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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을 거절 못하는 이야기
게시물ID : humorstory_4458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꼬망꼬망
추천 : 1
조회수 : 96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6/29 13: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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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극단주의자가 있다.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절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거절하고
재차 부탁해도 거절하고
온갖 아부와 재롱에도 끝까지 거절하고 보는 그래 다 거절해라 썅 부류와

당장 자기 일이 급해도 남의 부탁을 덥썩 받아들이고
자기가 손해볼 것 같아도 고민고민하다가 받아들이고
난처한 부탁에 동공지진을 일으키면서도 어찌어찌 또 받아들이고
좀 여유롭다 싶으면 무턱대고 받아들이고 보는 전형적인 호구 부류, 이렇게 둘이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소심한 경우가 많다.
자기 의견도 제대로 말 못하고 쭈뼛거리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고
어쩌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기라도 하면 당황하고 긴장해서 삑사리에 덤벙거리기에 홍조까지...

그렇다, 내 얘기다. 물론 난 극단적까지는 아니다.
어찌 됐든 거절은 하니까.. 말뿐이지만...
그러니까 대충 이런 식이다.


1.
이제 막 대학에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새로 사귄 동기들이랑 밥을 먹으러 학생 식당을 갔다. 번잡스러운 게 귀찮았던 나는 덮밥류를 시켰다.
모두의 음식이 나오고 먹으려고 할 때 한 친구가 고기 좀 먹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순간 나는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러라고 답했고
그 친구는 밥을 먹는 내내 한 점 씩, 결국 모든 고기를 가져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나는 안 먹어도 그만인 고기인지라 딱히 상관이 없었는데
오히려 옆에서 보고 있던 동기 누나 한 명이 대신 역정을 내며

"넌 꼬망이 거 좀 그만 뺏어먹어! 어쩜 애 고기를 다 뺏어먹을 수가 있어? 애가 너 무서워서 암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건 안 보이니?"

....누나??

"이것 좀 봐봐. 못 먹어서 키도 작고 비리비리하잖아!!"

아니, 그건.......


2.
행사 같은 걸 할 때에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가령

여름방학 때 동아리에서 신입생들과 같이 국토대장정을 가는데, 신입생들과 함께 곁에서 도와줄 선배들도 몇 명 같이 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후배 한 명이 전화로 국토대장정에 신입생들을 케어할 선배가 없다고 찡찡거렸다.
단칼에 거절했지만, 후배 역시 물러설 줄 몰랐다.
나는 잠시 한숨을 쉬고

"너 지금 내 신분이 뭔지 알고 있냐?"
"휴학생이요."
"그럼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냐?"
"고향이죠."
"지금 뭐하고 있는지는?"
"아르바이트요."
"만약 네가 나라면 어쩔 거 같냐?
"일단 전화도 안 받았을 것 같아요."
"더 할 말 있냐?"
"...편히 쉬세요."

그리고 다음날 그 애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청서는 일단 너한테 주면 되냐?"

물론 알바는 그만뒀다.


3.
학교도 좀 오래 다녔고 이제 전공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는 와중에 또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달 후에 있을 동아리 창립 행사에 신입생들이 재롱을 아니, 콩트를 하는데 조장을 좀 맡아서 지도해달라는 거였다.
처음엔 중간에 시험도 있고 해서 거절하려 했는데,
그냥 중간에 애들 먹을 거나 사주면서 북돋아주기만 해도 된다고 하도 사정해서 결국엔 또 조장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정말 가끔 밥이나 간식 같은 거나 사주면서 연기가 어색한 거나 소품이 엉성한 거 같은 것만 봐주고 있었는데
동아리 임원 한 명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꼬망 오빠, 사실 말 안 한 게 있는데요. 역할 하나가 부족해요."
"응? 인원 다 맞는데? 다른 조랑 헷갈린 거 아냐?"
"헷갈린 건 아닌데, 다른 조는 맞아요."
"근데 왜 나한테 얘기하냐?"
"오빠라면 해주실 것 같아서요."

그렇다. 난 이미 동아리 내에서 말만 하면 쉽게 내주는 몸이었던 것이다.

"별로 할 건 없어요."
"조장 맡아달라고 할 때도 들었던 말 같..."
"등장 씬도 한 번 뿐이고."
"아니, 저기 내 말..."
"대사도 몇 줄 안 돼요. 봐요, 여기 대본."

후배가 보여준 대본엔 확실히 몇 줄 안 되는 대사가 있었다. 외우기도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근데 왜 여자 역할이야?"
"그래서 오빠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접속사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여장은 전에도 해보셨죠?"
"아니, 내 말 좀. 다른 애들 많잖아. 별로 안 어려워 보이는데 다른 조 새내기한테 부탁해도 되고. 우리 조 애한테도 한 번 물어볼까?"
"걘 이미 여장하잖아요."
".......나 같은 늙다리보다는 풋풋하고 상큼한 새내기가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걔네 얼굴 보셨잖아요."
".......그래, 다들 세월을 좀 맞긴 했지.. 그래도 걔네가 하는 게 좀 더 신선하고 귀엽지 않을까?"
"오빠가 더 귀여워요."
"입술에 침이라도 바르고 얘기하자?"
"쳇."

그래서 결국 여자 역할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행사 당일이 왔다.
치마를 준비할 거라는 애들의 말에 맨 다리를 보이는 게 민망해서 스타킹도 사갔다.
한창 리허설 중이던 애들이 나를, 정확히는 내 손의 스타킹을 보더니 다들 연습을 멈췄다.

"스스로 스타킹을 사오다니. 오빠, 실은 제일 기대하고 있던 거 아니에요?"
"입술로는 거짓을 말해도 몸은 정직하네. 숨길 줄도 모르고."
"어머, 검스네? 누굴 꼬시려고요, 꼬망 오빠?"
"오빠, 오빠, 그거 혼자 신을 수 있어요? 신겨줄까요?"

그냥 나가고 싶었지만, 들어갈 땐 마음대로 였어도 나갈 땐 아니었다. 난 애들이 건네준 치마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치마를 입는데 좀 짧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가 휑하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는데, 웬 남자 하나가 흠칫 놀라며 뒤돌아 화장실을 나갔다. 난 눈물을 머금고 리허설 중인 강의실로 갔다.
애들은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치마를 입었으니 멀리 못 갈 거랬지?"
"오빠... 그게 제일 작은 사이즈였는데, 그게 맞네요. 하아....."
"치마가 어울리는 남자다리라... 복 받았네요, 꼬망 오빠."

여자애들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봤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들고 나온 옷으로 가리니 애들이 또 한 마디 씩 했다.

"방금 그 포즈, 진짜 위험한 거 알죠? 옷 내려놓고 빨리 일로 와요."
"옷도 갈아 입었으니, 이제 화장하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화장이라니? 그런건 계약에 없었..."

애들은 강제로 날 의자에 앉혔다.

"치마에서 끝날 줄 알았어요? 순진하네."
"우리 동아리에서 순진한 건 불법이거든요. 벌 받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치마에 화장에 가발까지, 애들은 치밀했다.
한 번에 말하면 단 번에 거절할 줄 알고 순차적으로 오픈해서 충격을 완화하는 것까지, 애들은 영악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여장 기록이 생기고야 말았다.
출처 소심한 나의 대학 생활(과장 농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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