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뭔가 이야기를 하려다가 멈춘 듯한 찝찝한 기분인지라 딱히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미적지근했달까, 아쉬웠달까. 내일 아마 추가로 나올 테니 그 때 리뷰를 써도 늦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전의 리뷰에서 이미 13화의 대략적인 진행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도 있던 지라 더더욱 쓸 말이 없었고...
서해영이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서 벗어나 의존적인 모습을 탈피하기 시작할 거라는 것도 이미 이야기해서 또 할만한 것도 없고...
환각을 보는 게 결국 두 사람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중요한 분기마다 나타나는 일종의 퀘스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했었고...
딱히 더 할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리뷰 쓰는 걸 넘기긴 뭐시기 하고... 해서 가볍게 쉬어가자는 의미로 짧은 이야기만 하고 끝내기로 했다. 오늘은 좀 짧으니까 안심하시라.
1. 피 흘리는 그들
"때리면 흥분하나?"
박도경을 진성 변태로 오해하도록 만든 서해영의 이 대사는 그저 코믹한 요소로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꽤 의미심장하게 볼만한 다른 의미도 있고 사실 정확한 표현도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고 시작하자. 박도경은 때리면 흥분하는 남자가 아니라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보면 흥분하는 남자다.
....아... 필자가 써놓고도 너무 변태 같다. 박도경이 아니라 필자 본인이 말이다. 이걸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변태 인증하는 거랑 뭐가 달라.
...잠깐 눈물 좀 닦고... 하여튼 박도경은 때리면 흥분하는게 아니라 피를 보면 흥분한다.
박도경이 서해영이란 존재에 대해 최초로 인지한 것은 희란과의 약속 때문에 나갔던 커피숍이었다. 그 전에 길 가다 스쳐지나가기는 했는데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고 그저 환각에서 본 여자라는 인식만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박도경은 자리를 피하려다 오해영의 콧대를 어깨빵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오해영은 쌍코피를 흘렸지. 두 사람의 첫 만남과 상호인지에는 어깨빵과 코피가 있었다. 박도경은 코피 흘리는 서해영을 보며 넋이 나갔지. 여러가지 의미로...
첫 만남부터 피 터지는 사이라... 화끈한뎅.
이후 서해영이 회식 자리에서 이사도라에게 마빡을 맞은 다음, 박도경이 집에 데려다주려고 하자 삐쳐서 도망가다가 넘어지게 된다. 아, 이 장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 같으니 간단히 설명하자면 서해영이 박도경의 손을 물고 도망간 건 삐쳐서 그랬던 거다.
전해영이 화장실에서 다시 만나는 듯한 내용으로 통화를 해대니 전해영도 밉고 박도경도 미웠던 것. 하여튼 그 때 넘어지면서 서해영은 무릎에 피가 났는데 박도경은 그 무릎에 연고를 발라주려다가 심각한 성적 긴장감을 느끼며 결국 포기하고 만다.
물러섰던 이유는 술 취한 여자에게 손 대면 안 된다는 도덕적 결벽증과 느닷없는 성적 긴장감에 따른 부담, 무엇보다 환각에서 보던 입술의 상처가 없어서 키스할 날이 아닌가보다 하는 빠른 포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거 같다.
하여튼 박도경은 서해영의 까져서 피가 나온 무릎을 보며 성적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고 대망의 첫 키스(10화)에서 박도경은 서해영의 오른쪽 입술 상처를 보고 지금이 바로 환각에서 보았던 그 키쓰할 때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바로 입술을 덮쳤다.
농담이고 그 때 당시 박도경은 한태진을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의 질투심과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주는 서해영에 대한 미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해질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등등이 한데 섞여 이성을 잃었다.
게다가 그날 하필 서해영이 평소와는 다르게 골반 라인이 워후~ 드러나는 옷차림이었고 박도경 본인부터가 9화에서부터 어떻게 하고 싶은 욕망을 억지로 참고 있었으니 몇 대 맞고 끌어 안아 이리저리 뒹구는 동안 이성이 끊겨 순간적으로 본능이 튀어나와버린 것.
하여튼 박도경과 서해영의 첫 키스는 몸싸움 이후 피비린내 나는 격정 키스였다.
그렇다. 박도경은 때리면 흥분하는 남자가 아니라 피를 보면 흥분하는 남자다.
....
...미안... 농담이고... 아니, 완전 농담만은 아닌데... 사실 요기까지만 했다면 그저 박도경이 피를 보면 흥분하는 남자 정도로 이야기하고 끝냈을 테고 나중에 드라마 다 끝나고 우스갯 소리정도로 다루고 넘어갔을 것이다.
원래는 다른 의미에 대해서는 묻어두려고 하기도 했다. 복잡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는 싫으니까... 확대해석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13화의 한 장면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는 좀 꺼림칙하게 되버렸다. 사실 위의 장면들 말고도 박도경이나 서해영이 피 흘리는 장면은 꽤 자주 나온다. 그리고 그들이 피 흘릴 때마다 중요한 사건이 있거나 관계가 급변하였다.
위의 사례에 몇 가지 사건을 추가해보도록 하자.
오해로 인해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삼자대면이 있었던 날 박도경은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차 유리를 박살내버렸다. 또한 자기 주먹도 박살이 났지. 이미 혼자 속으로 썸을 시작한 서해영이 전해영에 대한 걸로 갈궈대니 화도 나고 부끄럽고 미안하기도 해서 박도경은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리고는 술 먹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대리 불러서 돌아와 서해영에게 엎혀 집에 들어갔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자기 손에 붙어져 있는 반창고를 발견하고 묘한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서해영이 해장국 끓여주며 긁어대는 바가지에도 한동안 묵묵히 참고 들어주었다. 따져보면 이건 화났다고 시위하는 거냐며 핀잔주던 서해영이 역으로 '내가 너 챙겨주었다'고 시위하는 꼴.
요게 좀 컸는지 박도경은 서해영이 혼자 오해해서 달려와 안겼을 때에도 밀쳐내지 않고 그녀를 받아주게 된다. 남들 앞에서 부끄러운 짓을 절대 못하는 이 소심한 남자가 모르는 사람 잔뜩에 회사 직원들까지 모여있는 대로 한 복판에서 사귀지도 않는 여자를 안아준 것.
박도경과 서해영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음을 작중 인물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는 장면이다.
또한 한태진의 차를 뒤에서 들이 박고 쳐 맞아서 피를 흘리는데 이 사건은 박도경이 질투심을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서해영을 좋아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또 한 번 박도경이 한태진에게 얻어맞을 때 역시 서해영에게 모든 사실이 까발려져 박도경과 서해영의 관계에 가장 큰 위기가 도래하던 순간이었다.
결국 피를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기야 피가 날 정도의 사건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드라마가 있겠는가 만은.
거기에다가 13화에서 나온 까져서 피가 배어나온 서해영의 뒷꿈치. 서해영이 박도경에 대한 그리움과 마음의 상처를 억지로 육신의 고통으로 잊어보기 위해 신은 작은 구두가 만든 그 상처가 등장한다.
억지로 밝은 척 괜찮은 척 했지만 견디기 힘든 그리움이 그녀를 계속 괴롭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고 남들이 미처 모르던 숨기고 싶은 그녀의 고통을 박도경이 한 번에 알아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했다.
이번엔 내가 너를 밀어내겠다며 서해영이 억지로 차갑게 대하고 있는데 박도경은 그녀의 신발 소리만 듣고도 불편해보인다면서 신발을 바꾸라고 말해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서해영이 상투를 틀어쥐었을 때 박도경을 제대로 조련해주길 바랬던 필자가 '이 정도면 별 수 없다. 이 놈 강적인데'하고 스스로 포기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피가 날 정도였는지는 나중에 알았지만 소리가 불편해보인다고 너의 마음도 힘들어보인다고 단 번에 알아채는 남자를 어느 여자가 버릴 수 있겠나 싶어서...
하여튼 따지고 보면 문학작품이나 여타 미디어에서 피 흘리는 장면들은 엄청 많다. 워낙 흔하다보니 너무 자주 등장해서 좀 식상하달까.
다만 대부분 한 두 가지의 의미로만 쓰였을 뿐 피가 가진 여러 의미와 상징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작품은 별로 없다. 그런데 하필 이 드라마가 그렇지 않은 경우였다. 이 작품을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이 흘리는 피가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피를 통해 성적 긴장감을 느끼는 건 호러물이나 에로물에서 흔히 그렇듯 본능과 생명력을 의미한다.
서해영의 까진 발목의 피는 그녀의 심적 고통과 아물지 않은 상처를 의미하고 한태진에게 맞을 때마다 흘린 피 역시 박도경의 심적 고통과 속죄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건 12화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던 미래 박도경이 현재 박도경의 대속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12화에서 작가와 감독은 한태진이 진짜 망한 이유를 알려주며 시청자들에게 박도경의 원죄를 사하도록 하였고 마지막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던 미래의 박도경을 통해 현재의 박도경이 다시 태어났음(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서해영에게 돌아가도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대속과 같이 거창한 표현을 써도 되나 싶긴 한데... 마음을 기준으로 본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나 다름 없으니 또한 시청자들의 평가를 기준으로 봐도 때려 죽일 놈에서 알고 보니 저 놈도 불쌍한 놈이었어로 바뀌었으니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돌 던지지 마시라.
2. 같은 상처를 가진 그들. 다시 심장이 뛴다.
그들은 정말 문자 그대로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두 사람은 결국 타자에 의해 파혼을 당한 사람들이고 그로 인해 결코 정상적이라고 말하기 힘든 삶을 살아왔다. 서해영은 본인 말마따나 미쳐버렸고 박도경은 타자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거의 포기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가족들에게서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의 육체적인 상처가 매우 유사한 부위에 생긴다는 점이다.
서해영: "든든해요. 어딘가 나랑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거. ...미안해요. 그 쪽 상처가 내 위로가 된다고 해서."
4화 초반부에 식당에서 박도경을 우연히 만났던 서해영이 했던 발언이다. ...이 여자 정말 지구멸망도 촉으로 맞출 지 모르겠다. 왜 로또를 안 사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 발언 이후 그들이 입는 상처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박도경은 한태진에게 맞아 코와 오른쪽 눈, 왼쪽 입술에 상처를 입고 차 유리 깨다가 오른쪽 손을 다치는데... 서해영은 이사로라에게 오른쪽 이마, 박도경에게 코, 역시 박도경과 몸싸움하다가 왼쪽 입술, 술 먹고 도망치다가 오른쪽 무릎을 다친다.
...아무리 봐도 작가나 감독이 대놓고 의도한 거다.
근데 이거 전의 리뷰에서 했던 이야기 아니냐고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다. 맞다, 전에 했던 이야기이다. 근데 또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박도경: "반갑다. 나만 아프면 되게 억울할 것 같았는데 너도 아파서 엄청 반갑다. 이씨.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나 똑같이 니 결혼 깨버릴 꺼고 그래서 니가 내 옆방으로 들어오게 할 꺼고 그렇게 너 만날 꺼야. 미안한데, 정말 미안한데. 니 결혼 깬 거 하나도 안 미안해, 이 씨. 미안해. 근데 이게 본심이야. "
......뭐가 달라.... 나랑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이 있어서 든든하다는 서해영의 말이랑 너도 나처럼 아파서 좋다는 박도경의 말이랑 뭐가 달라. 표현 방식이 좀 다를 뿐 결국 똑같은 의미다.
처음 박도경과 서해영이 파혼의 상처라는 똑같은 아픔으로 서로에게 공감과 동질감을 가지고 가까워졌다면 그래서 그들이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었다면 결국 그들이 위기를 겪고도 다시 만날 결심을 하는 것 역시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입은 상처. 내가 아프듯 상대도 아프다는 것만큼 기쁘고 안심되는 일이 있을까. 같은 상처로 시작된 그들이 같은 상처로 그들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거다.
박도경: "이번에 보인 영상은 그 여자가 내게 달려와요. 달려와서 내 품에 안 겨요. 근데 만약에 여기서 그 여자를 받지 않으면 그 여자를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이렇게 저렇게 피해도 결국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예요. 그 여자가 자꾸 나를 풀어헤치는 느낌이예요. 그만 불행하고 이제 같이 행복하자고." (4화 마지막)
4화 마지막에서 서해영은 박도경에게 달려가 포옹했다.
박도경은 결국 끊어지지 않을 거란 생각에 그녀를 받아주었고 그녀를 받아든 순간 그들의 심장은 다시 크게 뛰기 시작했다. 이거 잘 안 들릴 수도 있는데 이 포옹씬에서 볼륨을 좀 높여 들어보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내내 죽어 있던 그들에게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이랄까.
13화 마지막 서해영은 박도경에게 달려가 포옹하고 입맞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들의 심장 소리가 들리며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들의 사랑이 또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다.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사랑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필자는 놀라울 정도로 작가와 감독의 집요한 집착 같은 걸 느꼈다. ...특히 심장소리 넣는 건 아무래도 감독의 의도 같은데...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드라마 감독이나 작가나... 하나같이 변태들이다.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