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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아엎은 감자밭. 처음 보던 아침에는 너무 참담해서 눈을 돌려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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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밭이 갈아엎어졌다'라고 쓰는 마음이 자갈밭 같다. 내 밭이 아닌데도 눈이 시려 차마 못 보는데, 직접 트랙터를 몰고 밭을 엎었을 농부의 마음은 짐작조차 힘들다.
감자 이랑이 어찌나 곧은지 자를 대고 두둑을 지었나 싶던 밭이었다. 거름 대신 축산액비를 뿌려 냄새 때문에 한동안 차창을 올린 채 지나야만 했었다. 감자싹은 때맞춰 올라왔고 일 주일 또는 열흘 간격으로 비도 내렸다. 6월 말이 되자 감자 줄기가 시들기 시작했고 2주 전 비닐을 걷어냈다. 감자를 캐는 일만 남았었는데 캐는 대신 밭을 엎었다.
사정을 아는 동네 형님께 물었다.
"아무리 값이 없다지만 엎을 정도는 아니잖니껴?" "계약재배했는데 감자끝이 갈라졌다고 받아주지를 않는다네. 받아준들 품값이나 건지겠나만." 작년 콩값이 좋았던 탓이다. 콩은 하반기에 심는 작물인데 콩을 심자고 상반기에 땅을 놀릴 수는 없어 이모작이 가능한 작물을 고르다 보니 다들 감자를 심은 것. 너나없이 감자를 심어 씨감자를 넣던 4월부터 값을 걱정했지만, 감자는 7월 수확 때까지 별다른 품이 들지 않는 작물인데다 콩을 심으려면 대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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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마트 납품용 15kg 박스에 감자가 담겨 있다. 상품으로 받아주지 않아 버린 감자가 밭에 즐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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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재배라면서요?" "감자가 넘치니까 아예 거저 먹으려고 덤벼. 첨에 약정했던 금액도 지들 맘대로 깎았어." "지들 누구요?" "농협인지 뭔 마튼지. 어차피 한 패니까." 애초 kg당 700원이 계약 조건이었다. 농협과 농민의 계약이었으되 농협은 한 대형마트에 납품하는 거라며 농민을 위해 일하노라 자신들의 성과를 자랑했으므로, 이웃들은 대형마트라는 안정적인 판로에 기뻐했다.
그 대형마트가 국내 최대 규모의 유통업체라는 것쯤은 평생 호미질로 허리가 굽은 이웃 민호네 할매도 안다. 자신이 농사지은 감자가 대형마트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내 감자가 어느 도시 어떤 매장에서 얼마에 팔리는지도 모르면서 중간상인의 농간을 감수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농간에 휘둘리기 싫어 농협에 공판을 위탁하면 수수료, 상하차비, 박스값, 운임 등이 상품값을 다 갉아 먹는다. 몇 년 전 호박을 공판에 위탁했던 선배는 나중에 부대비용이 상품값보다 많이 나왔다며 거꾸로 비용을 청구 당하기도 했다.
"kg당 700원을 안 준다고요? 계약금도 받았다면서요?" "kg당 550원이라네. 작업장까지 실어다 주면 30원 더 주고. 계약서에 700원으로 하되 시세에 준한다는 조건이 있었나봐. 시세가 비쌌어도 시세에 준해서 값을 쳐줬을라고." 계약재배도 '갑'질 앞에선 무용지물... 피눈물 흘리는 농심 |
▲ 이렇게 큰 감자도 상품이 되지 않는다면서 감량처리한다. 그리고 그냥 가져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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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듣고 넘기기엔 버려진 감자들이 계속 목에 걸렸다. 계약재배 후 벌써 납품한 형님을 찾아갔다.
"몇 박스나 납품하셨니껴?" "200박스 겨우 넘겼네. 근데 실제로는 200박스가 안 돼. 흠 있다고 감량, 잘다고 감량, 너무 굵다고 감량, 15kg 한 박스당 3kg씩 감량 당했으니까 총 600kg, 박스로 치면 40박스를 십 원 한 푼 못 받고 납품했네. 허허." 대형마트용 15kg 플라스틱 박스에 감자를 담아 납품하면 그 중 한 박스를 샘플 조사해서 상품성이 떨어지는 감자의 무게만큼 감량처리 한다는 것이다. 샘플에서 3kg를 감량 당하면 납품 물량 전체 박스에서 3kg씩 일괄적으로 감량처리해서 납품 물량을 계산한다 했다.
"그게 말이 되니껴? 잘아서 감량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굵다고 감량하는 건 또 뭐래요?" "개당 380g 이상 되는 것들은 상품이 안 된다네. 안 되면 돌려주든가. 그 굵은 감자들을 다 가져가면서 십 원 한 푼 안 쳐주는 강도질을 멀쩡히 눈 뜨고 당했네. 허허." "농협 직원이 항의를 안 해요?" "옆에서 빈 박스 정리해주고 있더만. 허허." 웃음소리가 엎어진 감자밭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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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협 유통센터에서 대형마트 납품용 감자가 상하차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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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형마트의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보았다. 햇감자 100g에 198원. 1kg이면 1980원. 농부들이 파는 가격은 1kg에 550원. 550원과 1980원 사이에 지금의 농산물유통 현실이 놓여 있다. 현실 속에는 계약재배를 해도 시세가 낮다고 값을 깎는 농협과 절대 '갑' 대형마트, 외국에 차 한 대 팔자고 그 나라 농산물을 들여와 농가를 고사시키는 정부와 감자 한 알조차 꼼꼼하게 살피며 장바구니에 넣는 소비자가 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쫓겨나 스스로 자신의 감자밭을 갈아엎으며 피눈물을 삼키는 농민이 있다. 묻고 싶다. 정부와 농협과 무수한 '갑'들과 소비자 중 대체 농민의 편은 누구인가.