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출처 :안동초등학교 62회
글쎄 옛날에 안동이 여인왕국 이었다나?
경북 안동의 한 산골마을에 「이상한」유적들이 발견됐다. 한국 최대의 돌거북상 6개와 6각형 모양의 주춧돌, 인공축대 등이 지금도 방치돼 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외진 산자락에 「소왕국」을 건설했을까? 이 유적지를 처음 발견한 이는 전설의 여인왕궁터라고 주장하는데….
안 영 배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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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초 대전에 사는 한 기공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경북 안동에 왕궁터가 발견되었는데 같이 가서 확인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전공」과는 별관계가 없을 법한 전혀 엉뚱한 제안이었지만 귀가 솔깃해졌다. 평소 빈말을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왕궁터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무언가 역사적 의미가 담긴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일 이어지는 서울의 찜통 무더위 속에서 반은 피서삼아, 반은 문화유적 답사삼아 주말 동행을 약속했다.
전화의 주인공은 올해로 26년째 기공사로 활약, 우리나라 기공계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金炅甫씨(김경보·49). 대전의 약속 지점에서 그를 만난 뒤 바로 안동으로 직행했다. 경북 영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광평리(안동시 서후면)로 접어들어 10분 남짓 달렸을까, 「가야」라는 팻말이 서 있는 마을 입구가 오른쪽에 나타났다. 차를 바로 꺾어 10m쯤 진입했더니 오른편 논 한가운데에서 버티고 앉아 있는 아기거북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잘 생긴 돌 거북상이다. 초록빛 벼이삭 틈에 웅크려 있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 이 논의 주인은 거북을 옮기기가 귀찮았던지, 아니면 거북상을 신령스럽게 생각했던지 논에 그대로 모셔두고 있었다.
『왕국의 번영을 기원하던 거북들이지요. 여기 말고도 왕궁터 입구 곳곳에 아기 거북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씨는 씩 웃는다. 아예 우리 일행이 가는 목적지가 왕궁터라고 단정하고 있는 말투다. 아기거북을 만난 곳에서부터 다시 5분여 겨우 차 한대 통과할 정도의 시멘트 도로를 달리는데, 차창 좌우로는 산쪽으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전형적인 두메산골 풍경만이 펼쳐진다. 이런 외진 곳에 무슨 왕궁터 같은 것이 있으랴 하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그러나 좁은 도로 하나만을 가운데에 남겨두고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야산을 통과하자마자 경치가 갑자기 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5만평 정도 되는 평지가 나타난 것이다. 도로가 난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분지형이었다. 아기 거북상이 있는 마을 입구에서조차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내부 풍경이다. 김경보씨는 평지에 들어서자 차에서 내린 다음 아담한 규모의 콩밭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손짓하는 곳에는 산자락 아래에 파묻힐 듯 웅크리고 있는 바위 덩어리가 있었다.
『무엇처럼 보입니까?』
역시 거북이었다. 그것도 좀전에 본 아기거북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크기였다. 정면에서 바라볼 때 거북 머리에서 밑바닥까지는 높이가 5~6m, 양발 사이의 거리는 4~5m쯤 되는 거대한 돌거북상이었다. 그리고 거북의 입에는 지름이 대략 1m 되는 둥그렇게 생긴 「구슬 돌」이 물려 있었다. 마치 거북이가 여의주를 입에 문 것 같은 형상이다. 그러고 보니 바로 전설상의 「금구(禽龜)」였다. 즉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북」을 묘사한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금구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한 터였다. 실제로 돌거북은 두 발(날개)로 땅을 딛고 얼굴을 하늘쪽으로 올려다보면서 비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거북바위를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콩밭을 건너 바위앞까지 다가갔다.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조성했음이 분명했다. 커다란 돌덩이를 어디선가 가져온 다음 도구로 다듬은 표시가 남아 있었다. 아쉽게도 거북바위의 왼발은 일부가 떨어져나가 바로 밑에 방치돼 있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라도 한반도 땅에 이처럼 거대한 거북바위가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보고된 바 없다. 더 나아가 전세계에서도 그 정교한 모양새나 크기에 있어서 이곳의 거북바위와 견줄 만한 것은 없을 성싶었다.
6개의 돌거북과 6각형의 왕궁터
김경보씨는 또 거든다.
『지금 거북바위가 앉아 있는 산은 왕국 사람들이 천신제(天神祭)를 지내던 곳이고, 거북바위는 왕국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산 자체가 6각형 구조로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거북바위도 모두 6면을 따라 6개가 있었지요. 이곳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여의주(둥그런 돌)를 잃어버린 거북바위가 1개 더 있고, 또 그 밑으로는 논에 잔해가 흩어져 있는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나머지 3개의 거북바위도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의 말은 척척 맞아떨어졌다. 김씨는 이미 완벽하게 사전답사를 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산자락 아래로 산을 둘러싸듯이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다른 거북바위가 있는 곳으로 옮기는 동안 의외의 수확을 거두었다. 수풀 속에 살짝 숨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인공축대였다. 축대는 김경보씨도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지 신기해했다. 그것은 3~4단으로 축성된 바위들이 산 둘레를 2백m쯤 둘러싼 형태였다.
누가, 왜 그랬을까? 사방이 산으로 둘어싸인 외진 산골 마을에서 유독 이 산에 돌거북상을 만들고 축대를 쌓았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돼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 산 자체가 왕궁터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왕궁 터는 지금 논으로 변한 이쪽 평지입니다. 이곳저곳에 돌무더기들이 보이지요. 그것이 왕궁의 주춧돌입니다. 그런데 널려진 주춧돌들도 그 선을 따라가다보면 역시 6각형 구조입니다』
주춧돌은 여름 태양을 한껏 받아 푸르게 자란 벼이삭들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너무 방대하게 흩어져 있어 6각형인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김씨는 논이 텅 빈 겨울에 와서 보면 분명히 나타난다고 말했다. 6자가 들어가는 이상한 모양의 구조물들은 아직까지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보고된 바가 없다. 결국 호기심 삼아 김씨를 따라 나섰다가 의외로 수수께끼의 문화유적 현장을 만난 셈이다. 마치 고고학자가 최초로 전인미답의 유적지를 발견해냈을 때 느끼는 희열감까지 들었다.
이곳 유적지에서 마치 고대에 살아본 적이 있다는 듯이 말하는 김씨의 「일방적인」 해설은 일단 접어두고 마을촌로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행정지명으로는 광평 1리와 2리, 일명 제전부락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50호 정도가 사는 아담한 산골마을. 먼저 노인회관을 찾았다. 마침 이곳에서 토박이로 살아온 유건기씨(68.광평2리)를 만났다. 거북바위에 대해서 물어봤더니 대뜸 『아, 그 용바우(바위)요? 그것은 아마 땅 생기면서부터 있었지요』하면서 매우 오래됐다고 말한다. 그는 거북 입에 들어 있는 여의주 때문에 금구상을 용상으로 본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다 「용바우」라고 부른단다.
『용바우 밑에는 거북바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77년도쯤에 새마을 사업을 한다고 길을 내면서 바우들이 깨져버렸습니다. 깨진 돌들이 아직 거기에 남아 있어요』
유씨는 논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바위들이 거북바위였다는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의 아주 먼 옛날 조상 때부터 있어 왔다고도 증언했다. 다른 마을사람들도 대개 비슷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터전이 그 옛날 왕궁터였다는 얘기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듯했다.
미스터리 고대사
이곳이 왕궁터든 아니든 누가 이 첩첩산중에 어마어마한 거북상을 세우고, 산에다 인공적인 축대를 쌓고, 들에다가는 주춧돌로 건물을 세웠단 말인가. 그것도 마을 입구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도록 아주 은밀한 곳에 감추듯이 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한반도의 왕궁은 대부분 평지에 세워졌다. 신라의 경주가 그렇고, 백제나 고구려의 수도도 마찬가지였다. 왕족과 신하들이 있고 일반 백성들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평지가 적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김경보씨의 주장과는 달리 다른 용도로 쓰인 유적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역사서 혹은 문헌 중에서 경상북도 안동과 관련해 어떠한 왕국이 존재했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신라가 일어나고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백제가 태어나고, 한강 이북에 고구려가 있었고, 그 후에 경상남도 쪽에 가야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 시기에 안동에 어떤 왕국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고대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흔적이나마 기록해두었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원후 7세기에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이후 이어지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찾는다는 것은 더 무리한 일이다.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역사, 고고학적 용어로는 「원삼국시대」때의 일이 아닐까. 실제로 김경보씨도 이 유적지의 건설은 한반도에 신라와 백제가 들어서기 이전인 BC 100년 전후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씨의 「가설」이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다. 그 가능성은 안동과 거리가 멀지 않은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사벌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일명 「사량벌국」이라고도 하는 사벌국은 BC 1세기 이래 경주의 사로국(신라)과 대등한 교역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토착 지배집단이 경주의 귀족으로 흡수되기까지 4~5세기 이상 독자적인 정치집단으로 성장한 소국이라고 전한다. 상주 지방에서는 BC 2~3세기 이래의 청동기 유물도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
이제는 본격적으로 김경보씨를 「심문」할 차례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왕궁이라고 주장하는 이곳의 유적지를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으며, 그 존재했던 연대를 원삼국시대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는가. 그는 고고학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던 아마추어 아닌가.
김씨는 먼저 일부러 이곳을 안내한 것에 대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양해를 구한 다음 장황하게 그 배경을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몇해전 박모라는 청년이 「심령 기치료사」로 소문난 김씨를 찾아왔다. 박씨는 단전(배꼽 밑의 경혈) 아래 부분에 심한 습진이 생겨 낫지 않는 데다가 밤만 되면 악몽에 시달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고 호소했다. 병원을 찾아도 그의 습진과 악몽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박씨에게는 남에게 털어놓지 못할 고민도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은 원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는데 남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여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해 유년시절에는 여자아이처럼 소꿉놀이를 해왔고, 철이 들어서는 여성들의 소지품을 수집해 몰래 간직하는 것으로 여인이 되지 못한 한을 풀어왔다. 그런 한편 자신의 이런 모습을 극복해보려고 일부러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된 기합과 훈련 속에서도 박씨의 내면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내 팔자는 여성으로 살아야하는 것이구나』하고 체념하고 마지막으로 돈을 모아 성전환수술을 받으려고 하던 차에 습진이 생긴 것이다.
본론은 지금부터다. 찾아온 박씨를 처음 본 순간 김경보씨는 박씨가 여왕의 후생(後生)이라는 것을 투시(초능력의 일종)로 알아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2천년도 훨씬 넘은 오랜 옛날 한반도 땅에서 남자들에게 핍박받는 여인들을 구해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 「사라」라는 여왕이었다. 박씨가 여인이 되고 싶어했던 것도 전생의 기억이 현생의 잠재의식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박씨는 여인 왕국을 건설하면서 당시 수많은 남자들을 죽인 업으로 인해 현생에 태어나서는 질병과 악몽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 김씨는 자신의 기로써 박씨의 압성습진은 물론 악몽까지 말끔히 고쳐냈다.
과거를 투시해 찾아낸 역사유적?
김씨로부터 치료를 받은 후 박씨는 자신의 전생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졌고 그런 능력을 배우고 싶어했다. 김씨는 그가 자질이 있어 보여 「자동서기」라는 영능력 개발 훈련을 시킨다. 자동서기는 외국 말로 「아캬샤 레코드(akasha record)」라고 하는데 미국의 유명한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와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가 이 방법으로 수많은 예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기술은 한마디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날아오는 과거 혹은 미래의 메시지를 영적으로 수신해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 이리하여 박씨는 자신의 전생의 역사, 곧 여인 왕국의 역사를 자동서기로 기술해나간다.
그러는 한편으로 김씨는 전생에 여인 왕국과 관련된 환자들의 방문을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울산에 사는 황명숙씨. 수년 전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임파선에 암이 재발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황씨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김씨를 만난다. 황씨는 김씨로부터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말을 듣게 된다.
황씨의 전생은 여인 왕국 시절의 여자 무사. 이 여자에게 무예를 가르친 스승이 바로 김씨 자신이었다는 것. 말하자면 전생의 스승과 제자가 현세에서 기공사와 환자로 만나게 된 셈이다. 어쨌든 전생의 여자 무사는 다른 검객들과 검술겨루기를 무척 좋아해 사람들을 수도 없이 살상했다. 그 벌로 황씨는 현생에 태어나 고통을 받게 됐다. 재미있는 현상은 황씨는 언제나 목부위와 배부위에 묵직한 통증을 느껴왔는데, 김씨는 황씨가 묻기도 전에 전생에 검으로 남의 목과 배를 많이 갈라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현상은 황씨가 김씨로부터 기치료와 기운동을 받으면서 나타났다. 황씨는 치료를 받아 몸이 좋아지자 기운동 시간을 차츰 늘려갔는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무술동작이 나왔다. 평소 춤이나 노래 같은 것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고 운동이라고는 아무 것도 해보지 않았던 전업주부인 황씨에게서 놀랄만한 전통 무예동작이 나타난 것. 처음엔 가족들도 믿지 않았으나 그녀가 무술 시범을 보이자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암에서 완전히 벗어난 황씨는 지금도 김씨와 함께 기수련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한 간 질환자 등을 고쳐내면서 여인왕국과 관련된 희한한 얘기는 적지 않지만 대략 이 정도로 그치기로 하자.
『제 자신이 여인 왕국과 무관하지 않은 사람인지, 환자들도 여인왕국과 인연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얼마전에 박씨가 자동기술로 밝혀낸 우리 고대 역사를 마무리해 책(무린바타 전4권, 행림출판)으로 엮어 냈습니다. 여인들의 왕궁 터도 책의 무대가 되는 장소를 사진으로 찍기 위해 박씨와 함께 안동 일대를 다니면서 찾아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고대사에서 잃어버린 역사를 햇볕속으로 끄집어낼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김씨는 공상 과학소설보다도 더 앞서 나가는 논리를 가지고 매우 신념에 차 얘기한다. 김씨가 밝힌 환자들을 만나 확인해봤지만 역시 김씨의 「비상식적인」 말에 깊이 동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찌됐건 김씨로 인해 자신의 건강을 되찾은 것을 최대의 증거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김씨는 안동의 왕궁터를 눈앞에 들이밀고 있다. 김씨는 왕궁터가 타인 소유라서 파헤칠 수 없지만, 이 왕궁터를 발굴하면 훨씬 더 구체적인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돼 있다고 확신한다.
아마추어들의 세계적 발굴기
하긴 고고학자만이 문화유적 발굴을 전담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고고학 발굴사에서 유명한 발굴들은 전문가보다도 비전문가의 손에 의한 것이 더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경에서 무려 1백52번이나 등장하는 고대의 대제국 앗시리아는 1843년 봄까지는 단순히 전설상의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프랑스의 의사 출신인 보타와 영국의 빈털터리 여행자 레이아드가 앗시리아 제국의 왕궁터를 발굴함으로써, 그때까지 고대 이집트 문화가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던 인류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고고학자가 아닌 보타와 레이아드의 땅파기는 현대 고고학 발굴의 효시가 되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전설의 도시 트로야와 미케네를 찾아낸 실리만 역시 고고학자가 아닌 사업가였다. 고고학자들은 전설만을 믿고 주먹구구식으로 땅을 파헤치는 실리만을 정신병자라고 비웃었지만, 이후 그가 발굴한 터에서 유물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밀림속에 버려진 마야제국의 유적지를 처음 발굴한 스티븐스는 법률가 출신이었고, 캄보디아에서 사라진 크메르왕국을 찾아낸 뷰우오는 가톨릭 신부였다.
외국뿐이랴. 지난 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동양 최고(最古)의 유물선과 유물을 처음 발견하고 이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 역시 고고학과는 상관없는 아마추어들이었다.
그러니 기공사라고 해서 자신의 독특한 「비법」을 가지고 역사투영을 통해 유물을 발견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실제로 김씨는 이 방법을 통해 지금까지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흔적을 찾아내지 않았는가. 문제는 이것이 과연 사료에서 나타나는지, 직접적인 증거가 있는지 여부다. 김씨의 확신대로 땅속 깊숙이 묻혀 있을 유물들이 발굴된다면 여인왕국의 이야기도 전설이 아닌 실화로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여기서는 남겨두자. 그것은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남은 것은 앞으로 이곳을 정식으로 발굴할 누군가를 위해서 참고삼아 여인 왕국 등장에 관한 역사적 배경을 들어보기로 하자. 물론 이것은 문헌에 나온 역사가 아닌 박씨가 받은 「소설 같은」 자동서기를 통해서다.
한반도의 아마조네스 왕국
때는 고조선 시대. 한반도 북쪽 땅에서 충성을 다하다 반대파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최후에 환멸을 느낀 「용장」이란 장수가 만삭의 몸으로 병든 아내와, 딸 「시애」을 데리고 사람이 살 만한 땅을 찾아 남하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내를 잃고 아버지와 딸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안동 일대. 이후 용장은 딸인 시애를 통해 자손을 퍼뜨리게 되고, 후손들은 점점 번창해 「알신」과 「공명」이라는 씨족 집단으로 성장한다. 이들 집단은 철저하게 여성을 존대하는 모계 중심사회를 유지한다. 그것은 시조 용장의 유언 때문이었다.
이 씨족 사회가 바깥으로도 알려지면서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인구가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알신과 공명 집단은 외부인의 정착은 허락했으되 혼인은 거부하는 등 순수한 혈통만을 고집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날아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격으로 유입인구가 씨족들보다 훨씬 많아지자,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지도자를 뽑아 부족국을 형성한다. 물론 그들은 남성 중심의 사회를 형성했다. 이렇게 해서 경북 일대에 6부족 사회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성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아야 하는 알신과 공명 집단의 남성들은 이웃부족의 남성들과 자신들을 비교해보고는 크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육체적으로도 남성이 우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잠자리에서까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상전처럼 모시며 기죽어 사는 것이 억울했던 것이다. 마침내 쌓이고 쌓인 불만이 행동으로 터져 나왔다. 그들은 몽둥이를 앞세워 여성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듯이,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심한 매질과 구박은 물론 「살파」라는 집단농장을 만들어 여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가 하면, 「미루나기」라는 젊은 여인들의 수용시설을 만들어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기도 했다. 심한 경우 여자들을 인신매매하기도 했다. 이제는 짐승과 비슷한 대우을 받는 여성들은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가 여인들의 집단농장을 탈출한 한 여인이 이웃나라로 도망쳐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는다. 이때가 BC 126년의 일. 그 아이가 후에 진녀라는, 여인국의 여왕이 된다. 진녀는 당대 최고 검객이자 선비인 기른장으로부터 10년 동안 문무를 익히며 20세 처녀로 자란다. 진녀의 출현에 용기 백배한 여인들은 그녀의 휘하로 모여들고,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할 꿈을 꾼다.
그러나 수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남성들보다 열세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진녀는 우선 잘 생긴 젊은 여인들을 골라 요즘 말로 하자면 미인계를 써서 남성들이 지배하는 6부족에 침투시킨다. 그리하여 소수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기습작전을 펴 부족들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진녀 부대가 6부족 등을 멸망시키면서 규합한 여성은 3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처음에 숲속에 숨어서 이른바 게릴라전을 폈으나 이제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자 「서현」(지금의 안동 왕궁터)에다 왕궁을 건설한다. BC 106년의 일이다.
이 왕궁터는 출입구를 제외한 4면이 거의 험한 산으로 둘러싸이다시피 한 천연의 요새였다. 여인들은 마치 벌집을 연상케 하는 6각형의 3층 목조건물을 짓는다. 그리고 산꼭대기에 저수장을 만들고 그 물로 반 수세식 통나무 소변기를 사용할 만큼 문명한 생활을 한다. 여인들은 또 왕궁 입구에다 아기 거북을 만들어 세우고, 궁궐 옆에는 수호신이자 남성을 상징하는 거대한 돌거북 6개를 세운다. 왕궁터 북쪽의 가장 신령하다고 믿은 언덕에는 국정자문위원격인 「상라여신」이 기거하며 여왕의 스승 노릇을 했다. 왕궁 안의 모든 길은 꽃으로 단장하고 뜰에는 금잔디를 가꾸었다.
여인들은 포로로 잡아온 남자들을 이용해 성욕을 해결한다. 만약 임신이 돼 여자 아기가 태어나면 전사로 키워내고 남자 아기는 왕궁에서 30~40리 떨어진 「월전」이란 곳에 버려서 굶어죽게 만드는 잔혹성도 보인다. 깊을대로 깊은 남성에 대한 증오심이 모성애를 가렸던 것이다.
신라 박혁거세의 정체
여왕 진녀가 왕궁을 산속 깊은 곳에 세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6부족국을 무너뜨려 나라를 세웠지만 주변의 남성이 통치하는 나라들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약한 상태여서 일단은 여인왕국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인국 주위로는 소백산 남서쪽에 자리잡은 동인국(후의 한반도 백제)이 있었다. 동인국이라는 이름은 서해바다 건너 중국 대륙에 서인국(후의 대륙 백제)이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동인국은 몇 차례 여인왕국에 기습을 시도하지만 여인국의 미인계를 이용한 첩보전과 수기(手旗)를 이용한 신속한 연락망, 고도로 훈련된 여인 기마병 앞에서 맥을 못추고 퇴각했다.
여인국 남쪽으로는 일찍부터 중국대륙에서 한반도에 진출한 6가야가 있었다. 6가야 세력은 어쩌다 여인왕국이 큰 위기를 맞을라 치면 번번히 도와주어 위기를 모면한다. 가야인들은 북쪽세력(후에 고구려)과 서쪽세력(백제)의 방어기지인 여인국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왕국이 개국한 지 30여년만에 여왕 진녀는 죽고 후에는 「울멍」이라는 장수에 의해 여인국은 문을 닫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56년경.
이후 여인국의 여성중 일부는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여성들은 남성들에 대한 증오심을 잊기로 하고 남성사회인 사로 6촌과 더불어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바로 BC 54년 박혁거세와 여인국 출신 알영이 합의해 세운 신라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자동서기로 기록한 여인왕국의 역사다. 김경보씨와 함께 안동의 여인 왕궁터에서 마지막 여정으로 경주를 향했다. 김씨의 주장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들을 화해케 하고 그 공로로 신라의 초대왕이 된 박혁거세는 첫 도읍지로 지금의 황룡사 터를 잡았다는 것. 현재 복원처리를 한 황룡사 터를 밟으면서 먼먼 과거로 눈을 돌려본다.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하면 대개 알에서 나온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설화나 금 바구니에서 출현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전설을 머리에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그만큼 신화시대로 여긴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바로 그 2천년 전에 한반도에서는 신화시대가 아닌 역사시대로 활발한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지난 88년 발굴된 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는 2천년 전의 유물인 붓과 부채, 목제 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붓은 당시 우리 민족이 문자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고, 동양 특유의 공예품인 칠기는 문명의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였다. 또 최근에 발굴이 완료된 전남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는 높은 문화수준을 나태내주는 가야금과 가죽신의 신발골, 베틀의 부속기구 등이 출토됐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이전에 높은 문화를 유지한 집단들이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다.
바로 그 시기에 진녀의 여인왕국은 50년간이라는 짧은 역사를 누리다가 신라에 자리를 물려주고 무대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과연 여인 왕국은 존재했을까, 그리고 안동의 유적지는 과연 여인 왕국의 근거지였을까. 왕궁터를 발굴한다면 과연 어떤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인가.
만일 여인왕국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우리 고대사는 그만큼 풍성해질 것이고, 그것이 한 기공사의 상상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쳐도 재미있는 소설 읽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역사가는 과거를 복원하는 훌륭한 추리작가』라고 누군가 말한 것이 생각난다.
스크랩출처 :안동초등학교 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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