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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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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한솥매니아
추천 : 20
조회수 : 2392회
댓글수 : 26개
등록시간 : 2013/10/27 00:27:57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유럽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근대'라는 것,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상식, 원칙, 윤리, 법, 학문, 산업 모두가 유럽의 발명품인 셈입니다. 우리는 유럽의 상태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을 일컬어 '선진적'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후진적'이라고 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무리 거세게 제기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근대의 모든 문명적 결과물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 이상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참 우스운 점은, 이 유럽이라는 세계의 지배자가 불과 2~3백 년 전까지만 해도 지배자는커녕 단순히 세계의 '깡촌'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18~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유럽은 아시아를 뛰어넘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미 유럽의 우위가 어느 정도 결정되었던 19세기 초중반에도, 당시 유럽 최강국이던 영국은 대청 무역에서 나날이 적자만을 기록해야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말까지도 만만찮은 열강으로 남아 있었죠. 물론 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과연 이런 유럽이 어떻게 갑자기 세계의 지배자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많은 역사학자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여기에 대해선 아직까지 조금이라도 더 정설에 가깝다고 할 만한 이론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유럽의 부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변수들에 대해선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각각의 변수들을 하나의 정합적 관점에서 인과관계로 묶는 데 성공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만큼 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교양 수준에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선, 하나의 단일한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보단 그냥 지금까지 제시된 주요 변수들이 무엇이 있었는지를 쭉 살펴보는 편이 낫습니다.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분분한 문제를 취미로 역사 공부하는 사람들이 제꺽 답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유럽의 부상의 주요 원인으로 제시된 변수들이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유럽의 특수한 정신

유럽이 부상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유럽인들이 가진 문화적 배경, 정신적 유산이 문명 발전에 유리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정신적 유산의 성격은 간단히 말해 일종의 '기업가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창의성, 진취성, 합리성 등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변수를 중시하는 관점은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제시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변수 설정에 따르면 유럽은 고대부터 합리적 사고의 틀이 크게 발달하였고, 이러한 유산이 근대에 들어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을 통해 완성되면서 정치적 발전과 기술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자원 동원 능력이 크게 제고된 국가와 1인당 한계생산량의 질적 돌파를 통한 산업혁명으로 우월한 물질적 조건을 확보한 유럽이 자신의 힘을 전세계에 투사하면서 유럽의 세계 지배가 관철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이 변수를 통한 설명은 20세기 이후 유럽중심주의적 편견의 대표 사례로 지목되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설명에서는 합리적 사고가 고대에 유럽에서만 나타났다고 말하는데, 비교사상사적 연구를 통해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산술/천문 관련 연구나 중동의 각종 화학/수학/의학 연구는 각각의 리즈 시절엔 유럽의 무지를 씹어먹는 수준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철학적 기반이라는 측면에서 봐도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굳이 부처나 공자에 비해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볼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이러한 관점은 유럽인이 근본적으로 비유럽인에 비해 우월하다는 시각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날 사학계에서 진지하게 이 변수를 유럽 부상의 핵심 원인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악질 유럽중심주의자로 매장당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수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야 어찌됐건 분명 아시아의 합리적 자연 연구가 어느 시점부터 사라지거나 대폭 약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고대에서부터 이어지는 유산이라는 관점을 제하고 보면, 과학혁명을 전후해 나타난 유럽의 근대적 합리주의는 분명 다른 세계의 정신적 유산과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형성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특수한 정신사적 부침이 왜 아시아와 유럽에서 교차되어 나타났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변수는 그 자체로서 독립변수라기보단, 다른 어떤 변수에 의해 다시 설명되어야 할 매개변수로 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2. 제도적 경로의존(institutional path-dependency)

유럽의 정치/경제/사회적 제도가 근대적 발전에 적합한 형태로 구성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이 변수를 이해함에 있어서 먼저 숙지해야 할 것은 경로의존성이라는 개념인데, 이것은 한 사회의 포괄적인 제도라는 것은 반드시 그 이전까지 제도가 어떻게 구성되어 왔느냐에 일정 부분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 세계 각 지역의 제도가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그리고 과거까지 해왔던 바에 따라 각자에게 적합한 형태로 전개되어 발전하는데, 이 발전 과정과 초기 조건에 있어 유럽이 가진 유리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다소 유럽중심주의적인 시각에서 설명하는 케이스가 바로 유럽의 자유와 아시아의 전제를 대비시키는 케이스입니다.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를 대비시키던 그 구도를 연상하시면 되겠네요. 이 설명에 따르면 유럽의 초기 문명이 발전한 아티카 지역은 그 조건상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시민들의 연합일 수밖에 없었고, 반대로 아시아는 높은 농업생산력과 인구밀도를 토대로 일찌감치부터 중앙집중적 전제정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기 조건의 차이는 유럽에서만 사유 재산의 존중, 개인적 자유의 가치, 합리적 토론을 중시하는 형태의 제도적 발전이 일어나도록 강제했다는 것이죠.

비슷한 변수를 좀 덜 유럽중심주의적으로 보는 케이스는 유럽의 분권적 역사를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찍부터 중앙집중적인 거대 제국이 발생하기에 유리했던 아시아와 달리, 유럽은 그 민족 구성의 다양성이나 지리적 조건(유럽 대륙은 좁아 터진데다 산도 많죠)에 따라 무수히 많은 나라로 쪼개져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적 경로는 자연스럽게 각 국가와 지역 사이의 사적 교류를 증진시키고, 전쟁 기술을 발전시키며, 더 넓은 기회를 찾아나갈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 이 설명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참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입니다만 이 변수를 중심 원인으로 보는 것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아시아적 전제정'이란 것 자체가 사료에 의해 이미 부정된 환상이라는 것, 그 어떤 전제정도 사회 내부의 사적 집단의 성장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억제력을 보유하지는 못했다는 것, 유럽 역시 근대 형성 이후 한참동안도 사유 재산의 침해나 이념적 억압이 당연하던 시기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유럽의 분권적 조건이라는 것 역시, 동남아시아 반도나 남부 아프리카 등 유사한 조건을 가진 지역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경로를 걷지는 못했다는 것, 오히려 그 분권적 형태의 비효율성 때문에 생산력이 악화되고 전쟁 기술의 과도한 비중 때문에 쇠퇴해 간 경우도 많았다는 것 등에 의해 반박되곤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설명이 굉장히 결과론적인 설명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제도가 왜 유리한지를 그 제도의 구체적 속성을 통해 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장 발전한 사회의 제도니까 그 발전에 유리했겠거니 하고 생각한다는 거죠.


3. 생태환경적 변수

20세기 중반 이후 특히 조명받았던 변수로서, 해당 지역의 지리적/생태적 특성이 경제와 사회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는 부분입니다. 특히 농업생산력과 부존 자원을 중심으로 설명이 되며, 다른 변수와 달리 유럽과 아시아의 대비 뿐 아니라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의 대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생태환경적 변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땅의 힘, 지력입니다. 전근대 사회는 세계 어딜 가나 농업사회이고, 당연히 농업에 의한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얼마나 떠받쳐줄 수 있는가가 핵심적인 변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아시아의 토지 단위당 농업생산력이 유럽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했음을 강조합니다. 생산력의 우위가 오히려 결과적으로 문명의 열위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조금 이해가 안 되실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위 토지에 노동 투입을 순차적으로 늘려갈 때 늘어나는 한계생산량의 증가라는 측면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지력이 좋으면 이 한계생산 증가량이 크고, 나쁘면 그 반대입니다. 한계생산 증가량은 노동 투입이 늘어갈수록 줄어들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점차 줄어들다가 어느 순간 인구 증가율을 따라잡을 수 없는 시점에 이르면 농업생산은 양적 증가가 아닌 질적 증가, 즉 기술혁신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유럽은 아시아에 비해 이 한계가 상당히 이른 편이었고, 때문에 일찍부터 기술혁신에 사회적 역량이 투입되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죠. 아시아는 이 한계가 굉장히 여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기술혁신보단 더 많은 인구로 경제를 지탱해 왔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설명에 따르면 토지의 농업생산력이 일정 이상 되지 않는 땅에서 농업 이외의 1차 산업, 즉 목축/임업/광업/어업 등이 병행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지형적 격차가 거의 없이 대부분의 땅에서 만족스러운 농사가 가능할 정도로 땅이 좋은 아시아에서는 단기적인 효율성 추구라는 동기에 의해 대부분의 땅을 노동집약적 관개농업으로 채우게 되었지만, 웬만해선 농사를 짓는 게 시간낭비인 땅을 여럿 가지고 있었던 유럽에선 차라리 그 땅에서 양을 키우거나, 각종 유기/무기 동력원을 채취하거나, 혹은 바다로 나가거나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산업들은 구조적으로 공업과 상업의 발전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가 크며(양 -> 양모가공, 동력원 -> 당연히 공업용 연료, 바다 -> 해양무역), 이에 따라 기술혁신이 일어나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를 대비시키는 용도로 이 변수를 사용한 가장 유명한 저서가 제러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인데, 여기서 그는 아메리카가 유라시아와 달리 종적으로 긴 대륙이라 인간 집단 간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으며(기후대가 달라지니까), 단백질 섭취 및 바퀴를 이용한 운송량 증가에 꼭 필요한 대형 반추동물(말, 소)이 없어 생산력 발전 및 교류 확대에 지장을 주었고, 열량 효율이 높으면서 대규모 육종에 유리한 식용 식물종의 발견이 늦었다는 점 등을 들어 아메리카에서의 문명 발전이 더디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축과의 빈번한 접촉이 다양한 세균에 대한 면역력을 제공했던 유라시아와 달리 아메리카는 그럴 기회가 없어, 유럽 침략자들이 왔을 때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점도 언급합니다.

생태환경적 변수는 듣기에 굉장히 합리적이고, 필연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향이 있어 많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인간이 어떤 지역에서 살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는 이상 이는 결국 문명의 환경결정론이 되고, 출발점만 달라진 유럽중심주의의 새 껍질이라는 점입니다. 즉 원래 처음부터 아시아에는 기회가 없었다는 얘기밖에 안 된단 말이죠. 두 번째로, 지력의 한계를 노정했던 지역은 특별히 유럽뿐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아시아의 대표적인 세 거점(중국, 인도, 중동)이 세계사적으로 볼 때 특수한 케이스이고 유럽 같은 조건은 굉장히 흔했어요. 그런데 왜 유럽에서만 그런 조건에 의해 추동된 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 변수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계생산력이 벽에 부딪힌다고 해서 반드시 생산력의 질적 증가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질적 증가에 의한 돌파보다 한계에 부딪힌 그것에 의해 기근으로 인구가 크게 줄고, 다시 줄어든 노동투입량에 따라 중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심지어 유럽에서도 대부분의 시기 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죽었다 다시 먹고 살고 또 죽었다 다시 먹고 사는 걸 반복하던 유럽인들이 왜 어느 순간 질적 돌파를 가능케 했느냐에 대해 우린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합니다.


4. 세계경제 구조의 순환과 변동

이 변수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서 제시되어 일약 화제를 모았던 지점입니다. 그에 따르면 세계 경제는 주기적으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데, 18세기 후반에 찾아온 수축기를 이용해 유럽이 아시아를 추월하는 기회로 삼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는 세계경제 구조의 주기적 순환을 설명하기 위해 콘트라디예프 곡선이라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개념을 끌어옵니다. 1952년 러시아의 경제학자 콘트라디예프에 의해 발표된 이 가설은, 세계 경제가 약 60년 전후의 사이클을 갖고 호황과 불황의 장기순환을 반복한다는 내용입니다. 콘트라디예프는 경제사 기록을 통해 이러한 순환이 실제로 관찰된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프랑크는 이러한 순환의 하강국면에서 뒤쳐져 있던 유럽이 잘 나가던 아시아보다 덜 타격을 입은 것을 통해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실제로 그의 주장과 같이, 유럽은 위에서 살펴본 각종 변수─합리주의, 분권적 제도, 기술혁신─를 모두 갖추고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킨 지 수백 년이 지나도록 아시아에 대해 우위를 잡지 못했습니다. 만약 위의 변수들만으로 유럽의 부상을 설명하려면 왜 1600년대나 1700년대엔 부상하지 못했는지가 설명이 안 된다는 얘기죠. 프랑크는 콘트라디예프 순환과 같은 세계경제의 사이클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보이고, 분명 그 하강국면이 유럽의 부상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까지 입증해 냈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역사를 각 지역에 고립된 형태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구조로써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패턴과 마찬가지로, 이 가설 역시 상당히 치명적인 결함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가 자신의 가설을 세운 이론적 기반인 콘트라디예프 순환이라는 것 자체가 분명 관찰된다는 것은 확실하나, 왜 그러한 순환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선 정합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진 이론입니다. 게다가 이 개념은 원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해 제시된 이론이지 전자본주의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론이 아닙니다. 둘째로 그는 왜 유럽이 아시아보다 18세기 후반의 하강국면에 덜 타격을 입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그의 세계경제 구조에 대한 관점은 매우 정태적(static)인 것으로, 변하지 않는 하나의 순환구조가 유지되면서 그 안에서 우위와 열위만 교체되는 것처럼 묘사되어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5. 지리상의 발견과 아메리카 식민화

반유럽중심주의 시각에서 유럽의 부상을 설명하는 데 가장 무게를 두는 변수가 있다면 바로 아메리카에 대한 착취입니다. 즉 유럽인들이 뭐가 잘나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침략과 수탈의 결과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죠. 비유럽인 입장에서 듣기엔 굉장히 속시원한 설명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설명에서 아메리카의 메리트를 제시하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아메리카의 자원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남아메리카의 풍부한 귀금속(금/은), 그리고 감자/옥수수 등의 구황작물이 주목을 받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남아메리카의 귀금속 부장량은 지리상의 발견 시기를 기준으로 볼 때 세계에서 독보적인 수준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금광과 은광 개척을 통해 막대한 양의 금은을 본국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귀금속은 많은 역할을 하는데, 먼저 유럽 내에서 가격혁명(화폐에 사용되는 금은의 양 증가 -> 화폐의 실질가치 하락 -> 대규모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켜 토지 기반 특권층의 몰락과 초기 자본의 형성을 촉진시켰고, 아시아에 대한 불균등 무역(유럽인들은 아시아에서 사갈 것이 참 많았죠)에서 나오는 적자를 메꾸어 아시아의 물자를 활용하면서도 경제 발전에 제동이 걸리지 않게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메리카에서 흘러들어온 새로운 구황작물은 적은 토지와 노동력만으로도 많은 인구를 싼 값에 부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농업 종사 인구를 줄여 도시의 예비 노동자를 확대시키는 한편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낮게 설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산업혁명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금은의 충분한 존재는 화폐경제의 발전을 추동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손꼽히기도 하는데, 조선과 달리 일본에서 일찍부터 상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주요한 조건 중 하나로 일본 내의 풍부한 은 부존량을 드는 학자도 실제로 있습니다.

둘째로 주목받는 요소는 바로 아메리카의 광대한 토지입니다. 당시 아메리카는 단위 토지 당 인구 비율이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었고, 유럽인들은 이러한 아메리카에 대규모로 진출하여 그 곳의 토지를 이용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생태환경적 변수에서 설명한 것과 반대로 기술혁신을 노동절약적 기술(즉 단위 토지 당 투입 노동력을 줄이는 것)의 도입이 아니라 토지절약적 기술(즉 단위 노동력 당 할당 토지 면적을 줄이는 것)의 도입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유럽은 아메리카에서 무언가를 가져와서가 아니라 아메리카에 무언가를 갖다 놓음으로써 발전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원래 18세기에 이르면 유럽은 토지상의 생태적 한계, 즉 생산량 증가를 뒷받침할 토지집약적 산업이 필요로 하는 토지가 부족하다는 것에 부딪혀 경제발전에 한계를 맞이해야 했는데, 아메리카에 이러한 토지집약적 산업을 몰아넣음으로써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임업, 목화산업, 석탄 광업 등이 있을 수 있죠.

이 변수를 중요시하여 본다면 결국 아시아가 유럽보다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그들에게 아메리카라는 축복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는 또 다시 설명의 공백을 불러 일으킵니다. 즉 왜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이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느냐는 것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대분기>의 저자 케네스 포머런즈는 이에 대해 유럽의 아메리카 발견은 순전한 우연이었다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그런데 사실 이는 일리가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정말 소 뒷걸음질에 쥐 잡은 격이었고, 대항해시대도 원래는 대서양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희망봉을 돌아가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이러한 '운빨'이란 설명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그것은 침략이라는 것이 항상 이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침략을 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고(정화 역시 대원정을 통해 아프리카의 여러 소국을 정벌하기도 했지만 그의 함대의 피해는 유럽의 아메리카 침략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정복을 했다면 그 땅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유럽인들이 그 누구보다도 성공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6. 진짜 우연, 운빨

역사학계에서 진지하게 제시되고 있는 변수는 아니지만 분명 어느 정도 부인할 수 없는 요소로는 말 그대로 진짜 우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화약은 중국에서 먼저 발명했는데 왜 총은 유럽에서 개발되었는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을 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따져보면 정말 우연히 어떤 장인이 '아 대포랑 비슷한 원리로 사이즈를 좀 줄여서 들어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총기가 냉병기를 결정적으로 압도하게 만든 중요한 발명들─강선, 미니에탄, 1회분 화약포, 후장식 장전─이 꼭 뭔가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서 발명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실제로 기술사에서 한 순간의 우연에 의해 발명되거나 발견된 것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꼭 이런 찰나의 우연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하다 보니까'라는 종류의 우연도 있습니다. 왜 똑같은 분권적 조건에서 다른 지역과 달리 유럽은 문명 발전과 전쟁기술의 발전이 잘 균형을 이루었는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어떻게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의 금은에 의해 화폐경제가 붕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사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굳이 말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역사엔 분명 일정한 조건과 강제, 경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총의 최초 고안자를 죽인다고 해도 수십 년 후에 분명 누군가는 총을 고안할 수 있습니다. 그럴만한 필요와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확률이라는 것은 0이 아닌 이상 언제나 충분한 큰 수에서는 일어나게 마련이니까 말이죠.



이러한 각종 변수들 속에서, 실제로 이 중 하나 혹은 일부만 갖고 유럽의 부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이 변수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비중을 달리하여 좀 더 그럴싸한 하나의 설명을 갖추려고 노력하죠.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그 노력은 정설이라는 결실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만, 언젠가는 분명 합리적인 답이 나올 것이라고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비전문가 입장에서는 일단 각각의 변수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도 있었던 것과 할 수 없었던 것을 조금이라도 더 엄밀하게 구분하고,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유럽의 부상이라는 것은 결국 근대의 시작, 즉 근대화임과 동시에, 아시아의 몰락이자 아시아의 식민화였던 것이 역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고통받던 역사에 대한 분개는 왜 우리가 고통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고찰과 분리될 수 없으며 또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다 더 명료하고 깊이 있는 역사인식을 갖추기 위해 다 같이 머리를 모아가는 과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 그리고 프랑스 혁명사 연재 5편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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