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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는 사이라거나, 매일 얼굴을 맞대는 가족의 경우에는, 인파가 가득한 길거리에서 그 사람의 뒷모습만 봐도 누구인지 눈치 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Y역시 어떠한 상황이라도 그녀를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고혹적인 그녀의 몸매, 율동같은 그녀의 허리 움직임, 바람이 부는 손동작, 물위를 걷는 듯한 걸음걸이. 매일 밤 보고 또 보는 그녀의 모습을 Y가 착각할 리 없다.
Y는 이 자리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수천 명의 관중이 환호하는 경마장에서, 객석에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었다. 수백 미터는 떨어진 거리였지만 Y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Y는 우연히 만나게 된 그녀에게 섣불리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녀의 육체 어느 곳을 보아도 Y가 매일 밤 만나는 그녀가 분명하다고 느꼈지만 Y는 그녀의 얼굴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Y가 그녀를 만나는 공간은, Y의 꿈속 세계다. 올해 30살이 되는 Y는 벌써 10년 전부터 매일 밤 그녀가 등장하는 꿈을 꾸고 있다.
Y가 막 20살이 된 생일날, 친구들의 축하와 함께 거나하게 취한 Y는 그날 밤 생에 최초의 몽정을 경험했고, 다음날 아침에 축축해진 속옷을 보고 매우 허탈해했다. 그날 밤 Y의 꿈에 등장한 그녀의 모습은 그냥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Y는 숙면을 취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꿈꾸며 절정에 치달은 것이다. 그녀가 침대에 누운 것인지, 바닥에 누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꿈속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반경 10cm 정도 뿐, 그녀가 누워있는 방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후 Y가 잠이 들면 언제나 그녀의 모습이 꿈속에 등장했다. Y는 조금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편이었다. 그리고 꿈속의 그녀도 항상 잠자리의 모습이었다.
Y는 생각했다.
‘혹시.’
그녀의 꿈을 꾸기 시작하고 두 달 정도 지났을 어느 날 휴일, Y는 평소 거의 하지 않던 낮잠을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꿈 속에서 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수시로 이옷 저옷을 가져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니 아마도 백화점에서 옷을 쇼핑하며, 탈의실을 들락거리는 듯 했다. 낮잠에서 깨어난 Y가 흠뻑 젖은 속옷을 발견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Y는 깨달았다. 자신이 잠이 든 그 시간과 동시에 그녀가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꿈속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후 Y의 수면시간이 매우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낮잠을 자는 것도 다반사고, 아직 오후 6시도 되지 않았는데 잠자리에 드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서 Y는 그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오후 8시, 정장을 입은 그녀가 구두를 벗고 어딘 가로 들어선다. 잠시 후 한 손에 속옷과 간편한 옷을 챙겨든 그녀가 스스럼없이 순식간에 알몸이 된다. 그리고 위에서 쏟아지는 물에 흠뻑 젖는다. 아!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있구나. Y는 꿈속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그녀에게 손을 뻗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꿈속에서 Y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곳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공간이었다. 손을 뻗을 수 없는 Y는 마음을 뻗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Y의 마음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하고 철저하게 고립된 그녀의 공간을, Y는 그저 쳐다만 볼 뿐 한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다.
Y는 그녀의 모든 것을 보았다. 아마 그녀 자신도 거의 볼일이 없는 신체의 구석구석을 10년의 세월동안 꼼꼼히 지켜보았다. 체면차릴 필요 없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관찰을 통해, Y는 그녀의 눈썹 움직임, 괄약근의 떨림 만으로도 그녀를 구분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
“저기요. 장제사님. 탈철(헌 편자를 말발굽에서 분리시키는 작업) 하셨으면 삭제(자란 발굽을 제거하는 작업) 하셔야죠.”
말편자를 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 Y에게 마필관리사가 재촉했다. 그녀의 생각에 빠져 있던 Y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직도와 망치로, 지나치게 자라난 말발굽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Y가 조금 허둥대는 모습에 말의 뒷다리를 끈으로 묶어 잡고 있던 마필관리사가 조금 신경질 적으로 반응한다. 당연한 것이 말발굽을 삭제한 후에, 재차와 굽줄도 깎아내고 다시 편자를 박아야 하는데, 이 젊은 장제사가 어리바리하여 말이 날뛰기라도 하면 사람이 다치는 것은 둘째요, 수십억이 호가하는 말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남은 인생이 끝장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Y는 편자수정과 접합까지 순식간에 깔끔한 솜씨로 마무리 지었다. 고작 서른 밖에 안된 애송이가 장제사가 되었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가끔 듣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도 Y의 솜씨가 확실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엄청난 기술과 솜씨가 필요한 편자교환을 Y는 무슨 장난감 레고블럭을 뽑았다가 다시 끼우는 듯이 척척 해냈다.
한숨 돌린 Y는 다시 그녀를 생각했다. 이틀 전 경마장 객석에서 실제로 보게 된 그녀는 꿈속의 그녀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를 실제로 만나게 된 순간 Y는 자신이 그녀의 얼굴을 모른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했다. 그녀 가랑이 사이의 음모가 어디까지 퍼져있는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Y가 그녀의 얼굴을 모르다니……. 그래서 Y는 실제로 만난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잠을 청했다. 그리고 Y는 꿈속에서도 당황했다. 꿈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어째서 10년 동안이나, 이것을 눈치 채지 못한 거지?’
이후 Y는 휴일이면 반드시 경마장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그녀를 실제로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경마 관계자인 Y는 경마에 돈을 걸 수 없다. 그런데 베팅부스에 자주 얼쩡거리는 Y를 보며 다른 사람들이 수근대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것에 아랑곳 않는 Y의 노력이 보답 받았다. 그녀를 찾기 시작하고 반년 만에 경마장에서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Y는 지난번처럼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반년전의 그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과 움직임은 틀림없이, 매일 밤 Y가 바라보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반년동안 머릿속에서 되내이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해 할 수 없었다. 성형수술의 수준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한 것이다.
Y는 그녀를 뒤쫓았다. 생전 처음하는 미행이었지만 어렵지 않았다. Y는 수백미터 밖에서도 그녀의 뒷모습을 정확히 구분하였고, 한 번도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끝까지 쫒아가 알아낸 그녀의 집은 허름한 원룸이었다. Y는 10년 동안 그녀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넓지 않은 집에서 혼자 사는 여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원룸의 문에 노크하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는 아지 않았다. 뭐라고 할 것인가?
‘매일 밤 당신을 훔쳐보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신 젓가슴 사이의 별모양의 점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얼굴은 왜 바뀌는 겁니까?’
Y가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하는 중 그녀가 다시 원룸에서 나왔다. 근처 편의점에 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또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Y는 이제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왠지 그럴 것이라고 미리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금 전 까지는 단발이던 머리카락 길이도, 지금은 허리까지 닿는 장발로 변해 있었다.
Y는 그녀를 따라갈까 하다가 그녀가 살고 있는 집에 더 호기심을 느끼고 그녀의 방문 앞을 어슬렁거렸다. Y는 그녀 방의 비밀번호를 이미 알고 있었다. 현관 번호를 누르는 모습도 이미 몇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눌러본 비밀번호는 정확했고 문은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Y는 원룸과 어울리지 않도록 커다란 그녀의 냉장고에서 잘린 여자들의 머리 6개를 발견했다.
※
그녀가 보였다. 언제나 꿈속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 이다. 아,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번에는 그녀의 머리가 명확하게 보인다. 꿈 속에서 그녀의 이목구비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왠지 가슴이 뛴다. 어라? 그런데 머리가 두 개다. 그녀가 한 손에 다른 머리 하나를 들고 있다. 남는 손으로는 지금 목 위의 머리를 천천히 들어올린다. 그러자 원래 목이 레고 장난감처럼 쑥 빠지고, 다른 손에 들고 있는 목을 새로 끼운다.
머리를 갈아 끼운 그녀가 칼을 들고 이동한다. 그리고 무언가에 걸터앉는다. 자세히 보니 벌거벗은 남자의 몸인 것 같다. 아, 그녀에게 남친이 생긴 것인가. 얼핏 보니 방바닥에 핏자국이 흥건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아픈 것 같다. 꿈에서도 통증이 느껴지는 것인가? 그런데 내가 언제 잠이 든거지? 그녀가, 걸터앉은 남자의 목에 칼을 들이 데는 것 같다.
갑자기 목 주변이 아프다. 꿈속에서도 통증이 느껴지는 것인가?
출처 | http://jooc.kr/contest/note.detail.html?nn=10036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