만 3일 후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온 백수2에게 이번만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갑자기 과거의 자신을 만나게 된 백수2는,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3일을 더 살았다며 근거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미래의 자신을 만나게 된 백수1은 미래에서 왔으면 도라에몽처럼 뭔가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느냐며 상대를 비난했다.
“그러면, 우리상황을 매스컴에 발표할까? 엄청 유명해 질걸? 일단 유명해지기만 하면 돈은 자동으로 굴러들어오…….”
백수1의 무언의 압박 때문에 아이디어를 내놓던 백수2는 입을 다물었다. 백수1이 하고 있는 생각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둘은 동일 인물이니까.
“그래, 관두자. 자칫 잘못하면 어떤 연구소의 실험동물이 될지도 모른다 이거지? 네가 생각하는 것은 나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으니까 서로 쓸데없는 말싸움은 하지말자.”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백수1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럼 이건 어때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쓸 만할 거야. 우리 둘 중 한사람이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을 때, 다른 한사람이 다른 곳에서 뭔가를 하는 거야?”
“뭔가를 한다니?”
“도둑질도 좋고, 여차하면 강도라도 하던가.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지. 알리바이가 완벽하니까 언제나 완전범죄라고.”
“그렇구나! 그러면 누가 알리바이를 만들고 누가 범죄를 저지를까?”
아이디어를 내놓던 백수1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백수2에게 말했다.
“당연히 내가 알리바이고, 네가 범죄지. 네가 나보다 3일분의 경험치를 더 가지고 있잖아.”
“웃기고 있네. 네가 나보다 3일이나 더 젊으니까 당연히 네가 범죄지.”
“싫어. 그러다 현행범으로 잡히기라도 하면, 나 혼자 독박 쓰라고? 네가 범죄야!”
둘 모두 똑같이 힘든 일을 싫어했고, 똑같이 비겁했다. 백수1, 2는 필요하다면 설령 상대가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기린처럼 쉽게 배신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촉발된 말싸움은 곧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백수1이 치명적인 말을 또다시 뱉었기 때문이다.
“미래에서 왔으면서, 이 쓸모없는 놈.”
두 번째다. 자기 자신에게 쓸모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두 번 이나 들은 백수2의 관자놀이가 꿈틀 거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백수1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 뭐할라고? 시간여행의 패러독스 몰라? 나는 과거의 너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고.”
백수2가 움찔했다. 그렇게 당혹하는 백수2를 보며 백수1은 더욱 가열차게 빈정거렸다.
“병신. 생각이 없구나. 그러니까 그 꼴로 살고 있지. 걍 뒤져 버려. 어차피 넌 이 공간에 있으면 안 되는 놈이야. 어떻게 죽을래? 휘발유 사다줄까?”
참다못한 백수2가 컴퓨터 키보드를 휘둘러 백수1의 얼굴을 후려 쳤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백수1의 이마에 찢어진 상처가 생긴 것이다. 절대로 3일 안에 흔적이 사리질 수 없는 상처지만 백수2의 이마에는 상처가 나타나지 않았다. 즉 두 사람은 시간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 완전히 별개의 존재라는 뜻이다. 백수1은 피를 흘리는 자신의 상처보다, 방구석에 놓인 아령을 들어 올리는 백수2의 모습에 기겁했다.
잠시 후, 백수2은 다시 백수가 되었다. 백수1이 죽었기 때문에 번호로 분류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백수는 피를 철철 흘리는 과거 자신의 시체를 이불로 둘둘 말아 방구석에 밀어놓았다.
울컥하는 마음에 막상 일은 저질러 버렸지만 수습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 시체를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틀 동안 부엌조자 나가보지 못하고 머리만 감싸고 있었다. 백수의 부모님들은 여전히 백수이 방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3일 째가 되던 그날 이 모든 상황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묘책이 떠올랐다. 바로 이날 새벽 4시, 자신이 화장실을 다녀오며 시간이동을 하지 않았나. 그러면 같은 시간 방밖에서 방문을 열면 다시 3일 전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백수는 흥분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완벽한 해결책이다. 더구나 오늘은 일요일. 어제 당첨된 로또복권의 번호까지 가져 갈 수 있다면 백수는 바로 인생역전이다. 지금은 오후 10시. 6시간 후 모든 것이 결정된다.
백수는 로또 당첨번호를 적은 메모를 두 손에 꼭 쥐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혹시나 싶어 중간에 몇 번이나 방 밖으로 나가 방문을 열어보았지만 방안은 여전히 과거의 시체가 놓여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4시 까지 기다리면 되. 4시. 4시.’
화들짝 정신이 든 백수는 자신이 깜빡 졸았음을 깨달았다. 시계를 살펴보니 이미 4시 25분. 백수는 정신없이 방 밖으로 뛰쳐나가 방문을 닫고 다시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살아있는 또 다른 백수의 뒷모습이 움직이고 있었다. 성공한 것이다. 백수는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기뻤다. 하지만 과거의 백수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른 의미로 소리를 질렀다. 또 다른 백수가 피투성이의 아령을 손에 쥐고 있었고, 바닥에는 또 다른 백수의 시체가 누워있었다.
백수는 자신이 백수3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백수4, 5가 계속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출처 | http://jooc.kr/contest/note.detail.html?nn=10036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