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엄마, 나는 오늘 조금 힘들었어.
잘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돼.
날도 더워서 어깨가 처져.
있잖아 엄마, 나는 전구가 무서워졌어.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와서 불을 켜는데,
전구가 내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춰.
근데 너무 밝아서, 어두운 내 머릿속까지 비출 것만 같아.
있잖아 엄마, 나는 거울이 무서워졌어.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수를 하려는데,
내 눈이 나를 쳐다봐.
어제는 나를 힐난했어. 오늘은 나를 동정해.
있잖아 엄마, 나는 책을 못 읽겠어.
내 한 치 앞이 얼룩져서 책 속의 지혜는 보이지 않거든.
오늘도 습관처럼 책상에 앉았다가,
어제와 똑같은 글자를 보고 화가 나서 책을 덮어버렸어.
있잖아 엄마, 나는 전화가 무서워졌어.
엄마가 지금 나한테 안부 전화를 걸고 있는데,
여보세요 한 마디에 담길 수 만 가지 감정이 들킬까봐 목을 가다듬는 것도 이제 지쳤어.
있잖아 엄마, 나는 옷을 사지 않기 시작했어.
이유는 글쎄,
속이 빈 상자를 허울 좋게 감싼다고 의미가 있을까.
있잖아 엄마, 내 슬픔엔 이유가 없어.
이유가 뭔지 알면 도려내버릴 수 있을텐데.
책에 쓰인 사람들처럼, 티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내 인생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있잖아 엄마, 오늘은 말을 하고 싶었어.
그런데 지금껏 참고 참은 이야기가 덩어리져
목구멍에 막혀버렸어.
그렇지만 다행이야. 울음이 올라오는 걸 막아주니까.
있잖아 엄마, 나는 항상 하늘이 좋았어.
끝도 없는 허공이라면
내 안에 담긴 생각들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있잖아 엄마, 그래서 나는 하늘을 가까이 마주하고 있어.
지금 내 오른쪽 뺨을 스친 바람이
내일쯤엔 엄마한테 가 닿을 수 있을까.
있잖아 엄마, 있잖아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