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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님의 치하포 사건에 대한 분석.bunsuk
게시물ID : history_262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군중인간
추천 : 0
조회수 : 306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6/11 02: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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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의견이 분분한거같아서 내가 함 찾아봤음
첫번째는 김구의 살해의도는 단순히 국밥을 늦게 줘서라고 주장하고있음 그래서 구글링해봄
[일본인 토전양량의 피살사건과 범인체포요구 건]
공문제20호
서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 인천령사의 보고에 따르면, 장기현 평민 토전양량(스치다조스케를 말함)이라는 자가 조선인 1명(평안도 룡강 거주 림학길, 20세)을 데리고 황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진남포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도중에 황주 십이포에서 한국 배 1척을 세내어 대동강을 내려가다 3월 8일 밤 치하포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9일 오전 3시경 그 곳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식사를 하기 위하여 그 곳 숙박업자 리화보 집에 갔습니다. 다시 귀선하려 할 때에, 그 집 뜰 앞에서 그 여인숙에서 숙박한 한인 4, 5명에게 타살되었습니다. 고용된 한인 림도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였지만 간신히 위험을 피하여 같은 달 12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그 곳 주재 평원경부에게 위와 같은 사건 전말을 알려왔습니다. 그래서 평원 경부는 순사 2명과 순검 5명을 인솔, 같은 달 15일 사건 현장에 도착, 검사를 하려고 하였더니 여인숙 주인은 경부 등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였고, 피해자의 시체는 벌써 강에 버려진 뒤라 검시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여인숙의 뜰 앞에 핏자국이 여기저기 있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부 일행은 그곳 군 직원에게 엄하게 항의하였더니 그들이 가해 혐의가 있는 자 7명을 데리고 옴에, 조사해 보니 누구도 가해자가 아니고 다만 이 사건을 들어서 알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토전양량의 남은 재산은 한전 10표와 행낭보따리 1개가 있는데, 한전 이표는 누군가 빼앗아 가고 나머지는 무사히 인천 영사관이 인수했다는 것입니다. 조사하건대 본건 피해 전말은 전기한 바와 같이 우리 영사의 보고에 따라서 사실이 명확할 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쉽게 수색하여 체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귀 정부는 날짜를 미루지 말고 곧 평양 관찰사 및 해당 군수에게 엄중하게 훈령을 보내어 일정을 정해 가해자를 체포하고 상응한 처분을 하시길 부탁드리며, 위와 같이 조회하오니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896년 3월 31일
변리공사 소촌수태랑
외무대신 리완용 각하
 
사건 경유를 보면 김구 선생이 사이코패스 같아 하지만 의문점이 드는게 있어 바로 외무대신 이완용에게 사건일지가 보내져 그저 어이없는 일로 조선인의 우발적인 살인사건으로 왜곡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4,5 명에게 타살되었다는거야 공문과 주장이 다르지?? 김구혼자서 한 우발적 범행이다 아니면 4,5명이 의도한 의거이냐 당시 일본으로선 을미사변의 공범이 의거해서 사망했다는 소식은 좋지 못했을거야 당시 을미사변은 10월 31일에 일어났고 이사건은 3월 31일에 벌어졌어 을미사변이 일어난뒤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니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조용히하는게 나았을거야
 
2번째는 이사건의 취조문이야 8월 31일에 취조된내용이지
 
[문] 그대가 행한 일은 이미 이화보(李化甫)가 명백하게 고한 바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라.
[답] 내가 금년 정월 24일 용강(龍崗)으로부터 안악(安岳)으로 가던 도중에 평양 사람 정일명(鄭一明)과 함경도 정평(定平) 사람 김장손(金長孫)과 김치형(金致亨)을 만나 같은 배를 타고 치하포(鴟河浦)에 와서 점주(店主) 이화보를 찾아가 저녁을 먹고 그곳에 투숙하였다.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본즉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라고 생각이 되자 가슴의 피가 뛰었다. 그러한 때 그 일본인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발길로 차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때려 죽여서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 그러고 나서 동행한 세 사람은 약간의 현금을 가져다가 점주에게 8백금을 맡기고, 그외의 돈은〔엽전으로 추측됨-역자주〕 세 사람의 노자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본인은 일본인의 환도(環刀)를 탈취하여, 당나귀 한 마리를 일흔 다섯냥으로 사서 단기(單騎)로 재령(載寧)으로 향했다가 동년 3월에 집으로 돌아왔다가 해주(海州) 순사에게 체포되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두번째 의문이야 심히분개해서 우발적 살인을했다 써있어 혼자 말이지 하지만 위 공문과 맞지 않아 일단 증인이 있어야 몇명이 함께한 범죄인지 판단했을거야
하지만 2번째 기록에서는 문맥상 같은 친구들은 먼저 가고 혼자저지른 우발적 범죄라고 나와있어 하지만 1번째 공문에서는 34명이 저지른 일이라고나와있지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 누가 풀어줬냐는거야 풀어줄사람이있나? 탈옥을했으면 친일파 빠는놈들이 오질나가 깟겠지 하지만 그런기록도 없어 최소한 공문이라도 나와야하는데 신문도 물론이고 하지만 김구선생은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셧지 그럼 누군가의 조력이있었다는건데 고종이 꺼내줬다면 단순한 우발적 살인사건이 아니게 되버려 더 찾아 봤으나 정보력이 부족해서 여기까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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