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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졸업
게시물ID : lovestory_790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페레트리
추천 : 2
조회수 : 38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6/27 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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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그는 그녀에게서 졸업하기 위해 지하철에 올랐다. 방학동안 망가진 수면시간 때문에 잠을 두 시간 밖에 자지 못한 그의 눈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너무나도 멀쩡해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음에도 그가 느끼기엔 온 세상의 소리가 전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3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몇 개월 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길고 긴 시간동안 절절하게 끓기만 했을 뿐, 그 이상의 무엇인가는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그제야 비겁하게도 자신의 절절함을 정리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책임하고 멍청하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작년 어느날엔가, 집에서 쉬는 그에게 그녀가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그는 전화기에 찍힌 그녀의 이름 두글자를 본 찰나의 순간, 수천 수만가지 생각을 했다. 그녀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에게 졸업 발표회에서 기타 연주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는 예, 뭐,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은 뒤 취미로 기타를 친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댄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잠깐이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 연습이나 단 한번 있었던 전화통화 따위가 사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와 그녀의 사이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정도일 수 밖에 없었다. 불편하고 이상한 남자 선배, 마주하기 힘든 후배. 사적으로는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는 사이.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상황이 진전되길 바라고 있었다. 결과는 당연히,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는 지하철에서 내려 담배를 태웠다. 그리곤 미리 생각한대로 버스에 타기 전에 그녀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이니까 꼭 해내야한다는 의지를 마음 속에 피워냈다. 그는 버스에 올라 학교에 가는 동안 지난 수 개월, 아니 수 년간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계속해서 되짚었다. 그의 머리가 아파왔다. 무엇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장소는 어디가 좋지? 시간은 얼마나 내달라고 해야 할까? 그는 과거에 버스에서 그녀와 서로 모른 척 했던 일이 떠올랐다. 같은 줄이었지만 다른 칸 양 끝자리에서 그들은 다른 것에 몰두했다. 아니, 몰두하는 척 했다. 그와 그녀의 사이에 어느 노부부가 앉았을 때 그는 생각했다. 나와 너의 거리는 이 노부부의 세월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멀구나 라고.

그가 꽤 일찍 학교에 온 것임에도 정문에는 이미 꽃 장사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조용한 졸업식을 생각했던 그는 당황했다. 그는 축제 같은 분위기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호객행위를 하는 수많은 장사꾼들을 보며 살까말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장미 한 송이를 냉큼 샀다. 누군가 그를 봤다면 졸업생이 아니라 축하해주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보이길 바라고 있었다.

그는 과 사무실에 가는 동안 두 명 정도의 아는 얼굴과 인사했고, 과 사무실에 들러 조교에게 형식상의 인사를 하고는 학위증과 USB를 받았다. 하나같이 참 보잘것 없는 것들이었다. 조교와 쓸데없는 잡담을 조금 한 뒤, 그는 전공 강의를 주로 듣던 강의실에 갔다. 이른 낮인데도 불이 꺼져있으니 어둑어둑 했다. 이런 광경을 그는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주로 앉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이곳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헛된 꿈이었다.

언젠가 그의 친구가 술 한잔 하자며 그를 불러낸 적이 있었다. 술이 적당히 들어가고 난 뒤 친구는 과에서 그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가 여자 후배들에게 집적댄다는 것이었다. 그는 몇 차례 있던 자신의 실수 때문에 어렴풋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이야기가 떠돈다는 말을 듣자 취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적어도 여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영리하지 못했다. 어설프고 나사가 몇 개쯤 빠진 듯 했다. 그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여자 대하는 것이 어설프고 영리하지 못한 게 '집적대는' 거라고? 그는 해명의 기회조차 없는 일방적인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강의실에서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15분만 시간을 내달라는 그의 부탁에 그녀는 시간을 핑계로 삼았다. 늦에도 오후 한시 전에는 떠나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는 적절하게도 신데렐라를 떠올렸다. 그는 조건을, 자세를 낮추었다. 딱 5분, 5분이면 돼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딱 5분만 부탁드려요. 그녀는 어렵사리 알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마지막이니 뭔들 못하겠냐는 그답지 않은 과감함이 부른 참사였다.

그녀는 졸업식 행사가 끝날 무렵에야 학교에 도착했다. 그녀는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그 틈을 타 -그녀의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테이크아웃 커피 한잔과 사두었던 장미를 건넸다. 그러면서 단 5분, 5분만 꼭 시간을 내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 한번 하고 싶었던 말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뒤죽박죽이 된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다.

그와 그녀는 어정쩡한 장소에서 어정쩡한 시간에 만났다. 오후 1시 10분전, 과 사무실 옆 사물함 앞에서 그는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알 고 계실거라 생각하지만... 좋아했어요. ... 되게 오래 됐어요. 마지막 날에 이렇게 도망치듯 말하게 되어서 미안해요. 바보 같다고, 찌질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런데 오늘 말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면서 살 것 같았어요.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마지막이니까 정리를 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고백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배... 졸업 축하드려요. 그리고... 나중에 연락해서 다같이 모여서 얼굴 봐요. 그는 체념하고 말했다. 그러지 않을 거란거 알아요.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의 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대답이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마법이 풀리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그는 그렇게 질질 끌다가 마지막 날에야 겨우 학교에게서, 그녀에게서 졸업했다.

얼마 후 그는 3년 넘게 써온 핸드폰을 새것으로 바꿨다.
그는 곧장 전에 쓰던 핸드폰을 깨끗하게 초기화하고 중고장터에 싼 값에 올렸다.
핸드폰은 금새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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