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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치긴 왕가에 대한 간략한 정리 두번째 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2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6
조회수 : 20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0/21 20:37:05
옷치긴이 다른 이들보다 막대한 재산을 가질수 있었던 이유는 유목민족 특유의 재산 상속 제도 때문입니다, 몽골에서는 막내 아들은 에젠 즉 집 주인이나 옷치긴 화로를 지키는 자, 화로의 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가계를 지키는 자로서의 의무를 의미합니다, 막내아들은 결혼후에도 여전히 부모 곁에 남아있으며 아버지가 죽을 경우 어머니를 모시고 살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특권을 가지고 주요 재산을 차지할수 있었지요.
 
즉 옷치긴이 대칸을 제외한 다른 상속자들을 압도하는 막대한 재산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관습에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점은 비단 부민으로 살펴보는 재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카사르, 카치운, 옷치긴 등 동방 왕가가 상속받은 동북 지역은 징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 바투르가 이끌던 이들의 중심지 이자 흉노 이래로 유목 제국의 모태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려와도 매우 가까웠던 탓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곳이기도 합니다.
 
그 뿐일까요? 동생 아릭 부케과 대칸의 자리를 놓고 일전을 벌이던 쿠빌라이 칸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원말에 북상하여 세를 가다듬던 북원이 세워진 땅이기도 합니다, 즉 역사적, 지리적으로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수가 없는 곳이지요.
 
물론 가장 많은 부민을 상속 받은 이는 툴루이라 할수 있겠지만 그는 징기스칸 사후에 옷치긴 에젠의 자격을 통해 징기스칸이 남긴 영지와 부민을 상속받은 것이니 동 서 올루스를 통틀어 가장 많은 부민을 가지고 있던 이는 옷치긴이라 할수 있습니다.
 
징기스칸기 등의 기록등을 통해 볼때 징기스칸 생전부터 받아온 각별한 총애와 형제들 사이에서 그의 위상은 대단히 드높았던 것을 알수 있는데 이는 애초부터 옷치긴 왕가가 이른바 동방 3왕가의 수장격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비단 이러한 기록뿐만 아니라 몽골의 시국이 변함에 따라 서방의 여러 왕가들이 제각기 다른 행보를 보이지만 동방의 왕가들은 옷치긴 왕가를 중심으로 일치된 행보를 보이는 점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분봉 받은 지역에 대하여 제왕들은 왕가를 설립하고 부민과 지역에 대한 거의 모든 권한을 수행하며 독자적인 지배자로서의 자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금나라와 남송 등을 정벌하며 얻어낸 지역에 대하여서도 다루가치 등 관리를 임용 파견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행사하던 이 들에게도 정치를 보좌해줄 사람은 필요했고 이 들을 왕부, 몽골어로는 비치케치라고 하는데 몽골비사에 따르자면 징기스칸이 황금씨족들에게 분봉을 해주며 임명해준 이 들이라고 합니다.
 
이 들의 역할은 몽골비사와 원사에 따르자면 모자란 점을 채워주는 것을 넘어 군사 업무를 비릇하여 공무 일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즉 가장 중요한 역할은 지배 통치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비 유목민들이 주로 담당하는 자리였으며 보통 1~3인이 임명된다고 하나 실제는 4인 이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옷치긴 왕가에 징기스칸 분봉시 임명된 왕부를 살펴보자면 아린 테무르, 사르기스, 유덕령 등이 있습니다, 아린 테무르는 본디 위구르 인으로 징기스칸이 위구르를 공격했을때 그의 형제와 함께 항복하였고 징기스칸을 따라 많은 원정을 다니며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특히나 그 높은 문화적 소양을 높게 평가 받은 인물입니다,
 
사르기스 역시 위구르 출신인데 그는 중앙 정부와 웃치긴 왕가의 외교적 파이프 라인을 담당했습니다, 특히나 옷치긴 사후 적손인 타카차르와 서형 투데의 왕위계승쟁탈전에서 서형 투데의 전횡이 심해지자 중앙 정부에 도움을 청하여 타카차르를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며 후에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간의 대칸 쟁탈전이 벌어졌을때 고민을 하던 타카차르를 도와 쿠빌라이의 손을 들어주게 만들어 쿠빌라이가 대칸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유덕령은 산동 출신의 한인으로 어려서 부터 빼어난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로 보통 왕부를 뽑는 두가지 방식 즉 중앙 정부의 임명을 받는 선발 방식과 왕가에서 직접 뽑아가는 방식 중 후자인 직접 뽑아가는 방식으로 선발된 인물이며 화북봉분 이후에 익도로에 다루가치로 파견되어 군민을 관할한 업적을 남깁니다, 다만 원사에 이르기를 그의 아들 유국걸이 본디 여진인이라 하는 것을 봐서는 한인이라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본디 다루가치란 제왕이 한지에 파견하여 행정 사무 관리를 담당하게 만드는 관리로 보통 자신의 수하를 임명한다면 중앙 정부에 보고를 올리면 중앙 정부에서 승인이 내려오는 방식을 따릅니다.)
 
위의 기록에서 볼수 있듯이 웃치긴 왕가의 관리들은 위구르, 여진, 한족 등 피에 얽매이지 않는 능력 위주의 구성을 보이고 있었는데 나머지 글은 다음 글에 잇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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