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세 달간 유럽 여행을 갔다온 S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여행담도 들을 겸 시꺼먼 사내놈들은 오랜만에 호프에 앉아 맥주 들었다.
"나 이번 여행에서 이상형을 만났어."
어쩌면 뻔할 수도 있는 여행 중 썸씽에 우리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S의 이상형은 쉽게 찾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반반하고, 성격도 수더분하니 좋은 S는 상당히 인기가 많은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연인을 한 번도 만들지 않았는데, 그것은 취미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S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즈음 문화를 좋아했다. 당시 나왔던 영화, 드라마, 음악을 한국과 외국을 가리지 않고 모두 섭렵했다.
아니, 2090년대도 아니고 1990년대라니. 이미 한 세기나 넘게 지난 애매한 시점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고집을 부렸다. 그 당시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거 같다고. 함께 감동받으며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고.
S의 똥고집에 결국 먼저 굽히고 들어간 건 S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었다. 꽤 많은 이들이 1990년대의 문화를 공부하고, S에게 접근했지만(심지어 몇몇 남자들 까지도) S는 그들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 챘다.
결국 아무도 그와 이어지지 못했고, 여태까지 그는 홀로 지내왔다.
이번 유럽 여행에 3달이나 걸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초속 비행기나 초속 열차를 타면 훨씬 빠르게 갔다 올 수 있었지만,
그는 최대한 20세기 기차를 타고 유럽을 일주하겠다고 다짐했다. 20세기 기차는 이제 하나의 관광상품이 되어 여기저기 흩뿌려지듯 종종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22세기 교통수단과 20세기 교통수단을 번갈아 가며 유럽을 일주했고 3달이나 걸려서야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이상형을 만났다니! 그의 한 마디로 우리는 모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고풍스러운 호프집이었지. 옛스러운 느낌이 나는 곳이었어. 하루종일 관광을 하며 지친 나는 맥주나 한 잔 할까 하는 생각에 들어갔었지.
그 곳에서 나와같이 큰 배낭을 옆에 두고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한 여성을 보았어. 살짝 갈색 빛이 나는 긴 생머리에 뽀얀 얼굴을 가진 동양인이었지.
하얀 티셔츠에, 간단한 청바지를 입고 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더라고.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20세기와 21세기 초에는 그런 스타일이 유행이었거든. 뭐, 우연히 그런 스타일을 한 것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나는 호기심이 들었어. 휴대폰으로 번역기를 켜고 그녀 옆으로 가서 말을 걸었어. 그러니 그녀는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말하더라고. 자기도 한국사람이라고 말이야.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은 20세기에 유명했던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었어. 소설 뿐만 아니었지. 그녀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던 거야.
1990년대의 감성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어. 피로를 풀려고 간단히 대화를 나눈다는 게 밤을 세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
감성 뿐만 아니라 유머도, 취향도 가치관까지 모두 나와 너무 닮아있는 사람이었거든. 시간이 가는 걸 아쉬워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밤새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눴지. 마치 비포 선 라이즈처럼 말이야"
그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영화인지 드라마인지를 인용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참지 못한 옆 놈이 S에게 물었다.
"야 그래서 뭐야. 잘 됐다는 거야? 그녀랑?"
"그게.... 아니..."
"왜?! 이상형이었다며!"
"그게...결혼할 남자가 있대. 미국에. 결혼 전 마지막으로 홀로 여행을 가고싶어서 온 거라 하더라구."
"그래서 그럼 그렇게 끝난 거야? 아무것도 없이?"
"밤새 대화를 나누고 해가 떴을 때, 우리는 서로의 스케쥴이 있었기 때문에 헤어져야 했어. 내가 아쉬웠던 만큼 그녀도 아쉬워했던 걸 느낄 수 있었어.
호프집 앞에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보자고, 즐거웠다고, 서로 그렇게 말만 나누고 다신 보지 못할 걸 알면서 헤어져야만 했지.
짧은 미소로 작별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향으로 떠났어.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나는 못내 아쉬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 쪽을 향해 돌아보았지.
그런데 같은 순간 그녀도 나를 돌아본 거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서로는 그저 바라만 보다가 먼저 그녀가 내 쪽으로 달려왔어.
그리고 짧은 입맞춤을 나눴어. 그 뒤로 정말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헤어졌어."
당시를 아련하게 추억하며 S는 말을 마쳤다. 하지만 그의 말에 친구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이거 뻥 아니야?"
"어이구, 혼자 영화를 쓴다."
"그게 바로 20세기 감성이냐? 그 때 사람들은 아마 손발이 발달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오그라들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진짜라니까!"
S는 흥분까지 해가며 진심을 표력했다.
"그럼 거짓말이 아니란 걸 증명해보든가."
한 놈이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거짓말탐지기 앱을 실행시켰다. 거짓말 탐지기 앱을 켠다는 것은 사실 보통 관계에서는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겠지만 오랜 친구들이라 그런 행동을 하는 게 가능했다.
꽤 무례한 행동일 수 있기에 여기서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S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S는 정말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유럽에서 이상형을 만났습니다."
그의 외침에 앱은 거짓말 탐지를 시작했고 잠시후 결과가 화면에 떠올랐다.
-진실-
"오..."
"진짜네..."
"진짜 20세기를 좋아하는 또라이들이 만났다는 건가..."
그제야 친구들은 놀란 표정으로 S를 믿기 시작했다. S는 아직 씩씩댔지만 그래도 꽤 분이 풀린 표정이었다.
"아니면, 혹시 기억 조작한 거 아니야?"
와, 기억조작 이야기 까지 나올 줄이야. 쉽게 할 수 있는 발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S가 기억 조작이라니.
아마 그런 발상이 나온 건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공공기관 "기억조작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 조작이라는 건 보통 치료 목적으로 많이 하고, 일반인이 하는 건 극히 일부였다.
기억이라는 건 사람의 인격과도 관련된 문제라 일반인이라도 함부로 건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라에서 관리하는 것이기도 하는 거였고.
정말 무례한 발언이었지만 오래된 친구 녀석들이 그렇듯 하나씩 동조하기 시작했다.
"음, 가능성 있어. 이번 여행에 그런 여자를 만나기를 꿈꿨던 거지. 그러다가 결국 못만나니 그런 짓까지 해버린 거고"
"야, 그럴 듯 한데? 이녀석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만나보고 싶었냐?"
다들 농담으로 낄낄대며 한 말이었지만 S는 정말 분개했다.
"이것들이 진짜! 이번에도 증명해줘?"
S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기억조작센터의 앱을 깔고 자신의 사용 내역을 확인하려 했다.
치료 목적이 아닌 기억 조작은 언제든 본인이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기억 조작을 했는지는 직접 센터를 가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직접 센터를 간다고 하더라도 기억 조작 당시 나중에 조작 내역을 확인할 수 없게 설정할 수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진짜로 앱을 깔고 홍채 인식으로 본인 인증을 한 후, 기억 조작 내역을 확인했다.
그러자 잠시후 기억 조작 내역이 스크린에 떴다.
-21xx년 x월 xx일 기억 조작 내역 있음-
스크린을 보고 S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놀랐다. 그가 진짜로 기억 조작을 했던 것이다.
"x월 xx일이면 네가 여행갔다가 돌아온 바로 그 날 아니냐?"
"이거 확실하네. 진짜였을 줄이야..."
S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 장난으로 한 마디씩 했지만 S의 절망한 표정에 너무 그를 다그치지는 않았다.
"뭐, 잘 놀았으면 됐지. 진실을 결국 밝혀졌군! 근데 우리 너무 안 마셨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자, 마시자!"
S는 겨우 술잔을 들기는 했지만 이미 정신은 딴 데 팔린 듯 했다. S도 그렇지만 나도 믿기지가 않았다.
"야, 그 내역 내가 한 번 확인해 봐도 돼?"
그는 멍한 표정으로 나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아무리 봐도 기억 조작 내역은 사실이었다.
조작내역을 터치하여 자세한 사항을 보았다. 그곳에는 정확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가격 영수증까지 함께 적혀있었다.
-서울 지점-
-가격: 200,000원-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했다. 20만원이라고?
기억 조작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서로 완전히 베타적이지는 않지만 기억 삽입과 기억 삭제로 나뉜다.
하나의 기억을 삽입하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 기억에 맞게 그 이후 이야기들도 개연성이 맞도록 조작해야 하므로 가격이 매우 비싸진다.
하지만 20만원이면 최소의 가격으로, 아주 간단한 기억 삭제의 가격이다. 그러니까 그는 기억 삽입을 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가 남는다. 그는 도대체 어떤 기억을 삭제한 거지? 강렬한 기억이었더라면 겨우 20만원일리가 없다.
그러다가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멍하니 있는 S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야, 만약 네가 그녀를 실제로 만났다면, 너는 그 기억을 어떻게 하고 싶어? 기억하고 싶어, 아니면 삭제하고 싶어?"
허공을 보며 눈이 풀린 S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글쎄, 모르겠다. 기억을 하는 것도, 잊는 것도 너무 후회가 될 것 같아. 어쩌면 기억 조작이라서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어느정도 나는 확신이 갔다. 그러니까 그는 잊기엔 너무 아쉽고, 그렇다고 기억하기엔 너무 가슴아플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억하지도, 잊지도 않을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기억 조작 센터에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가 기억을 지운 건 단지 기억조작센터에 간 일,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잊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기억하지도 않을 수 있었다.
괜찮은 추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얻은 '지금'을 망칠 수 없었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