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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panic_882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여기봐
추천 : 14
조회수 : 1722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6/06/02 0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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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

지하철 역을 빠져나와 한참을 걷던 성민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봤다. 매일 보던 건물은 없고 웬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뭐야...?"

성민은 아스팔트가 아닌 오솔길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1시간 뒤에 중요한 계약 건 미팅이 있기 때문이다. 꽤 큰 건이라 그 어느때 보다도 열심히 준비한 그였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그는 김 대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서비스 제한 구역]


"뭐야 이거?"

성민은 뒤를 돌아봤지만 발소리 가득한 교차로가 있어야 할 곳엔 허허벌판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었다. 

온통 미팅에만 쏟고 있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그는 두려워졌다. 

그가 서 있는 오솔길만이 그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었다. 양쪽으로는 초록색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성민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경외감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50미터 정도 거리에 두 갈래길이 있었다. 성민은 무작정 앞으로 걸어나갔다. 

갈림길 입구에는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나무로 만든 표지판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 길을 지나가기 위해서 당신은 양쪽 길 모두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어린애들 장난 같은 상황에 두려움도 잊은 성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서류가방을 내팽개쳤다.

"퀴즈를 풀라는 거야 뭐야. 장난하는 거야? 여긴 어디야, 꿈이야?"

성민은 허공에 대고 혼잣말로 외쳤지만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성민은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에 성민은 발이 굳은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성민은 오른손으로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왼쪽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여기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서 이 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고, 그가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었다.

성민은 자신이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그가 생각한대로 자신은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선택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양 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길을 5분 남짓 걸었을까, 성민은 또 다른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 길을 지나가기 위해서 당신은 양쪽 길 모두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표지판 앞에는 성민이 5분 전 내던진 서류가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성민은 등을 따라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번엔 수트 자켓을 벗어던지고 오른쪽 길로 달려갔다. 숨이 가쁘게 차오를 때 쯤 그는 또 다시 갈림길을 마주했다.


[이 길을 지나가기 위해서 당신은 양쪽 길 모두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성민은 멍한 표정으로 모래가 가득 묻은 자켓을 들어올려 만져봤다. 여전히 그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좌절감을 느끼며 그는 그제서야 표지판의 글씨를 제대로 읽어 보았다. 불가능한 조건이다. 양쪽 길 모두에 존재하라니.

바로 다음 순간 성민은 표지판 아래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조그만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딸깍>

나무 상자를 열자 세 가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작은 칼, 하얀 붕대, 그리고 생수.

세 가지 물건과 표지판을 번갈아 바라보던 성민의 머릿속에 하나의 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게 답이 아닐거라 부정했다. 분명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해답을 생각해낼 수 있으리라 그는 믿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흐르고도 보다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언제까지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 알 수 없는 곳에서 굶어 죽기 보다는 무엇이든 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성민은 어서 빨리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그는 쓸데없이 기다란 붕대를 보며,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만 길을 지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시행착오는 겪고 싶지 않았다. 고통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성민은 뼈도 자를만큼 날카로운 칼을 집어들고 자신의 왼쪽 손을 잘랐다.

"......!!!!!!!"

뼈와 살이 한 번에 잘리고 그의 손이 바닥에 쿵 떨어졌다.

온 몸을 타고 오는 고통에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피가 솟구쳐 나오는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아 나갔다. 

그리고 떨리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손을 집어 오른쪽 길에 내던졌다.

성민은 생수병을 집어들고 몸을 일으켰다.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된 채 성민은 왼쪽 길을 걸어갔다. 떨리는 몸을 이끌고 한참을 걸은 성민은 또 다시 두 갈래길에 도착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하세요.]


성민은 온 힘을 다해 버티며 표지판 아래 상자를 열었다.

<딸깍>

조그만 액자 두 개가 들어있었다. 왼쪽에는 아내의 얼굴, 오른쪽에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성민은 바로 답을 내릴 수 있었지만 선택의 결과를 알 수 없어 망설였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점점 풀려가고 있었다. 

성민은 잠시 망설이다 왼쪽길로 향했다. 결혼한 순간부터 다른 누구보다 아내를 우선으로 하기로 다짐한 그였다.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이제 그는 새로운 가족의 일원인 것이다. 그는 죽을 듯 아픈 와중에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에 약간의 우쭐함을 느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몇 분 쯤 걸었을까. 오른쪽 길에서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아아아!!!!! 성민아!!!! 성민아!!!!!!!"

성민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오른손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이를 꽉 다물고 다시 앞으로 돌아섰다. 그는 생생히 들리는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를 무시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지만 자신의 선택을 그대로 지켜나갔다.

그의 눈이 흐릿해져갈 때쯤 세 번째 갈림길이 나타났다. 


[당신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성민은 고개를 돌려 왼쪽 길을 바라봤다. 2년 전 돌아가신 일흔의 아버지가 그 곳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눈물 흘리며 안타깝게 그의 왼쪽 손목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파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언제나 아들을 다정하게 대해주시던 아버지였다.

성민은 다시 고개를 돌려 오른쪽 길을 바라봤다. 네 다섯살 정도 되어보이는 조그만 남자 아이가 혼자 서 있었다. 아이는 두려움 가득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성민을 애원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성민에게도 아이가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죽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오른쪽 꼬마아이만 한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성민의 왼쪽 손목에 감긴 붕대에서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픔도 잊고 가만히 서서 허공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성민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오른쪽의 아이를 바라봤다.

그의 몸이 한층 더 떨리기 시작했고 그는 시선을 거두고 왼쪽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등을 보이며 돌아선 순간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성민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와 30년 넘는 세월을 함께 한 아버지를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성민은 아버지와 함께 길의 끝에 다다랐다. 왼쪽에는 낭떠러지가, 오른쪽에는 널따란 길이 있는 조그만 광장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성민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느끼며 광장 중앙에 놓인 표지판을 읽었다.


[당신의 목숨을 버린다면 당신이 포기했던 모든 선택들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성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고함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악!!!!!!!!!!!!"

성민은 왜 자신이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그제서야 너무나 궁금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알고 있어요? 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돼요? 여긴 어디예요? 예?"

"......."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성민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성민의 눈에 아버지의 눈빛은 그를 시험하는 듯 느껴졌다.


성민은 소중한 것을 잃은 삶과 소중한 것을 지킨 죽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러다 강렬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내 한 목숨 바쳐서라도 가족을 지켜야한다. 가난한 어린시절을 살아온 그가 늘 되뇌이던 말이다.

그는 최근 들어 잊고 살던 그 생각을 되새겼다. 그는 신념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람은 본래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민은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서서히 뒷걸음질쳤다.

날카로운 벼랑이 그의 등 뒤로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온몸의 힘을 빼고, 성민은 몸을 뒤로 젖혔다.










성민은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오른손에 서류를 가득 든 그는 갑자기 머릿속이 어지러움을 느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뭐지. 오늘 같이 중요한 날 이러면 안되는데... 찝찝하게.'

성민은 개운치않은 기분으로 신호 바뀐 횡단보도를 건넜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성민은 왼손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김 대리의 전화다.

"여보세요"

<과장님 어디 계세요. 늦으시는 거 아니죠?>

"어... 어 나 거의 다 왔어. 걱정 마. 회의실 세팅은 다 돼 있지?"

성민은 전화를 끊고 방금 전까지의 모호함을 잊은 채 금세 서류로 다시 눈을 돌렸다. 오늘은 중요한 계약 건으로 미팅이 있는 날이다. 

핸드폰이 또 다시 울렸다. 또 아침부터 걸려온 어머니 전화다. 

"어 엄마. 또 왜. 아이 그런걸로 아침부터 전화를 해.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해요."

성민은 전화를 끊고 잰 걸음으로 회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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