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가는 중이었다. 앉아서 오유를 보며 키득거리며 가던 중 어느새 사람들이 꽉 찼고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가 새하얗게 샌 할머니 한 분이 서계셨다. 화들짝 놀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앉으시라고 했는데
"아니야, 나 금방 내려요."
라며 거절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앉으시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정말로 금방 내린다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커다란 궁디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그런데 한 정거장, 두 정거장을 가도 할머니께서 내리시질 않는다. 나는 점점 가시방석에 앉은 설사환자마냥 좌불안석 하게 되었고 결국 다시 일어나고 말았다.
"할머니, 앉으세요." "나 진짜 금방 내려요. 괜찮으니 앉아요."
할머니께서는 다시 한 번 거절하시며 나를 자리로 눌러 앉히셨다. 하지만 다시 한 정거장, 두 정거장을 가도 내리질 않으신다. 거짓말 조금 보태 의자가 미친듯이 내 엉덩이를 향해 똥침을 놓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며 어떻게든 일어나고싶다는 충동에 휘말렸다. 욕구를 이기지 못한 내가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났다.
"학생, 그러지 말래도..." "아녜요, 저 이제 내려요."
나의 간절한 마음을 온 우주가 알아주었는지 드디어 할머니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으흐흐.... 이제 복수의 시작이다.
서너정거장이 지났다. 할머니께서 나를 보며 미안한 얼굴을 하셨다.
"학생, 금방 내린다며.." "네, 저 이제 진짜 금방 내려요."
빵실빵실 터질듯한 볼살로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아직 내가 내릴 곳은 조금 더 남아있었다. 다시 두 정거장쯤 지났을 때 할머니께서 체념하신 듯 말씀하셨다.
"버스를 타고 젊은 사람을이 자리를 양보해주면 꼭 자리를 빼앗는 것 같아서 미안해."
예상치 못한 할머니의 반격이었다.
"할머니, 저는 좀 많이 튼튼해서 서서 가도 괜찮아요. 그리고 저 진짜 이번에 내려요. 조심히 가세요."
할머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린 건 죄송했지만 어쩌겠는가. 내 다리는 튼실했고, 내 마음의 엉덩이를 구원하고 싶었으니....
버스에서 내리며 할머니를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였다. 걸음걸음 씰룩이는 내 왕궁디가 그날따라 유난히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