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악마를 만났다. 안개 속에서 그 검은 형체와 마주쳤다. 악마가 말했다. 이제 너만 삼키면 돼.
간만에 꾸는 악몽이다. 새벽에 깨 한참을 뒤척거렸다. 꿈자리가 이렇게 뒤숭숭하다니,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낮에 밖을 나서다 골목에서 껌을 밟기도 했었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길 가생이로 기어들어가 개가 오줌 누는 자세로 신발을 쳐올려 물티슈로 닦아냈다. 땀이 팔꿈치 사이로 스며들었고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이게 뭔 일이래.
저녁엔 식당가를 배회했다. 해 진 뒤에도 더위가 식지 않았는지 많은 곳들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반바지를 입고 간이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중년남성들이 보였다. 이제 곧 웃통도 까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말로 내뱉진 않았다. 내뱉은 건 그들이었다. ‘아이 꼭 저래야 되나 불편하게. 괜히 생각나잖아 에이..’ 누가 불편하게 했나 보군.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그게 나 때문이란 걸 알았다. 내가 멘 가방에 껌딱지처럼 붙은 노란 리본 뱃지가 불편하단 얘기였다. 뭐, 불편할 수도 있겠지. 근데 나이가 들면 목청 조절이 잘 안 되나 봐. 맥주 때문일 수도.
나도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에 단 뱃지다. 물론 시선이 곱지 않을 때도 있다. 나는 왕쫄보라서 그런 느낌을 받으면 멘탈이 급 움츠러든다. 그러다보니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어떤 잡귀가 그 뱃지를 보고 나도 기억해달라며 들러붙은 건 아닐까. 껌, 더위, 그리고 악몽.
그럴 리가. 영화 <곡성>(나홍진,2016)을 보고 났더니 별 드러운 생각이 들러붙네.
극장에 자주 못 가는 편이기에, 난 웬만한 영화는 다 재밌게 본다. 지난 10여년간 극장을 나서며 ‘사기당했다’ 라고 뇌까린 작품은 딱 두 편 뿐이다. <신세계>(박훈정,2013)와 <곡성>. <신세계>는 맞춤법을 무시한 싸이월드 감성글 같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방식으로 부자아빠에게 가기 위해 휘두르는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것이었다. 안녕 가난한 아빠. 당신은 날 너무 주눅들게 했어요. <곡성>에서 누가 얜데 알고보니 쟤더라 하는 식의 수수께끼는 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문제는 감독의 인터뷰에서 ‘피해자의 관점으로 찍고 싶었다’라는 대목을 읽은 순간이었다. 실재하는 게으른 악을 환상의 무결점 악으로 포장해 놓고는 그게 피해자를 위한 선물이라고? 맙소사. 그걸 목도하면서 한때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자가 수재피해를 입은 지역에 찾아가 피해자에게 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음 편하게.
겁많은 당신이니 재미없었던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들려온다. 그럴 수도 있다. 늘 더 쎈 걸 찾아헤매는 현대의 아편중독자 동지들에게 <새로운 삶>(필립그랑드리외,2002)을 추천하는 바이다. 텅 비어버린 고독한 표정들이 여는 집회에서 들려오는 속삭임들. 제발 날 좀 어떻게 좀 해 봐 봐봐. (아버지의 느낌을 준) 어떤 남성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투견들의 추격을 받고 결국 쓰러져버린다. 저 찢겨져나가는 생살들. 성노동자는 군인에게 행위 이전에 단 한 마디의 물음표를 내뱉는다. 코소보? 코소보.. 코소보.. 영화를 보고 나서 단 한 마디일 뿐인 그 단어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모르니 검색해 봐야지. 코소보.. 보스니아 내전.. 유고 내전.. <사라예보로의 귀환>(필립그랑드리외,1996).. 내가 밝고 건강한 걸그룹 멤버들보다 나을 게 뭐람. 겨우 20여 년 전에 이렇게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걸 잘 몰랐었다. 이 두 편이 역사교육영화냐고? 일단 심신미약자들은 보지 않는 게 좋다. 나는 경고했다. 클클클.
<곡성>이 깐느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단 얘길 들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들 딴에는 신선해 보이는 이 괴이한 돌출을 예술로서 보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그 관점에는 동의한다. <추격자>(나홍진,2007)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연쇄살인범이 머물던 방의 벽지가 들춰지는 부분이었다. 바닥까지 내려간 소름끼치는 정신적 상흔이 언뜻 보였다. <황해>(나홍진,2011)에서 그 유명한 족발당수 장면 직후 불타는 집의 모습은 그 벽지들을 태우는 완전범죄의 불길처럼 보였다. 이 감독은 독방에서 두문불출하다 벽지를 식칼로 내려꽃은 적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싶었다. <곡성>에서도 (컨트리스타일로 녹음을 빤딱거리는) 초중반부 장면에서 유일하게 눈길이 간 것은 외지인의 집 벽지였다. 불타는 내가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지직거림들. <곡성>을 보고 나서 그의 다음 작품을 극장에서 보는 건 돈 아깝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는다면 이 부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녀>(김기영,1960)가 불길한 2층집을, <안녕하세요>(오즈야스지로,1959)가 전반부에서 벽지처럼 둘러처진 미닫이문의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과 비교한다면 영화연출로서보다는 미술적인 돌출에 가깝다. - 물론 <레미제라블>과 <무한상사>를 엉성하게 짜깁기한 어떤 희곡 역시 이런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쿨럭...
이러한 작품들이 이렇게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뭘까. 이 만연한 경멸의 컨셉놀이, 아니 낚시질들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2012년 즈음이 피크라고 생각했었다.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다.
언젠가 낮에 어느 성인사이트에서 봤던 글이 떠오른다. 참 솔직한 글이라고 생각했다. 댓글을 달기 위해 포스트잇에 적어둔 메모를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
‘노력하는 건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물며 창작을 위한 것이라면 계속 해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 노벨상이나 잡지 심사위원의 머리 끝까지 가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끝까지 가 보는 노력이 좀 더 유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그래야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남는 게 있지 않을까요? 공단의 현실이나 미래·취업 등의 문제는 제가 말할 수 없는 부분이고 그 영역에서의 고민이 있긴 하겠습니다만... 본질적으로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건투를 빌겠습니다’
밤에 다시 접속해보니 글이 지워지고 없었다. 또 하나의 부끄러운 댓글을 남기지 않아도 됐으니 잘 된 일이다.
물론 다른 이름도 있다. 당신은 나보다 건강한 사람이니 잘 헤쳐나가겠지.
축축하다. 자리에 누우면 뭔가가 몸을 저 깊숙한 곳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웅크리고 누워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해 보다 이런 문구를 보았다. 내가 정말 힘든 것은 그저 돈이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풍족했던 옛시절 문화적으로 세련되었던 어른들이 살던 집에 흐르던 그 따뜻한 공기가 사라져버렸다는 상실감 때문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출처 미상. 한 번 보고 건너뛰어버렸던 트위터 계정이라 다시 찾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집’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집으로 간다. 나는 이 집이 매우 익숙하다. 지난 수 년간 꼼꼼하게 지어올렸다.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편백나무숲 한 켠에 나무물결들을 짝맞추어 마련해 놓은 아담한 1층집이다. 당연히 벽지는 그냥 흰색이다. 바람에 실려 들어오는 나무향 사이로 아침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얹혀져 들어온다.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다. 아침으로는 간단하게 마늘스크램브.. 아 아니다 상상이니까 좀 더 써도 된다. 귀하신 토마토님도 넣어 볶아먹는다. 이제 내 품이 익숙한 회색 고양이에게도 밥을 해 주고 나면 벌써 오전이다. 책장으로 가자. 역시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만 가득 차 있다. 이 마지막 날 오전에 무엇을 꺼내읽을까. 늘 그렇듯이, 마침내 완벽한 장소에 당도했을 때 주어진 시간은 딱 하루 뿐이니까. <A.I.>(스티븐스필버그,2001)에서 소년과 어머니가 그래야 했던 것처럼.
비록 마지막이지만, 나에겐 아직 선택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 오후에는 영화도 한 편 보기로 하자. 역시 바닥부터 천장까지 좋아하는 영화들로 가득 차 있다. 무엇을 골라야 내일 잘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는구나.
오늘 밤에도 꿈에 악마가 찾아온다면 말할 생각이다. 날 삼킬 거라면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 집도 함께 삼켜봐라.
역시 중2병은 나의 힘이다. 오늘 밤엔 이부자리에 누운 후 오유 동게에 들러 고양이 사진이나 실컷 보다 잠들어야지.
응? 어디서 클클대는 소리 못 들었냐구? 클클클. 클클클. 난 그러지 않아도 돼. 이미 난 도처에 있으니까.
벽지에 주먹을 내리치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 5월은 4월보다도 잔인한 달이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봤을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이 어처구니없게도 배우이자 UN난민기구친선대사인 정우성 씨가 TV에 나와 ‘우린 서로 사랑해야 돼요’라고 말하던 그 그림밖에는 없을 정도였다. 이젠 질투가 나는 게 아니라 존경해야 할 판이다. 에잇..
무엇인가가 창궐하는 냄새가 난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곳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다. 만약 거기까지 따라온다면 잡귀가 아니라 캔터빌의 유령쯤 되겠지. 차 한 잔 대접해줄 용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