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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환은 말없이 청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만해도 눈에 생기가 넘쳤는데 기하의 죽음 이후 경환은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갔다. 이젠 대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경환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기하의 몫까지 자신이 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쩐지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너도 죽어. 사람을 죽였으면 죗값을 받아야지.”
악몽 속에서 흙에 묻혀있던 그녀는 이제 흙에서 빠져나와 꿈, 현실 할 것 없이 시시때때로 경환을 괴롭혔다. 자신이 무심코 놓아준 살인범의 트렁크에 아내가 실려 있을 때도 있었고 딸이 실려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그 차를 쫒아가지만 결국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허나 이 또한 그녀가 보여주는 환상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경환이 가는 곳 어디에나 그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경환은 청아를 찾게 되었다. 얼마 전만해도 저 어두운 눈동자가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죄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하루 중 청아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제일 안심되었다. 경환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어차피 살아있을 수록 자신의 죄가 더욱 또렷해지기에 죽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경환을 찾아왔다. 경환은 다 죽은 눈으로 자신 앞에 앉아있는 늙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경환은 그마저도 귀찮다고 생각하며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저는 안기하의 애미 되는 고향숙 입니다.”
경환은 인사도 대답도 없이 그냥 앞만 쳐다보았다. 향숙은 그런 경환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얘기했다.
“제.....아들도 죽기 전 며칠 간 당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여전히 묵묵부답인 경환을 보다 향숙은 울분이 찬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가방에서 노트 한 권을 꺼내 그대로 경환의 뺨을 후려쳤다. 자식 잃은 어미의 손이 제법 매웠는지 그제야 경환의 눈이 향숙에게로 향했다.
“아들이 전해주라고 한 겁니다. 연구원의 일기장이라고 하더군요.”
향숙은 경환의 품에 노트를 툭 던지고 나갔다. 자식 잃은 어미의 비통한 한마디를 남기고
“당신...... 죽으면 절대로...절대로 용서 안 해.”
침묵이 내린 방 안에서 경환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멍하게 앉아 있다가 느릿느릿 노트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하....... 씨발....... 이제야 알았다.”
연구원의 집단 자살도, 두 형사의 죽음도, 그리고 기하가 죽기 직전에 남긴 묘한 말의 의미도. 경환은 차키를 들고 피날레를 맞이하기 위해 나갔다.
20XX년 X월 X일
과연 인간은 날 때부터 선한가? 악한가? 나는 철학은 싫어하지만 오늘 이혜정교수님 시간에서 다룬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철학과 전공이 관련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니 철학도 꽤 재밌게 느껴졌다. 나는 교수님과 다르게 성악설을 지지하지만 교수님의 생각을 참으로 흥미로웠다. 만약 교수님의 말대로 인간이 선하게 태어나서 계속해서 좋은 것만 보고 정의로운 것만 배우다면 이 세상에서 범죄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20XX년 X월 X일
요즘 아이들이 우스갯소리로 이제 우리도 고학번이라며 눈물어린 말을 한다. 흑흑.... 어느새 우리가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나이라니!! 그래도 나는 일치감치 마음을 정했다. 이혜정교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학원에 갈 것이다!
20XX년 X월 X일
헐.... 대박.... 교수님께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자신의 연구센터에 일을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셨다. 친구들이 왜 나서서 노예 질을 하냐고 구박했지만 나는 내 능력을 인정받은 거 같아서 좋았다.
20XX년 X월 X일
오늘 처음으로 교수님 말로만 전해 듣던 청아를 만났다. 맑을 청에 맑을 아. 진짜 좋은 것만 보고 배워서 그런지 청아의 눈이 엄청 맑았다. 직접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아직 나는 관련 교육을 안 받은 터라 혹시라도 청아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교육 받을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
20XX년 X월 X일
내가 실수로 청아를 죽일 뻔 했다ㅠㅠㅠ 청아에게 잘못된 약을 투여할 뻔 한 것이다. 인류의 희망이 나 때문에 사라질 뻔 했다. 청아는 그야말로 순수한 존재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약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교수님은 언젠가 청아가 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욕구를 조절하고 더 나아가서 아예 욕구를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청아가 ‘선’ 그자체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절대 악은 존재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데 과연 절대 순수, 절대 선이 된 청아는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줄까? 천사를 영접한 듯 한 성스러움이 아닐까?
그리고 절대 선 그 자체가 탄생했다. 청아에게 잘못, 더러움, 욕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흰 종이에 점을 찍으면 그 점이 더 선명하게 보이듯 청아를 마주한 연구원들은 청아에게서 자신이 지은 죄와 더러움을 더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았다. 청아를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그들은 그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 깨달았다. 허나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마치 이끌리듯 청아의 순수함을 동경하던 그들은 어느 날 결론을 내렸다. 순수함을 위해서, 선함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악함은, 잘못은, 죄는 사라져야한다고. 아니 더 나아가 아예 그것들은 없어야 마땅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땅히 자신을 없앴다. 잘못된 건 자신들이었으니까.
경환은 청아가 있는 병실의 문을 열었다. 여전히 청아는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모든 걸 알고 나서야 자신이 왜 그렇게 청아를 바라보고 싶었는지 알았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깨끗함을 동경했으니까. 경환은 문을 닫고 뚜벅뚜벅 걸어가 품속에 숨겨둔 총을 꺼내 청아의 이마에 갖다 댔다.
이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세상에 살면서 조그만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이가 있는가? 욕구가 없는 인간이 있는가? 어떤 인간이든 청아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없애고 싶어 질 것이다. 경환은 어린 연구원의 일기에 있던 단어를 떠올리며 조소했다.
‘천사라고?’
존재만으로 인간을 죽이는 존재. 그건 천사라기보다 악마에 가깝다.
‘아니 오히려......’
그때였다. 지금까지 경환에게 전혀 반응하지 않던 청아가 고개를 돌려 경환을 바라보았다. 경환은 다시 청아의 맑은 눈 속에서 자신에게 내재된 깊은 어둠을 보았다. 다가온다. 그녀가 다가온다. 자신의 죄책감이 다가온다. 경환은 그렇게 느꼈다. 갑자기 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경환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마치 바닥으로 꺼지듯 푹 무릎을 굻었다. 이내 경환은 부들부들 떨다가 총을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댔다.
“나나나나느느느느은 더더더더더러러러어어어어”
“자자자잘모모모모모슨 어어업어져아아아아”
경환은 마치 고장난 장난감처럼 기괴한 말을 반복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아쇠에 놓인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순간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던 청아가 내려와 경환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경환의 팔을 들어 총구를 자신의 이마에 댔다. 경환은 그 행동이 마치 거룩한 의식과 같이 성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청아는 경환의 눈을 바라보았다. 경환도 그저 조용히 청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까처럼 죄책감이 든다거나하지 않았다. 경환은 자신이 지금 진짜 청아의 눈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경환은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아 오셨슴까 선배님!”
면회실에 들어서니 창 너머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대호가 보였다. 경환은 의자에 앉자마자 대호에게 핀잔을 주었다.
“미친X. 선배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버릇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나저나 죄수복도 잘 어울리십니다.”
경환은 여전히 눈치 없고 털털한 대호의 모습에 픽 웃음이 났다.
“어? 원래 쌍욕이 날아와야 하는데 교도소에 계시더니 성질이 많이 죽으셨습니다.”
대호의 말대로 사건 이후 경환의 성격은 많이 차분해졌다. 무슨 악마고 천사고 선이고 악이고 이런 것들과 싸우고 나서인지 세상이 참 작아보였다.
“너도 참 성격도 좋다. 살인자를 찾아오고 싶냐?”
“그거야 선배님한테 사정을 다 들었으니까요.”
“......미련한 새끼.... 그걸 믿냐..”
경환이 대호를 구박하면서도 그래도 그를 자신의 옆에 뒀던 건 대호의 이런 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호는 껄껄거리며 웃다가 사뭇 진지해진 표정을 지었다.
“항소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뭐?”
“아...... 그 마지막에 병실에서 청아라는 놈이 이상한 힘을 이용해서 자기한테 총을 쏘게 만든 거 아닙니까?”
서로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던, 1초가 억만년 같던 그 순간 경환은 자신도 모르게 깨달았다. 청아가 죽고 싶어 한다는 걸. 새하얗게 만들어진 청아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아니 애초에 청아에게 검은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청아는 이 세상에 혼자 있었던 것이다.
경환은 온통 새하얀 눈이 내린 세상에 자기 혼자 쓸쓸히 서 있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건.......아주 외로운 일이었다.
“항소는 무슨....... 천사를 죽인 죗값치고 이정도면 싼거지.”
경환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